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선우의 일족은
도언직은 더 이상 선우척에게 용기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두려워도 기어이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다.
선우척은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한 사람이었다면 왕삼처럼 무림 문파를 차렸지, 도굴을 하면서 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의리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먼저 죽은 동생들의 복수를 위해, 겁을 참으며 다시 갱 아래로 돌아왔으니까.
[기운이 느껴지는군.]
선우척이 말했던 장소가 가까워지자, 왕삼이 육성대신 전음으로 바꾸어 도언직에게 말했다.
[나도 그래. 저 아래 느껴지는 이 기운! 분명 친숙해.]
마침내 선우척 일행이 팠던 굴이 끝났다.
굴의 끝 아래쪽으로, 오와 열을 맞추어 도열해 있는 수백 개의 병마용들이 보였다.
병마용들은 옹기로 빚은, 본래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낮에 저것들이 움직였다 말하는 거지?]
도언직이 전음으로 선우척에게 물었다.
“그게 ... 읍.”
선우척이 뭔가 말하려 하자, 도언직이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쉿! 우린 이미 친구라 생각하고 말을 편히 할 거니까, 그냥 고개만 움직여. 맞아? 아냐?]
선우척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언직이 왕삼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본래 움직일 수 없는 것들. 하지만 우린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 움직이는 걸 이미 봤어. 그렇지?]
[느껴지는 이 기운도 낯익어. 우리들 마음속의 조화심이 느끼고 있어. 이건 틀림없이….]
노(弩)는 쇠뇌를 뜻하며, 노를 사용하는 병사가 노병이다.
병마용들 중의 노병용 하나가 갑자기 몸을 틀더니 위쪽을 보면서 소리쳤다.
“웬놈들이냐?”
쉬-익!
노병용이 발사한 쇠화살 하나가 선우척을 똑바로 노리며 날아왔다.
세 사람 중 기척을 숨기는 일이 가장 미숙한 선우척이 흔적을 들킨 것이다.
도언직이 검을 뽑아 선우척을 노리는 화살을 허공에서 잘랐다.
츠칵!
“선우척! 어서 도망쳐!”
왕삼이 땅굴 밖으로 달리더니, 지하갱 아래로 뛰어내렸다.
떨어지면서 오른손을 휘둘러 자신의 주변에 있는 병마용 세 개를 동시에 부쉈다.
콰콰-쾅!
부서진 병마용 안에서 올라오는 뿌연 회색의 기운을 가리키며, 왕삼이 소리쳤다.
“이것 봐. 틀림없잖아. 심마문의 어기전혼! 우리가 느낀 게 확실했다니까.”
세 개를 부쉈지만 남아 있는 병마용은 수백 개가 넘었다.
주변의 병마용들이 제각각의 무기를 들고 왕삼을 겨누었다.
“멍청이! 그걸 알아내려고 일부러 적진에 뛰어들어? 당장 밖으로 달아나, 선우척!”
도언직이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자신은 오히려 지하갱 아래의 왕삼을 향해 날아갔다.
네 개의 병마용을 조각조각 부순 후에, 도언직은 왕삼과 등을 맞대고 섰다.
“그러는 너는 왜 달아나지 않고 뛰어든 거냐, 바보야?”
왕삼이 고함을 지르자 도언직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일 년 가까이 힘을 합쳐 싸우다 보니까 나도 너하고 똑같아졌나보다. 젠장.”
사방에는 수백 개의 병마용이 있었다.
마치 조물주에 의해 생명이라도 얻은 듯, 그들이 일제히 움직이고 있었다.
“본래 심마문의 어기전혼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쓰였었지.”
왕삼이 말하자 도언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소림사에서는 죽은 사람에게도 사용했어. 망할, 이제는 숫제 옹기 인형에게도 쓸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는 건가? 혹시 여긴 그걸 시험하는 실험장?”
- 잘도 분석하는구나.
낭랑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왕삼과 도언직이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았다.
금관을 쓴 옹기 인형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형은 다섯 필의 옹기 말이 끄는 화려한 수레에 탔고, 화려한 보의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흡사 황제의 행차 같았다.
“옳다. 나는 여기에서 어기전혼이 무생물에게도 쓰여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왕삼과 도언직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왕삼이 물었다.
“넌 누구냐?”
도언직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질문이 틀렸잖아, 왕삼! 너는 뭐냐, 라고 해야지.”
“하하하. 그런가?”
황제 흉내를 내는 옹기 인형이 고개를 아래위로 까닥거렸다.
얼굴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표정을 표현할 수단이 달리 없는 모양이었다.
“뭣들 하느냐? 감히 짐을 모욕했다. 놈들을 죽여라!”
병마용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생김새에 따라 각각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창을 내지르고, 전차를 돌진시켜서 왕삼과 도언직을 공격했다.
왕삼과 도언직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의 무공은 지난 일 년 사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언제나 목숨을 걸고 싸웠고, 중간중간 틈틈이 사도명과 연자강이 무공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조화심결은 배울수록 깊어져서, 소림사에서 혼돈마인의 혼돈안마저 그들을 미혹하지 못했었다.
콰쾅!
퍼퍼퍼퍼펑!
흙을 구워 만든 병마용은 아무리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옹기 그릇에 불과했다.
칼과 화살과 창과 전차가 위험했지만, 왕삼과 도언직은 빠른 속도로 병마용을 부수고 있었다.
“하이고! 저게 돈으로 치면 얼마짜린데.”
선우척은 도굴 땅굴 속에 숨은 채로 혼자 탄식했다.
그의 눈에, 부서지고 있는 병마용은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는 전표와 다름없었다.
아무리 병마용이 잘 부서진다 해도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왕삼과 도언직은 빠른 속도로 지쳐갔다.
[아무래도 이상해.]
왕삼이 전음을 보냈다.
도언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상하군.]
황제 흉내를 내는 병마용의 모습이 너무 태연했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도 미동조차 없었다.
“이봐, 옹기 인형! 너는 스스로를 짐이라 부르던데, 그건 잘못된 호칭 아니냐?”
왕삼이 소리쳤다.
황제 병마용이 왕삼을 보았다.
“네놈이 지금… 엇!”
도언직이 병마용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왕삼의 등을 앞으로 힘껏 밀었다.
밀치는 힘과 땅을 박차는 힘을 더하여, 왕삼이 황제 병마용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생각해보니까, 너만 부수면 상황에 해결될 것 같아서!”
쇠처럼 단단하게 변한 왕삼의 오른손이 황제 병마용의 머리를 부수려는 바로 그 찰나!
까가가가강!
굉음이 일어났다.
옆에서 날아온 검은 그림자가 왕삼의 앞을 막은 것이다.
왕삼은 뒤로 밀려났다.
“우웃!”
“왕삼!”
도언직이 몸을 날려, 허공에서 왕삼을 받았다.
두 사람의 힘을 합쳤음에도, 도언직과 왕삼은 삼 장가량을 물러나고 나서야 겨우 몸의 균형을 바로 잡을 수가 있었다.
“저, 저놈은 뭐야?”
왕삼이 몸을 바로 세우며 자신을 쳐낸 그림자를 보았다.
검은 그림자 역시 인형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병마용과는 달리, 도기가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진 인형이었다.
“하하하. 강철용이다.”
황제 병마용이 껄껄 웃었다.
“만년한철로 만들었지. 강철도 옹기그릇 부수듯 부술 자신이 있느냐, 결사대의 부대장들?”
와장차-차창!
사방에서 옹기그릇으로 만들어진 병마용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터지고, 무너졌다.
왕삼과 도언직이 만든 결과가 아니었다.
부서지고, 터지고, 무너지는 도기 병마용의 뒤에는 또다른 강철의 병마용들이 있었다.
“이런 젠장! 하나도 귀찮은데 이렇게나 많이!”
모두 열여덟 개였다.
“십팔 강철용이다. 내일은 그 열 배를 준비할 것이고!”
황제 병마용이 웃었다.
왕삼이 가장 앞에 서 있는 강철용의 가슴을 정권으로 힘껏 쳤다.
쩌-엉!
맹렬한 일격은, 그러나 강철용을 부수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내공을 잔뜩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왕삼의 뼈와 살점이 한꺼번에 짓뭉개졌을 것이다.
“크윽!”
“하하하. 네놈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본래 없었다.”
황제 형상의 병마용이 웃었다.
“내일 자금성으로 오겠다 했지? 기다려줄 참이었다. 강철의 병마용으로 충분히 즐겨줄 참이었었다.”
뼈가 부러진 오른손을 흔들면서, 왕삼도 따라 웃었다.
“헤헷. 그렇다면 우린 매우 큰 공을 세운 셈인가?”
“무림연합군을 대비한 지옥문의 비밀 준비를 얼렁뚱땅 알아낸 셈인 건 맞군.”
도언직의 말에, 황제 병마용이 웃음을 그쳤다.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다면, 여기에서 죽어라.”
열여덟 개의 강철용들이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호흡이 없었다.
흔한 기합성조차 없이 천천히 모여드는 강철 인형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충분히 만족할 수준은 전혀 아닌데 말야.”
“그러게. 이 사실을 무제께 알리고 죽어야 만족스러운 거지.”
무림연합군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도명을 맹주라 부른다.
하지만 조화결사대의 대원들을 고집스럽게 그를 무제라 불렀다.
무인으로서 사도명을 향해 느끼는 존경심을 표현하는 호칭이었다.
열여덟 개의 강철 인형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순간, 땅이 꺼졌다.
왕삼과 도언직은 서 있던 아래의 땅이 꺼지자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다, 친구들! 몸에 힘을 빼. 싸우는 재주는 없지만, 도망치는 재주라면 나 아니겠는가?”
선우척의 목소리였다.
**
흙이라고 모두 같은 흙이 아니다. 생토와 숙토는 구분된다.
한 번도 파헤쳐 진 적이 없는 생토보다 이미 파헤쳐진 적이 있는 숙토가 훨씬 더 파기 쉽다.
선우척은 혼자 밖으로 달아나지는 않았다.
왕삼과 도언직은 그에게 달아나라 했으면서도 아래로 내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친구를 두고 달아나는 건 사내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물며 왕삼과 도언직은 동생들의 원한을 갚아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힘껏 싸울 때, 선우척은 낙양삽으로 땅을 팠다.
운이 좋았다.
강철의 병마용이 나타나고 왕삼과 도언직이 위기에 빠졌을 때, 선우척은 두 사람의 바로 아래로 땅굴을 뚫을 수 있었다.
콰르르!
땅이 무너져 내렸다.
“멍청이! 달아났어야지.”
왕삼이 고함을 질렀다.
선우척도 마주 소리 질렀다.
“땅굴은 좁다! 괴물들은 사람처럼 몸을 굽히지 못하니 들어오지 못할 거야. 어서 움직여!”
선우척이 먼저 기어갔다.
왕삼과 도언직도 뒤를 따랐다.
“달아났어야지. 정말로 멍청하기가 끝이 없다니까!”
왕삼이 낮게 투덜거렸다.
선우척이 뒤에서 웃었다.
“선우의 일족은 절대로 친구를 두고 도망치지 않아.”
선우척의 예측이 맞았다.
강철 인형들은 좁은 땅굴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꽈-앙!
폭음과 함께 주먹이 나타났다.
땅 위에서, 아래를 향해 강철 인형이 주먹을 내려친 것이다.
도언직이 왕삼과 선우척에게 각각 전음을 보냈다.
[보지 못하니 기운을 감지할 거다. 호흡을 지워. 기척도 들키지 마라!]
도언직과 왕삼은 그래도 정식으로 무공을 배웠다.
하지만 선우척은 하오문에 전해지는 삼류의 무공을 눈대중으로 익혔을 뿐이었다.
쾅! 쾅! 쾅!
강철 주먹이 계속 지하땅굴로 내려오자, 선우척이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어서 달아나! 강철 괴물은 빨리 달리지도 못할 거라고!”
[선우척! 말하지 말…!]
꽈-앙!
강철의 주먹이 선우척의 배를 뚫었다.
고통으로 부릅뜬 선우척의 눈이 왕삼과 도언직을 향했다.
왕삼이 부들부들 떨었다.
“너는… 너는 그냥 달아났어야 했는데.”
“헤헷. 또 쓸데없는 소리. 선우의 일족은….”
선우척이 힘겹게 웃었다.
“친구를 두고 도망가지 않아, 절대로.”
강철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선우척이 구멍 뚫린 복부에서 피와 내장이 함께 흘렀다.
- 피? 하하, 거기냐?
강철 인형 주먹에 묻은 피를 확인한 황제 병마용이 땅 위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