098화. 아픔과 상처, 그리고 희생
오랫동안 죽음을 곁에 두고 살다모면, 죽음에도 익숙해진다.
마음은 황폐해지고, 의지의 싹은 죽어서 흩어진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의 눈은 더러 분노로, 더러 애원으로 얼룩져 있었다.
황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것이 보이느냐? 맞다. 아수라혈교의 마졸들은 감히 새외의 무리면서도 짐의 천하를 노렸잖느냐? 마땅히 그 혼을 금제하여 노예로 부리는 벌을 줘야지.”
사도명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으리는 대체 어떠한 세상을 만들려고 하오?”
사도명은 지옥문과 싸워온 과정을 생각했다.
염라마인도, 혈강시도, 혼돈마인과, 강철 인형들!
지옥문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았다.
타인을 강제로 부릴 수 있는 노예로 만들고, 신지조차 사라지게 만들어 그들을 부렸다.
사도명이 다시 물었다.
“나으리 혼자만 살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괴뢰가 되어서 따르는, 그런 세상을 원하시오?”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좋지 않겟느냐? 누구도 억울하게 죽지 않고, 누구도 함부로 남을 해치지 못할 것이 아니더냐?”
사도명은 황제를 똑바로 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흔들었다.
“태명이 아니구려.”
“무슨 소리냐?”
“어기전혼한 태명과 이야기를 나눴소. 나으리는 황제이긴 한데, 태명은 아니군. 태명은 나으리처럼 말하지 못했었소.”
황제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껄껄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왜 웃소?”
“도연아. 건녕이 저 녀석을 잘못 택했다 싶었는데, 아니었나보다. 하하하. 더는 살려놓아서는 아니 되겠다. 당장 죽여라.”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도광효에게 나를 죽일 재주가 있다고 판단하오?”
“재주는 없다. 하지만 잔꾀는 있지. 그 잔꾀로 도연은 짐을 황제로 만들었잖느냐?”
사도명의 말문이 막혔다.
어기전혼을 전개해 나타났던 태명은, 단 한 번도 사도명의 말문을 막아낸 적이 없었다.
“태명은 영무자(影武者)였던 건가?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요?”
“저놈을 죽이라고 이미 말하였다, 도연!”
“어지를 받듭니다, 황상.”
도광효가 검을 들어 아수라혈마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수라혈마인들이 움직였다.
사도명은 마인들이, 마당에 모인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옆에 달라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에게는 지켜보는 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한두 명의 혈마인을 벨 수 있겠지만, 그 사이에 다른 혈마인이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도광효가 검을 고쳐 잡고, 사도명에게로 걸어왔다.
“너는 나를 죽일 기회를 이미 한 번 놓쳤지, 사도명?”
도광효의 검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놓친 건 아니다. 주덕문과 모충이 함께 죽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널 죽일 수 있다, 도광효.”
“저 놈에게 만약 내가 죽임을 당하면, 각자 맡은 자들의 목을 뽑아서 모두 죽일 것을 명한다.”
사도명이 놀라서 소리쳤다.
“도광효-오!”
“너는 한 명의 죽음조차 차마 보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지?”
도광효는 창백한 사도명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너는 일백팔십 강철용을 부쉈다. 쉽진 않았을 거야. 많이 지쳤겠지?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었던 건, 쉬고 있었던 거 맞지?”
사도명은 황제가 도광효를 신임하는 이유를, 비로소 실감했다.
다가올수록 도광효의 미소는 점점 넓어져 얼굴을 가득 덮었다.
아울러 손에 들고 있는 검에서 뿜어내는 살기도 커졌다.
“견주어 봐라. 너의 목숨 하나와 삼백칠십 명의 목숨이다!”
사도명은 다가오는 도광효 뒤쪽에 있는, 깡마르고 초췌한 얼굴의 사람들을 보았다.
선택은 두 가지 중의 하나였다.
자신 한 명의 죽음!
혹은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떼죽음!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나는 안다. 네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건녕제가 널 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하하.”
도광효는 계속 다가왔다.
사도명은 황제를 보았다.
황제도 웃고 있었다.
어리던 건녕제를 쫓아낼 때도, 황제는 지금처럼 밝게 웃었을까?
희생은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다.
건녕제는 그것을 두려워했기에 모든 것을 잃었다.
더불어, 세상 역시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언봉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마시오. 어차피 죽을 운명이오. 그러니까 가짜 황제를 죽이시오. 어서-!”
“저런 놈은 겨우 한 명이다. 다른 놈들을 봐. 그 눈을 봐. 애원하고 있지? 제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절규하고 있지?”
도광효가 검을 높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에, 사도명이 본래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도광효의 눈이 커졌다.
눈끝이 찢어질 정도로 부릅뜨면서, 도광효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황상! 위험합니다-!”
사라졌던 사도명의 몸은 황제의 바로 앞에서 나타났다.
가장 빠른 길, 무영섬!
그리고 대리국에서 깨달았던 집중과 응축의 오의인 금강!
둘을 하나로 합한 금강무영섬이 펼쳐지면서, 사도명의 검강은 찰나의 순간에 이미 황제의 가슴을 깊이 찔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으리가 죽는다면 도광효도, 혈마인들도 충성을 바칠 대상이 사라지는 셈이 아닌가?”
사도명의 목소리가 잔상 속에서 흩어졌다.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극상의 쾌검이 날아오건만, 황제는 여전히 크게 웃었다.
“하하하. 건녕은 적어도 겁쟁이를 고르진 않았구나! 도연아! 왜 망설이고 있느냐? 혈마인을 움직여라. 죄수들을 죽여라, 당장!”
**
아수라혈마인에게는 신지나 판단 능력이 없다.
그들은 한때 아수라혈교의 교도였던 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심마문의 금제에 당해서, 아수라혈마인으로 전락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황제는 도광효에게 명령했고, 도광효는 그 명령을 아수라혈마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로 전달했으며, 결국 혈마인이 움직였다.
손바닥에서 강기를, 혹은 검을, 혹은 독을 각각 내쏘았다.
삼백 명의 인질들은 죽음을 예감하며 모두 눈을 감고 말았다.
콰콰콰-콰콰쾅!
폭음이 인질들과, 그들을 죽이려고 날아든 아수라혈마인의 공격 사이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을 노리며 날아오던 사도명의 몸이 중간에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하는 게냐, 이놈?”
사라진 사도명의 몸이 인질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하나가 아니라 수백 개로 변해서 인질을 죽이려고 내쏜 아수라혈마인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콰콰콰콰콰-콰쾅!
폭음이 무수하게 일어났다.
아수라혈마인들이 모두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가슴과 복부은 거의 동시에 모두 각각 터졌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입과 코에서 피를 토하더니 일제히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신음은 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 있었지만, 혼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도광효가 눈을 부릅뜨고 죄수와 아수라혈마인들 사이에 서 있는 사도명을 보았다.
“…무리를… 했다.”
사도명의 입과 코에서 핏물이 흘러 내렸다.
검게 죽은 피가 사도명이 얼마나 심한 내상을 입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개개활활. 수십, 아니 수백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
사도명이 도광효를 보았다.
“덤빈다면 지금이 좋을 거야, 도광효. 내가 지금, 방금의 방어를 통해서 한계를 뛰어넘기 시작하는 기분이거든.”
도광효는 혈마인을 보았다.
그들을 직접 제작한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아수라혈교의 마공을 지닌 채로 강해진 혈강시, 거기에 적암마계의 혼돈강기까지 결합시킨 괴물.
사도명은 그들을 동시에 부수고 난 후 탈진해 버린 것이다.
황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잔뜩 화난 표정으로,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냈다.
“저놈도 똑같은 멍청이다! 건녕과 다르지 않아. 죽여라, 당장! 살려놓을 가치조차 없으니, 죽이란 말이다, 당장!”
일의생멸은 시전자에게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금강무영섬의 시전에는 극단적인 내공의 소모가 동반된다.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편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도광효가 미간을 찡그렸다.
“멀고 어두운 길! 까마득하다 생각했던 길의 끝이 보이는 것도 우리의 착각이었던 겁니까, 황상? 알겠습니다. 죽이겠습니다.”
도광효가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모든 힘을 쏟아 붓고, 탈진한 상태의 사도명!
도광효는 두 손으로 검을 높이 들었다가 그를 향해 내려쳤다.
일도양단!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하는 사도명을 향해서, 도광효의 검이 곧장 직격하며 떨어졌다.
**
우원봉은 자신이 갇혀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방유의 제자 중 한 명과 젊은 시절에 짧은 친분을 가졌다는 것만 통고받았다.
‘그런데도 내가 죽어야 한다고? 도대체 왜? 내가 왜?’
뇌옥에 갇혀서 깡말라 가는 동안, 우원봉은 내내 생각했었다.
‘나는 억울하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억울해.’
어차피 살지 못하면, 한시라도 빨리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죽으면 억울함을 푸는 원귀라도 될 수 있을 테니까.
오늘 우언봉은 소망대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도광효의 검에 목이 베일 뻔했는데, 사도명이 지풍을 날려서 그 검을 부수었다.
고맙다는 느낌은 없었다.
도광효의 대법으로 혼은 사라지고 백만 남아서 강철 인형에 담기게 되면, 우언봉은 꼭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나의 혼백은 다를 거다.’
우언봉은 결심하고 결심했다.
‘강철 인형 속에서 반드시 너를 죽일 거다, 도광효. 너의 명령을 듣지 않고, 너희를 죽이는 강철 인형이 될 거다, 나는.’
그랬는데 사도명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우언봉은 고맙기는커녕 오히려 사도명이 미웠다.
사도명이 황제의 목을 치러 갈 때만 해도,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중에 방향을 바꾸어 자신들을 구하자, 우언봉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너 같은 놈 때문에!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힘을 가지고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 인간!
우언봉은 고함을 지르면서 사도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 같은 놈 때문에 내가 죽는 거다, 조화무제-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언봉은 사도명을 향해 떨어지는 도광효의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츠컥!
우언봉의 살과 뼈가 동시에 도광효의 검에 잘렸다.
자신이 몸이 검을 막은 덕분에 가까스로 무사한 사도명을 보면서, 우언봉이 말했다.
“눈앞만 보지 마라. 힘은… 미래를 위해서.”
“으아아! 이 미친 자식아!”
도광효가 우원봉으로부터 검을 뽑더니, 다시 한번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 없는 피분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
사도명은 안개 속에 있었다.
자신의 정신이 뿌연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주변의 정황만을 감지한다고 느꼈다.
도광효가 검을 휘둘러 왔다.
피할 자신은 있었다.
힘은 한 오라기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막상 공격해오면 몸이 어떻게든 저절로 반응해 줄 것이라고 사도명은 믿었다.
그 믿음은 사실이었다.
도광효의 검이 자신의 머리를 노리며 날아들 때, 사도명은 높고 푸른 언덕 하나를 보았다.
‘이 언덕 너머가 가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경지다!’
사도명은 도광효의 검이 떨어지는 모습을, 찰나를 수백 조각으로 쪼개어 보고 있었다.
검이 다가올수록 사도명의 정신은 고양되었고, 언덕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모든 힘과 기력을 쏟아 부어서 정신과 몸이 텅 비어있었다.
새로운 바람은 꽉 잠겨 있는 밀실까지 불어오지 못한다.
모든 것을 버린 순간에, 비로소 새로운 눈이 뜨인 것이다.
하지만 인연과 기연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사도명이 깨달음의 장벽을 막 넘어서려는 순간에, 우언봉이 달려와서 도광효의 검을 막았다.
츠칵!
그리고 대신 베였다.
끝이 아니었다.
금군의 창칼에 위협받고 있던 인질들이 스스로 달려와서 도광효의 검에 베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