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제왕검형(帝王劒型)
연자강이 소리쳤다.
“글에 의지를 담아 상대방을 제어한다고?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사도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세 번째 결사대원의 앞으로 가서, 허공에 다시 한번 해(解)를 썼다.
세 번째 대원도 즉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겠다고 소리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연자강이 한숨처럼 말했다.
“가, 가능하구나. 정말로 가능한 것이구나.”
“기척에 뜻을 실을 수 있다면, 글에도 당연히 뜻을 실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새벽, 융흥사로 돌아왔을 때 연자강 등은 뒷마당으로부터 전해오는 구패객의 기척을 느꼈다.
구패객은 기척에 뜻과 글을 실어 모두에게 전달했었다.
“기척에 뜻을 실을 수 있으니, 그런 기척을 글씨에 담아 상대에게 남길 수도 있겠구나.”
연자강은 또 다른 조화결사대원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는 사도명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오른손을 움직여, 결사대원의 앞쪽 허공에 글씨를 쓴 것이다.
결사대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안 된다는 건가? 무엇이 더 필요하지?”
“제가 한 번 해 볼게요.”
곽소혜가 옆으로 왔다.
그녀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결사대원의 앞에 조심스레 풀 해(解) 자를 써 내려갔다.
꿈틀!
결사대원의 손끝이 흔들렸다.
“지금 저 해낸 거 맞죠? 조금이지만 움직였어요.”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곽 소저는 빠르시군요.”
“비침술에 의지로 상대를 조종하는 비법도 있어요.”
곽소혜가 설명했다.
“의지와 내공, 그리고 집중! 한 번 응용해 보았어요.”
“좋군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의지를 남기는 겁니다. 내공으로 응축시키지만,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는 마음과 의지죠.”
사도명은 이제 양손으로 한 번에 두 명씩을 풀어주고 있었다.
“의지는 뜻의 집중이며, 뜻은 마음과 더불어 일어납니다.”
주고받는 말을 듣던 연자강이 길게 심호흡했다.
“후으읍!”
지그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다시 눈을 뜬 후에 허공에 글을 썼다.
은교교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글이 보였어요.”
꿈틀!
결사대원이 마비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마음! 뜻! 의지를 형(型) 속에 가두는 거구나.”
구패객이 어떤 무공을 사용하고 있는지, 연자강은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
“제왕검형(帝王劒型)은 마지막 네 번째의 황실 무공으로, 그야말로 최강, 최고라 할 수 있지.”
사도명을 비롯하여 연자강, 은교교, 곽소혜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뜨거운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찻잔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미 저녁은 깊었다.
“구패객은 누굴까요?”
은교교가 물었다.
사도명은 자신의 짐작을 말했다.
“제왕검형은 오직 황실의 인물에게만 전해지오.”
“전대 황제 건녕제를 몰아내면서, 지금의 황제는 대부분의 친척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어요.”
은교교의 말을 들은 곽소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제갈호연을 생각했다.
제갈호연이 뜨개질해 준 저고리가 아직 품에 있었다.
곽소혜는 자신과 연자강의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그걸 입힐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위협을 당하여 허수아비로 이용당했죠.”
“황실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사도명의 질문에, 연자강이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진소추! 최연소의 어림위장! 전대 황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켰다는 최측근.”
“전 황제의 시신도, 진소추도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어. 어딘가로 도망쳐 종적이 없다 들었지.”
“그래서 생각한 거라네.”
연자강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 진소추가 제왕검형을 익혀 건녕제를 피신시킨 것이 아닐까?”
제왕검형을 익혔다면, 수천의 군사 속에서도 두 사람의 몸을 대피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도록 ‘허虛’의 의지나, 숨기는 ‘은隱’의 의지를 몸에 걸면,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구패객이 바로 진소추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도명의 물음에 연자강이 오히려 되물었다.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 있지만, 너무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 포기한 참이네.”
연자강이 창밖을 보았다.
어둠이 다시 깔리고 있었다.
“이제 곧 오늘이 지날 거야. 천하인들은 무림맹주의 직위를 벗어던진 조화무제가 오늘 자금성에 방문한다고 알고 있네.”
“오늘은 아직 남았어.”
“하지만 구패객과 내기했다면서? 자네가 패배하면, 황실에 가지 않기로 했다면서?”
“내가 패배했다고? 누가 그래?”
“하지만 아까 구패객은 또다시 패배를 구하지 못했다고… 아!”
생각해보니 구패객이 지지 않았다는 말이 사도명이 졌다는 의미는 분명히 아니었다.
연자강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아직도 싸우는 건가?”
“구패객은 나를 잠시 본 후 즉시 떠났네. 내 마음속에 하나의 의지만을 남겨 놓았지.”
사도명이 웃었다.
“마음속에서 벌써 백일 동안이나 싸우고 있네. 그런데도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어.”
“구패객이 남긴 의지는 무엇인가? 어떤 의지와 싸우고 있나?”
“말했잖아. 의지란 곧 생각이며 말이라고 구패객은 내게 황실로 가지 말라고 했다니까.”
연자강은 비로소 깨달았다.
구패객과 사도명의 싸움은, 사도명이 구패객이 그의 마음에 남긴 의지를 극복하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럼 구패객의 본뜻은….”
“맞아. 그는 날 막으려고 왔던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였지.”
사도명이 다시 웃었다.
“황실에 가지 말라는 자신의 의지를 내가 극복하는 걸 보고 싶어 한 거야. 황실에 가려는 내 의지가 자신의 의지보다 확고해지는 걸 보려고 왔던 거지.”
연자강은 사도명이 계속 웃는 이유를, 마침내 완전히 이해했다.
“자네는 계속 싸우고 있군.”
“싸우면 싸울수록 깨닫는 것이 아주 많네. 마음을 이해하고 의지를 이해하게 돼.”
연자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싸움을 통한 발전? 마음의 싸움만으로도 발전한다고?”
“이 한 번의 싸움이 수 천, 수 만 번의 실전보다 가치가 있네. 사람이 올곧게 마음을 세우는 법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가치가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겠는가?”
연자강이 곽소혜의 손을 잡고 일어나, 은교교를 보았다.
그의 의중을 깨달은 은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울 때는 집중이 좋겠죠?”
구패객이 누구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제왕검형을 사용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사도명은 구패객이 남긴 의지와 싸우며, 제왕검형을 극복할 방법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건 또한 제왕검형 자체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방안에는 사도명만 남았다.
밤이 깊어갔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밤이 깊었다.
주덕문은 중화전의 앞에서 백수십 개의 강철 인형을 뒤에 거느린 채 서 있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계속 변했다.
그의 옆에 도광효가 보였다.
“오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도명이 오지 않습니다.”
주덕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그놈을 너무 높이 평가했다. 머리를 써 새벽에 올 줄 알았더니, 겁을 먹어서 숫제 오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도광효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사도명이 아직 오지 않는 것은 확실히 의외였다.
도광효는 사도명이 정오에 오리라 생각하고, 모든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내가 그를 너무 높이 평가했나? 아니면, 나 스스로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인가?”
도광효는 혼자 중얼거렸다.
자정은 이제 한 시진도 채 남지 않았다.
주덕문이 소리쳤다.
“군사를 거두자. 강철용도 거두겠다. 무림맹은 숭산에 있지?”
“그렇습니다. 새로 건립되는 무림성은 분명 숭산입니다.”
“내일 거기로 간다. 강철용을 모두 이끌고 가겠다.”
“명분이 없습니다, 전하.”
“무림맹주라는 사도명이 황실에 거역했다. 대역의 죄를 물어서 모두 없앨 것이다.”
“사도명은 공식적으로 무림맹주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형식을 갖춘 이상, 황실과 무림의 불문율을 깨뜨리기엔 명분이 부족합니다.”
“죽고 싶으냐?”
주덕문이 미간을 찡그렸다.
“황실의 핏줄인 내 뜻이다. 황실의 피를 이었기에, 황제가 될 가능성도 갖춘 나의 뜻이다.”
“공식적으로 창왕 전하는 동창의 제독이시며, 저는 부제독입니다. 말씀에 신중하소서.”
“강철용만 가까이 있고, 군사들은 멀리 있다. 누구도 듣지 못한다. 설령 듣는 이가 있다 해도, 내가 왜 말을 가려야 하느냐?”
“황상께선 자신의 핏줄을 싫어하십니다. 처음엔, 한 명도 살려놓지 않고 죽이려 하셨지요.”
“뭐?”
“호연 옹주도, 창왕 전하도, 모두 목을 베라 하셨던 것을 제가 말렸습니다. 무엇보다 창왕 전하는 전 황제의 친동생이시니 더더욱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주덕문이 도광효를 노려보면서 으드득 이를 갈았다.
“네놈이 지금 감히!”
도광효는 당황하지 않았다.
“묻겠습니다. 창왕 전하께서 지금 살아계시는 것이 누구의 공 같습니까?”
주덕문이 오른손을 들어 얼굴에 쓰고 있던 면구를 벗었다.
사십 대 정도로 보였던 주덕문의 가짜 얼굴이 벗겨지며, 일흔은 된 듯한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모든 것은 나 스스로의 공 같은데, 틀렸느냐?”
“전하. 면구를 쓰소서.”
“박혼제신의 대법은 사용하는 사람을 조로(早老)하도록 만든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주덕문의 주름이 꿈틀거렸다.
“황실의 핏줄이면서도 동창의 제독태감을 맡아, 이런 꼴이 되면서도 강철용을 늘려가는 나 스스로의 덕인 듯한데, 그게 틀렸느냐?”
도광효는 포권한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전하. 다시 쓰소서.”
주덕문은 결국 면구를 썼다.
다시 사십 대로 돌아간 주덕문이 동창 제독의 신패를 빼들었다.
“창왕으로서, 동창의 제독으로서 부제독에게 명한다.”
“명을 내리소서.”
“내일 날이 밝으면 숭산으로 향한다. 강철용과 동창의 군사들로 무림맹을 쓸어버린다.”
“하지만….”
“이미 명령한다고 말했다!”
도광효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그동안의 네 계획은 잘못되었다. 너는 전대 황제와 금의위장 진소추를 함께 놓치는 실수를 범하고도 반성하지 않는구나.”
“…반성? 그렇습니까?”
“무림을 이용하겠다는 네 계획은 극락문이 깨어지면서 실패! 지옥문은 무림을 다스리지 않는다. 없애면, 골치가 아플 일도 없다.”
주덕문은 신패를 품에 넣고 몸을 돌려 중화전 앞을 떠났다.
강철의 인형들도 그를 뒤따라서 떠나갔다.
도광효가 혼자 중얼거렸다.
“없애 버리면, 골치 아플 일이 없다? 맞는 말이군. 정말 옳아.”
청룡위와 현무위가 도광효의 뒤에 나타났다.
“실행합니까?”
두 사람은 같이 포권했지만, 질문은 현무위만 했다.
청룡위는 말을 금지 당했기에, 목만 깊이 숙였다.
“아직은 아니지.”
도광효가 고개를 흔들었다.
“건녕제를 찾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필요하다.”
“조화무제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준비했던 여자들은 교태전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도광효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밝는다 싶다가도 밤이 되면 다시 어두워진다. 언제나 제대로 밝을 것인가? 갈 길이 먼데, 산이 너무 험하구나.”
**
도광효가 서 있는 곳에서 삼 장 떨어진 석탑.
그 위에 사내 한 명이 있었다.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의 눈빛이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의 존재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태연히 앉아 있건만, 도광효와 청룡위, 현무위는 그를 느끼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결국 오지 못하는가?”
사내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도명, 그대라면 올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아!”
사내의 눈이 더 밝게 빛났다.
도광효의 옆으로 사도명이 산발 사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광효는 산발 사내를 보지 못했듯, 사도명도 보지 못했다.
사도명이 마침내 산발 사내의 앞에 섰다.
산발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좋구나. 조화무제는 결국 제왕검형을 푸셨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