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97화 (97/168)

097화. 삼혼과 칠백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서 새 날이 시작되었다.

불길은 내전까지 옮겨갔다.

황제는 이미 불을 끌 필요가 없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사람들은 불이 더 번지지 않도록만 노력할 뿐이었다.

불길은 더 거세져야 했다.

황궁 건물이 처참하게 탈수록, 황실에게는 무림을 억누를 명분이 주어지니까.

도광효가 외쳤다.

“데리고 와라.”

동창 위사들이 밧줄에 묶인 사람들을 이동시켰다.

따각따각따각따각!

여러 겹 깔아 놓은 바닥의 벽돌들이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소리는 경쾌했다.

하지만, 그 경쾌한 소리가 예고하는 것은 절망과 죽음이었다.

“벗어나지 마라.”

금군의 창끝과 칼끝이 사람들을 겨누어 위협했다.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궁리하지 못하도록!

금군의 창은 조금이라도 대열을 벗어나는 사람의 허벅지와 팔을, 인정사정없이 찔렀다.

“이런 광경! 예전에도 봤던 기억이 날 게다, 사도명!”

황제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사실이었다.

사도명은 포옥경의 영혼을 타고 황제의 몸에 들어가, 도광효가 방유의 십족을 멸하는 광경을 보았었다.

아니, 죽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이 자들은 본래 그 날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너 때문에 살아남았지.”

황제가 원하는 대답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사도명은 이미 어딘가 멀리 달아나서, 황제와 그 주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듯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황제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는 사람이었다.

“짐은 지금부터 이 녀석들을 모두 죽이고, 마지막에는 저 사람을 죽일 것이다.”

황제가 마당 먼 곳을 가리켰다.

마지막 동창 위사가 한 명의 노인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대학사 방유였다.

세상에 죽었다고 알려진 방유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릴 때의 짐을 가르쳤고, 너의 아버지도 가르쳤다, 사도명! 도광효로부터 너의 신분을 듣고 나자, 하하하, 정말로 좋은 생각이 들지 뭐냐?”

황제는 살인광이 아니었다.

그는 필요 없는 사람만 죽이고,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살려놓는 사람이었다.

방유에게 남은 이용가치란 대체 무엇일까?

“사도명. 네게 죽은 아비에 대한 정이 남아 있다면 방유를 살리고 싶어 할 거라고 믿는다.”

황제가 도광효를 보았다.

“도연! 준비됐느냐?”

황제는 언제나 도광효를 도연이라는 법명으로 불렀다.

하지만 도광효가 어디에서 법계를 받았는지는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언제든 하명하소서, 황상.”

“세상에는 그런 놈이 있다. 선한 것을 좋아하고, 의로운 것을 권장하는 자들.”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놈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언제나 악이다.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자들은 선한 것을 싫어하고, 의로운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진보시킨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황상.”

“주변에 이상한 놈이 숨어 있다. 저 불을 지른 놈이고, 감히 황제인 짐을 해치겠노라 선언한 역적이다.”

“놈을 잡겠습니다.”

“필요 없다. 숨은 생쥐는 스스로 나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법! 도연! 네가 여기 모인 자들의 쓸모를 설명하기만 하면, 그놈은 스스로 나올 것이다.”

“그렇사옵니까?”

도광효가 설명을 시작했다.

“강철용. 강철 인형은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도광효는 사람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깡마른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이름은 우언봉이었다.

우언봉도 본래는 이렇게 마르지는 않았었다.

본래 건장한 체구였지만,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서 뼈와 살가죽만 남은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도광효가 자신을 보자 우언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속히 죽여라. 더 이상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마라.”

주변 사람이 모두가 우언봉처럼 용감한 것은 아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황상.”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희는 방유와 관계가 없습니다.”

우언봉이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치시오, 모두! 여러분들의 가족과 친우가 이미 여러 명 죽었음을 벌써 잊었소?”

잡혀 있는 사람들은 이미 예전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죽지 말아야 하는, 이용가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사도명 덕분이었다.

사도명이 소림사에서 포옥경과 싸워 이겼기에, 황제는 그들을 살려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언봉이 다시 소리쳤다.

“저 황제가 정말 황제가 맞소? 그는 황위를 찬탈한 대적일 뿐이잖소? 황제가 죽이려 했던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건, 모두 조화무제의 덕분임을 정말 모르오?”

도광효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제물은 저 녀석으로 하겠습니다. 황상.”

“그리하라.”

“사람에겐 삼혼칠백이 있다.”

도광효가 검을 뽑으면서 몸을 돌려 허공을 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스며든다. 사람에게 신지가 있는 것은 혼의 작용이고,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숨 쉬고, 심박이 뛰며, 음식을 먹으면 소화하는 것은 백의 일이다.”

도광효가 뽑은 검을 우언봉의 목에 댔다.

“이 녀석이 감히 내게 고함을 지를 수 있는 것도 혼과 백이 움직이는 덕분이지.”

도광효는 멀리 서 있는 금의위를 보았다.

“존명!”

눈신호를 알아들은 금의위 두 명이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잠시 후, 두 명이 힘을 합해 강철 인형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쿠-웅!

강철 인형은 무거웠다.

바닥에 놓자, 둔탁한 소리가 나며 겹겹이 쌓은 벽돌의 일부가 깨져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강철용을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면 매우 편리하고 큰 전력이 되지 않을까?”

바닥에 놓여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강철 인형을 보며, 도광효는 빙그레 웃었다.

“처음엔 실마리조차 없었지. 그러다가 무덤에서 병마용을 발견하고 나는 무릎을 쳤다.”

도광효가 강철 인형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서 있는 금의위를 보았다.

“네? 저 말입니까?”

금의위는 묻다가, 도광효의 눈빛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 …왜 병마용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셨습니까?”

“왕이 죽으면 살아 있는 시녀와 병사를 순장시킨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산 채로 묻힌 그들의 혼(魂)은 완전히 사라지고 백(魄)만 그 속에 남는다. 백을 담은 인형이 바로 병마용인 것이다.”

“아하! 백이 깃들이 있는 인형. 정말 놀랍군요.”

금의위는 평소에 맞춰놓은 합에 따라 계속 질문했다.

“그렇다면 백이 깃들어 있는 병마용은 어떻게 움직입니까?”

“규화보전 상의 금침대법 중 괴뢰번명은, 시전자의 의지를 진사 없이 전달하는 수법이다. 그리고 심마문은 혼과 백을 다루는 최고의 문파지. 나는 두 가지를 합하여 박혼제신의 대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했어.”

도광효가 가슴을 크게 펴며 소리 높여 웃었다.

“박혼제신의 대법이 병마용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게 백이 있어서라면 강철 인형, 즉 강철융에도 백(魄)을 담으면 되지 않을까?”

도광효가 검을 흔들었다.

“지금부터 보여주마, 사도명. 네가 부순 일백팔십 개의 강철융. 그걸 대체하려면 얼마나 귀찮으며,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를.”

도광효는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열여덟 개의 강철융을 부숴 먹고도 태연한 주덕문에게는 화가 났었다.

모두 이유가 있는 노여움이었던 것이다.

**

강철융이 움직이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백을 구해야 했다.

처음에 백은, 오래된 무덤을 파고 순장된 사람들의 주검에서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도광효는 번거로운 절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을 자르고, 죽어가는 사람의 혼백 중에서 백만 고르는 방식을 택했다.

심마문의 구백술로 남겨진 백(魄)만 강철융에 담는 것이다.

복잡하고 긴 과정!

도광효는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있을 사도명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과정을 시작하려고 했다.

도광효가 검을 휘휘 크게 돌리며 소리쳤다.

“구백술사들은 대기하라. 이자의 혼백이 뛰쳐나오면, 즉시 백을 강철용에게로 이끌어라.”

우언봉의 옆으로, 긴 회색의 천을 걸친 두 명이 다가왔다.

혼을 다루고, 백을 인도하는 심마문의 구혼 술사였다.

그들이 수결을 짚으며 주문을 외울 때, 도광효의 검은 악독하도록 정확하게 날아가서 우언봉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까-앙!

피는 튀지 않았다.

대신 검의 날이 허공으로 튀어, 아주 높이 올라갔다.

도광효는 가운데가 부러진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도광효는 왼손으로 자신과 우언봉의 사이에 나타난 사도명을 가리키면서 껄껄 웃었다.

“이자는 더합니다, 황상.”

웃으면서 도광효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너 명은 죽여야 나타날 줄 알았는데, 하하하. 숫제 한 명의 죽음도 버티지 못합니다. 폐왕보다 오히려 마음이 더 약합니다.”

황제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도광효의 검을 부수어 우언봉을 구한 사도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느냐?”

“들을 생각 없소.”

“짐은 반드시 말해야겠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달아나는 것이었다. 네가 달아났다면 적어도 방유 대학사만큼은 나이 들도록 살 수 있었다.”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리며 황제의 발아래를 보았다.

옅은 아지랑이가 계속 어리며, 황제의 몸을 반 푼 정도 허공에 띄워놓고 있었다.

“무공을… 아는 거요?”

“건녕이 언급하지 않더냐? 건녕은 머리가 좋았고, 짐은 무예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지.”

“무공으로 힘을 얻고, 그 힘을 조카를 죽이는 일에 쓴 거요?”

“건녕은… 주덕문에게 죽임을 당했다. 짐은 그런 주덕문을 이 손으로 직접 죽였다.”

황제의 말에는 단 하나도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을 전하는 말 역시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사도명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로 거짓을 전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있을 거라고, 난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었소.”

“짐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했던 자를 모두 없앴더니 황제가 되어 있더구나. 하하하!”

“내가 어딘가에 숨어 살면, 나으리가 방 대학사를 해치지 않는다는 근거는 뭐요?”

“짐은, 짐의 안녕을 소중히 여긴다. 최소한 너를 찾아 죽이기 전까지 짐은 방유 대학사를 살려놓을 것이다.”

사도명은 황제가 무림을 없애려 하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무림의 역모에 대한 두려움.

황제는 자신의 잘못이 거꾸로 자신에게 되돌아올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건녕제에게도 그런 식으로 협박을 했소? 숨어 지내라. 숨어 있는다면 주덕문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게 통했소?”

“네게도 통하는 것 같다만.”

황제가 손을 저었다.

사방에서 먼지처럼 수많은 금군들이 추가로 나타났다.

그들의 앞에는 금색의 옷을 입은 금의위도 있었다.

“사천 명 금의위다. 칠만의 황실 수호금군도 있다. 짐을 지키는 것이 이들뿐이라고 생각하느냐?”

황제가 다시 손을 저었다.

사도명은 주변 모든 곳을 휘감고 일어나는 기운을 느꼈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사도명이 이미 한 번 싸워본 적이 있는 기운!

“아수라혈교?”

곳곳에서 일어나는 강퍅한 기운은 선명한 마기였다.

“네게 패하고 흩어져 있던 아수라혈교의 마졸을 모두 모았다. 황제의 권력은 이럴 때에 편리하지.”

아수라혈교의 출현은 사도명에게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사 년이 훨씬 지난 일.

사도명은 그때, 살아가면서 영원히 기억할 영웅을 만났다.

설청산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황제의 말에, 사도명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아수라혈교의 제자들을 보았다.

모두가 눈빛이 흐렸다.

마공을 익혔기 때문이 아니라, 신지가 제압당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단순히 모으기만 한 건 아니구려, 나으리.”

“하하하 정신을 살짝 손을 보았다. 수라겁황이 아니라, 나에게 충성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사도명은 방유를 비롯해 마당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밤은 깊었다.

하지만 불타는 황실 전각의 불빛으로 사방은 대낮처럼 밝았다.

그 속에서, 잡혀 있는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죽음처럼 아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