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당신은 누굽니까?
사도명이 구패객의 앞에 서자마자, 자정을 알리는 풍경 소리가 멀리에서 울렸다.
구패객이 다시 웃었다.
“자넨 약속을 지켰군. 오늘, 아니 어제 정확하게 왔어.”
사도명은 자신과 구패객을 알아보지 못하는 도광효와 두 명을 둘러보았다.
“융흥사에서 저는 아주 오래 싸웠습니다. 그리고 겨우 승부를 볼 수 있었죠.”
사도명은 이겼다.
이기고 나서야, 구패객이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서 비무를 청했는지를 깨달았다.
“혼자만 오라는 전달은, 뒷마당이 아니라 황실이었던 거 맞죠? 남에게 들키지 않고 올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거죠?”
감춘다는 의미의 은(隱)!
사도명은 의지를 형(型)으로 만들어 몸에 두르고 있었다.
글자는 형(型)의 극의였다.
글자에 담긴 의지는, 일단 적히고 나면 계속 작용한다.
은(隱)이란 사도명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조차 타인으로부터 그를 숨겨 주는 의지였다.
사도명은 구패객도 자신과 같은 기운을 두르고 있음을 확인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이번에도 구패객은 사도명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 같은가?”
“어림위장 단소추는 건녕제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사도명이 물었다.
“당신은 혹시 단소추입니까?”
구패객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 생각하는가?”
“아뇨. 그건 다른 사람의 분석이고,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황실 사대무공 중 제왕검형은 정점에 있습니다. 전대의 황제가, 어림위장에게 전달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충신이라 해도요.”
“그럼 어찌 생각하나?”
사도명이 웃으며 물었다.
“건녕제이십니까?”
구패객의 눈이 커졌다.
“왜 그리 생각했는가?”
“가능성이 전혀 없다 싶은 걸 모두 뺐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능성 하나만 남는군요.”
지금의 황제는 모반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사도명은 전대 황제인 건녕제가 제왕검형을 익히지 않았다면 달아날 방법이 없었을 거라 판단했다.
구패객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우리는 내기를 했고, 나는 그 내기에서 졌네.”
구패객이 도광효와 두 명의 위사를 가리켰다.
“내게는 의무가 생겼지? 연기가 없는 불, 죽지 않은 생선이 무엇인지를 알릴 의무. 그걸 말해주려고 여기로 불렀네.”
화우-우우웅!
무엇인가가 구패객의 몸으로부터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장막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도광효가 구패객과 시선이 마주치더니 그대로 굳었다.
“뭐, 뭐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상황을 파악한 도광효가 큰 소리로 외쳤다.
“붙잡아라-!”
“존명!”
청룡위와 현무위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들의 검은 빨랐다.
하지만 빠르고 날카롭기만 했을 뿐,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백호위, 주작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비슷한 수준이다.’
사도명의 분석이 옳았다.
구패객의 몸은 청룡위와 현무위가 휘두르는 현란한 검춤 사이를 유유자적 빠져나갔다.
금강호갑의 기본을 이루는 의형수형의 신법이었다.
구패객의 몸에는 황실의 사대무공이 모두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요, 건녕제?”
도광효의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붉은 기운은 도광효의 오른손으로 모이더니, 검지에서 구패객을 향해 발사되었다.
큐-웅!
사도명이 소리쳤다.
“파멸혈강과 혈염지? 혈운곡의 마공인 거냐?”
소리치면서, 사도명도 은(隱)의 형(型)을 풀었다.
사도명의 몸 역시 도광효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지옥문은 아수라혈교의 무공 모두를 갖고 온 것이냐?”
“사, 사도명?”
도광효가 신음하며 물러났고, 그 사이 구패객은 어렵지 않게 파멸혈강을 피해냈다.
“이미 와 있었다고? 너도 건녕제처럼 숨어 있었다고?”
도광효는 오른손으로 혈염지를 구패객에게 계속 뿜어내면서, 왼손으로는 검은 그림자 같은 기운을 뿜어냈다.
콰아아-!
검은 그림자는 사도명이나 구패객을 노리지 않았다.
그림자는 청룡위와 현무위를 덮치더니 그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흑귀?”
“하하. 이미 싸워봤지, 사도명?”
도광효가 껄껄 웃었다.
“청룡과 현무! 너희들이 조화무제를 맡아라.”
흑귀는 흑귀문이 자랑하는 암흑진기의 발현이다.
흑귀에게 점령당하는 자가 배신의 마음을 품으면, 그 즉시 온몸이 터져 죽는다.
다른 효능도 있었다.
흑귀는 사람의 본원지기를 극한으로 이끌어내는 독이었다.
청룡위와 현무위가 뿜어내는 기운이 흑귀에게 점령당하자 순식간에 수십 배 강해졌다.
콰콰콰콰콰-!
사도명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네놈은 포옥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군, 도광효!”
본원지기란 사람이 평소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잠재력이다.
그건 모든 생명체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비축하는 생명력의 여분이기도 했다.
본원지기를 모두 소진한 사람은 무조건 죽게 된다.
흑귀가 발동한 이상, 청룡위와 현무위는 무조건 죽게 된다.
이기거나 지거나에 상관없다.
현무위가 몸을 날렸다.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제 아내는 죄가 없습니다.”
현무위의 목소리에는 일체의 분노 없이 체념만 담겨 있었다.
“제 아이가 저를 모른 채 살게 해 주시겠다는 그 말씀, 믿겠습니다. 부제독 합하.”
청룡위는 말하지 말라는 도광효의 명령을 깨뜨리고, 현무위의 반대 방향에서 몸을 날렸다.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에 정말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처참한 자기희생!
청룡위와 현무위의 처지는 백호위, 주작위와 다르지 않았다.
제갈호연과 똑같았다.
“인질을 잡아둔 거냐? 하지만 도광효! 너는 그 인질들을 이미 죽이지 않았느냐?”
사도명은 고함을 지르며 숫제 눈을 감아 버렸다.
일의생멸이 일어나며, 앞뒤에 방어막을 만들었다.
공격해오는 두 자루 검은 동시에 방어막에 막혔다.
콰쾅-!
**
“본원지기까지 격발시켰습니다. 청룡과 현무가 잠시 동안은 사도명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도광효는 검을 든 채로 구패객을 향해 걸어갔다.
“그 사이에 저는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폐하.”
“너 정도의 실력으로? 짐을 과소평가하는구나, 도광효!”
도광효가 휘두르는 검 사이로, 구패객은 산보하듯 느긋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도광효가 웃었다.
“진소추가 목숨을 버리면서 전달한 내공. 황실 최고의 암기력을 지녀 사대무공을 모두 외우고 있던, 뛰어난 오성.”
그는 검을 고쳐 잡았다.
“과소평가할 리가 있습니까, 폐하? 모두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그 유약하신 심성까지도! 하하하.”
도광효는 되돌려 잡은 검으로 갑자기 자신의 목을 찔렀다.
“무슨 짓이냐, 이놈?”
놀란 구패객이 달려왔다.
그는 의형수형의 신법을 멈추고, 금나수를 펼쳐 도광효의 오른 손목을 낚아챘다.
“하하. 이러실 줄 알았죠.”
도광효가 검을 돌려서 구패객의 가슴을 벴다.
놀란 구패객이 물러섰지만, 옷과 살갗이 베어져 피가 튀었다.
“크윽!”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도광효가 이번에는 검을 돌려 다시 자신의 심장을 겨눴다.
“제가 죽으면 폐하의 동생도 함께 죽는다는 걸. 하하하.”
“이, 이놈이!”
구패객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광효가 스스로를 찌르면, 구패객은 또다시 그를 구하러 달려가야만 한다.
도광효는 그 틈을 노려 구패객을 벨 것이다.
구패객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그렇군. 자네는 짐을 정말 제대로 아는군.”
“하하하. 현명하지만 여리죠. 이미 배신한 동생조차 살리려고, 스스로 위험에 빠지죠.”
“하지만 자네는 사도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모르는 것 같군.”
“그게 무슨… 아!”
도광효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도명을 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검을 휘둘러 앞을 공격했지만, 어느새 사도명은 사라지고 커다란 금(禁) 자 하나가 도광효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금이 아니라 지(止)를 사용했습니다, 폐하. 청룡과 현무는 당분간 죽지 않을 겁니다.”
사도명은 구패객에게 말했다.
도광효를 움직이지 못하게 금제한 후에, 사도명은 구패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는 연기 없는 불과 죽지 않은 생선에 대해서 말하실 수 있겠네요.”
구패객이 빙그레 웃었다.
“제왕검형에는 모두 세 가지의 구결이 있네. 자네는 이제 그 중의 천자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군.”
사도명은 몇 가지의 사실을 깨달았다.
구패객은 건녕제였다.
건녕제는 사도명의 물음에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어떠한 지식도 명시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사도명은 결국 묻지 않고, 단순히 확인하기로 했다.
“죽었으나 죽지 않은 생선. 그건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비유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건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완전히 불에 타버렸지. 남은 건 재뿐일세.”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계신 이유는 동생을 죽게 할 수는 없어서, 라는 것입니까?”
건녕제는 이번에도 사도명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알아내죠.”
사도명은 도광효의 앞에 섰다.
그리고 도광효의 눈을 통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혜광심어를 역천의 방향으로 돌려서, 도광효의 머릿속 생각을 빠르게 읽어 들였다.
“남만의 자모충! 거대한 모충과 아주 작은 자충의 결합. 모충 먹이를 잡으면, 작은 자충은 모충의 등에 살며 기생한다고?”
사도명은 건녕제가 왜 도광효를 죽게 내버려두지 못했는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자충은 기생할 뿐인데, 모충이 이 자충을 떼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충이 죽으면 모충 역시 죽게 되기 때문.”
건녕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도광효는 스스로 자충을 먹고 짐의 아우에게는 모충을 먹였네. 도광효가 죽으면 자충이 죽고, 짐의 아우 역시 죽게 되지.”
“페하의 아우라 함은….”
사도명은 미간을 찡그렸다.
도광효의 머릿속에서 건녕제이 아우가 누구인지, 방금 읽어냈기 때문이다.
“주덕문?”
“어리석은 아이일세. 하지만 죽게 둘 수는 없어. 내 머릿속은 읽지 말게. 이 부끄러운 생각들을, 들키고 싶지 않네.”
“일정한 의지를 갖춘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면, 저도 더 이상 읽어내지 못합니다.”
건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禁)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도광효의 눈빛이 떨렸다.
사도명이 웃었다.
“도광효가 제 말을 듣더니 마음을 차단하려 노력합니다. 그의 생각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나 때문이군. 내게 알려주려고 도광효에게 약점을 들켰군.”
“상관없습니다. 도광효의 마음을 여는 건 간단하죠. 거부하면 지금부터 도광효의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을 자르고, 다음에는 손목과 팔목, 발목과 무릎을 각각 잘라낼 생각입니다.”
도광효의 눈빛이 다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아! 지금 다시 도광효이 마음이 열렸습니다. 도광효! 지금처럼이다. 거부라는 선택은 너에게 이제 없다.”
사도명이 도광효의 앞에 서서 그의 이마를 짚었다.
“생각해라. 네가 이용하고 죽게 만든 전 어림군의 위사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그들의 가족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사도명이 부들부들 떨었다.
건녕제가 낮은, 그러나 깊은 한숨을 오래 쉬었다.
“인질을, 더 이상은 데리고 있지 않은 겐가?”
“…불편했다 합니다. 계속 살려놓을 이유가 없었다고!”
사도명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을….”
그는 당장이라도 도광효의 머리를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건녕제를 생각하여 가까스로 참아냈다.
“어림군은 그 역모의 날에 마지막까지 짐에게 충성을 다했었지. 그들이 모두… 아!”
건녕제가 비틀거렸다.
“슬프구나. 이 얼마나 참담한가? 애절하고 아픈가?”
건녕제가 뚝뚝 눈물을 흘렸다.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귀하가 울 일입니까?”
“울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짐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네.”
사도명은 갑자기 건녕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황제였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막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