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선택을 하게 해라
밤이 깊었다.
작은 촛불 하나가 애써 어둠을 몰아내면서 나풀거렸다.
은교교는 촛불이 벽에 비추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실수한 것은 아닌지, 더 심하게 잡았어야 했던 게 아닌지.”
쾅! 쾅! 쾅!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짐작하고 있기에 은교교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연자강이 잔뜩 화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옆에 곽소혜도 보였다.
“죄송해요. 말하지 말아 달라 하셨는데, 말하고 말았어요.”
늦은 저녁에 은교교는 산책을 나갔다가 곽소혜를 만났다.
그리고 말하지 말았어야 할 고민을 상의하고 말았다.
“혼자 황실로 가다니! 가지 않을 것처럼 해 놓고서! 무제가 혼자 갔다는 것이 사실이오?”
“사실이어서 걱정하고 있어요. 걱정하니까 곽 소저와 상의했고, 연 공자도 알아버렸네요.”
“도대체 왜? 구패객과 계속 싸우는 것이 아니었소?”
“싸웠죠. 이겼어요. 황실로 오지 말라는 의지는 이겼으니 갈 거라 했고, 혼자 오라는 전갈을 받았으니 혼자 간다고 했어요.”
혼자 오라는 전갈은 사도명뿐만이 아니라 연자강도, 은교교와 곽소혜도 같이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황실로 혼자 오라는 뜻임을 깨달은 사람은 사도명, 혼자뿐이었다.
“전갈은 구패객의 의견이고!”
연자강이 소리쳤다.
“우리는 아직 일로종횡의 가운데 있소. 무제는 길을 걷는다는 게 대체 뭐라 생각하는 거요? 은 소저는 뭐라고 생각하오?”
**
건녕제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동생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혀… 형. 살려 줘.”
주덕문을 서서히 죽이면서, 건녕제는 자신 또한 죽고 있었다.
독혈비를 타고 들어온 독이 빠르게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축융의 불로 독을 태울 수 있습니다. 당장 치료하면 사실 수 있습니다.”
사도명의 말에 건녕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게. 내가 죽어야, 세상이 비로소 편해지네.”
“…폐하.”
건녕제가 지킬 수 있던 황위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안 이후, 사도명은 내내 그를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라 불렀다.
사도명은 세상에는 정말로 마음이 약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무리 필요해도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황제의 자격이 없겠지만, 사람의 자격을 얘기하자면 문제가 다르다.
건녕제는 적어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과오를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려는 용기를 갖고 있었다.
“짐의 동생은 죽어 마땅하네. 또한 짐이 죽으면, 숙부는 더 이상 짐을 찾고자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지는 않을 걸게.”
건녕제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가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사도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실 수 있습니까? 하실 수 없다면 제게 맡기세요.”
건녕제의 발아래로 떨어지는 피는 이제 완전하게 검었다.
“이제는 축융의 불을 끌어올려도, 폐하를 구하지 못합니다.”
건녕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주덕문은 건녕제를 밀치고 마침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나, 나를 죽이려고? 이 미친 놈이 나를 죽이겠다고?”
사도명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건녕제를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런 동생조차 해치지 못합니까? 그 여림으로, 폐하는 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까?”
“바로잡아주게, 자네가.”
애써 웃는 건녕제의 입가는 온통 검은 핏물이었다.
“모두 바로잡으면, 황제까지 죽이면 그때 정말로 알게 될 걸세. 연기 없는 불!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
건녕제의 고개가 완전하게 힘을 잃었다.
그는 피만이 아니라, 몸까지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사도명은 건녕제의 가슴에 꽂힌 독혈비로부터 확산되는 독을 막지 않았다.
대신, 독혈비를 찔러 넣은 사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흐흐. 날 죽이려 들다니! 죽어 싸다!”
“당신을 살리려 했소. 당신의 형은 최후까지 당신을 아꼈어”
“헛소리 마라! 사도명, 네놈도 기회가 있을 때 날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주덕문이 소리를 지르르 동안, 건녕제의 몸이 녹기 시작했다.
그는 사라지고 싶어 했다.
사도명은 건녕제의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하고 축융의 불을 끌어올렸다.
화르르르르-!
너무 여렸던 황제.
그는 자신의 여림으로 인해 황위를 잃었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새로운 황제는 무림이라는 대지를 없애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옛 황제의 몸이 불타면서 재로 변할 때, 피어오른 연기는 그의 여린 영혼처럼 흩어졋다.
그 뒤로 강철 인형이 나타났다.
쿵! 쿵쿵쿵!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숫자!
강철 인형은 문을 부수고 벽을 부수고, 심지어 천장까지 부수면서 나타나 사도명을 포위했다.
“흐흐흐. 석가장에서 겨우 몇 개의 강철용을 부쉈다고 기고만장했지, 조화무제?”
주덕문이 아직 아픈지 목을 매만지며 웃었다.
“모두 일백팔십이다. 감당할 수 있는지, 버텨보라.”
콰아-앙!
사도명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강철 인형이 저절로 터졌다.
일의생멸.
사도명은 이미 강철용을 상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생각으로 강철 인형의 몸 안에 폭발하는 힘을 만드는 게 매우 효과적인 대응법임을 알고 있었다.
폭발하여 부서진 강철 인형의 몸 안으로부터, 매캐한 연기가 뿜어 나왔다.
사도명은 코를 막고 물러섰다.
“독?”
“독혈당의 앙천독이다. 독혈비에 묻혔던, 똑같은 것이다. 너도 형처럼 녹아라! 사도명.”
주덕문은 강철의 인형만으로는 부족하다고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독을 택했지만,. 그 선택이 주덕문에게는 불행이었다.
화르르르르르-르!
축융의 불길이 사도명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사도명이 축융의 반지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형은 당신을 살리려 했다. 그 마음만큼은, 배려해 주겠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
**
굳어 있는 도광효를 발견한 것은 동창 위사들이었다.
그들은 도광효를 안아서 황제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마찬가지로 굳어 있는 청룡위와 현무위도 함께 데려왔다.
황제는 건청궁에 있었다.
그는 황궁 전체를 면밀히 감시하란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특이한 상황이 생기면 즉시 알리라는 명령도 같이 내렸다.
뻣뻣하게 굳은 도광효.
황제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어기전혼과 박혼제신의 대법까지! 산 인형과 죽은 인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더니, 도연아. 네가 인형이 됐구나. 하하하.”
황제의 손이 도광효의 얼굴 앞에 글을 썼다.
마비가 풀리며, 도광효가 마른기침을 연이어 해댔다.
“콜록. 콜록. 콜록.”
“건녕이 나타난 게냐?”
도광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화무제도 왔습니다. 저를 멈추게 한 건 그 녀석입니다. 건녕제가 조화무제에게 제왕검형을 전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왕검형을 외부인에게? 마침내 짐과 싸우겠노라고 결심한 게냐, 건녕? 하하하.”
외부가 소란스러웠다.
동창 위사 하나가 달려오더니 허리 숙이며 보고했다.
“외궁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불길이 치솟았고, 아무리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습니다.”
“어떤 외궁 말이냐?”
“제독태감이 머무는 호극궁을 뜻하옵니다, 황상.”
황제가 도광효를 보았다.
도광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왕이 있는 곳. 백팔십 개의 강철용이 모두 거기 있습니다.”
**
화르르르르르-
불이 끝없이 타올랐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로, 타는 불길을 보았다.
“불이… 특이하군.”
황제의 뒤에 도광효가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축융의 불입니다. 조화무제가 형산파에서 축융의 인연을 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축융의 불이, 지옥염마의 불보다 더 뜨거우냐?”
“매우 뜨겁습니다. 물로는, 수하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끄지 못할 것입니다.”
불은 거셌고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주덕문은 바닥에 있었다.
불길에 그슬렸지만, 겉보기에는 상처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강철용 모두가 부서지고 깨졌단 거지?”
황제가 묻자 주덕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그렇습니다.”
“제대로! 자세히! 다시 한번 더 말해보라.”
“조화무제가 강철용을 부수고, 독을 없앤다고 불을 질렀습니다. 제 단전을 부숴 내공을 없애고, 말까지 남겼으며….”
“그것 말고!”
황제가 소리쳤다.
“짐의 말뜻을 모르느냐? 건녕에 대해 다시 말해 보라 했다.”
“혀, 형님은 죽었습니다. 제가, 독혈비로 심장을 찔러서… 칭찬해 주십시오, 황상! 제가 마침내 황상을 위하여 형님의 심장을 이렇게….”
주덕문이 스스로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정말로 그의 가슴이 터지며 피를 뿜었다.
퍼-억!
주덕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뒤로 쓰러졌다.
넘어지면서, 면구가 옆으로 흘러 주름진 얼굴 일부가 드러났다.
“화… 황상!”
황제가 손을 움직여, 주덕문의 면구를 멀리 치웠다.
“그렇게 되면서까지 살려고 해 놓고서, 네가 왜 살아있는지 그 이유조차 몰랐더냐?”
“저, 저는 황상을 위해….”
“강철용이 모두 부서지고 건녕도 죽었다. 널 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지, 짐은 모르겠구나. 너는 알겠느냐?”
주덕문의 숨이 끊어졌다.
동창 위사들이 빠르게 달려와서 주덕문의 시체를 치웠다.
사도명은 그를 해치지 않았다.
건녕제의 마지막 염원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덕문은 자신이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스스로 버렸다.
그는 자신을 살리려는 유일한 사람을 해쳤기에, 더 이상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까 창왕이, 사도명이 자신을 통해 무슨 전갈을 남겼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도광효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다. 하지만 전갈이 꼭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될 필요는 없겠지?”
황제는 불이 가장 먼저 일어났던 호극궁을 보았다.
생각은 뜻을 만들고, 지극한 뜻은 의지로 발전한다.
황제는 사도명의 의지가 공간 속에 남긴 뜻을 더듬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도광효가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사도명. 이놈은 참 재미가 있다. 그놈이 남긴 생각을 읽어봤더니 하도 귀여워서 짐이 스스로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구나.”
“어떤 생각을 남겼습니까?”
“죽이겠다고 말한다.”
“네?”
“짐을 죽이겠노라고. 짐이 무림을 모두 말살하기 전에, 먼저 내 목을 잘라 죽이겠노라고.”
불길이 거세졌다.
내공이 담긴 축융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궁 모든 건물을 태우기 전에는 꺼지지 않을 기세였다.
“내공을 이용해야 꺼질 듯합니다. 적암마계의 한빙공을 익힌 자들을 모으겠습니다.”
“타게 두어라.”
“예?”
“천하에 알린다. 전 무림맹주 사도명이 자금성에 난입했다. 황족을 해쳤고 불을 질렀다.”
“난입…입니까?”
“금의위 모두로 궁을 보호하고, 팔십만 금군을 동원해 소림사의 무림맹을 포위해라.”
황제가 오른손을 들어 태화전을 가리켰다.
강력한 장력이 뻗어나가며, 태화전의 날아오르는 듯 뻗어 있는 처마를 단숨에 날렸다.
꽈아-앙!
“그리고 선택을 하게 해라. 자금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린 조화무제 사도명을 무림 공적으로 지정하여 추포할지! 혹은 팔십만 금군의 공격을 감당하면서, 그대로 무너질지를 말이다.”
도광효가 고개를 숙였다.
“존명!”
“사도명은 멀리 가지 않았다. 주변에 있고, 지켜보고 있다. 분명하게 느껴진다.”
황제가 다시 소리쳤다.
“이제 보자꾸나. 건녕이 선택한 녀석의 선택은 과연 어떨지! 건녕과 다른지, 혹은 다르지 않을지를 보자. 도연! 지금 당장 그들을 데려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