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사랑과 책임
마음을 고백하기에 최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최선의 시간이란 존재할까?
제갈평은 몸을 떨었다.
사도명이 내심 한숨을 깊이 쉬며 제갈평의 앞을 막았던 손을 뒤로 거두었다.
제갈호연은 어울리지 않는 때와 장소에서 본심을 고백했다.
제갈평은 그 말을 들었다.
연자강이 검을 고쳐 잡고 다시 제갈호연을 겨누었다.
“소혜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정말로 베겠소.”
“진사비침술의 공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지. 하나는 진사를 이용하여 상대를 베는 방법.”
사도명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위험하다! 피해!”
연자강이 눈을 부릅떴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가늘고 날카롭고 이어진 칼날이 허공에서 그를 덮쳤다.
‘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줄 한 줄이 날카로운 보검이다.’
쉬-잉!
소리와 기척만으로 짐작하여 피해야만 하는 공격이었다.
혹은 막을 수밖에 없었다.
연자강은 검을 뽑아 허공에 빽빽한 그물을 만들며 날아오는 가느다란 실을 막았다.
까가가가강!
검과 실이 부딪쳤는데도 경쾌한 쇳소리가 울리면서, 허공 여러 곳에 불똥이 튀었다.
“이것이 천망엄밀!”
제갈호연은 자신이 휘두르는 진사를 더러 막고 더러 피하는 연자강을 보며, 자신의 초식을 설명했다.
“진사비침술의 첫 번째 초식이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약점이야. 그래서 제이초 천무고요는 소리마저 숨기는 것이다.”
실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갈수록 미약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연자강은 검을 휘두르는 중간 중간에 검신을 손톱으로 튕겼다.
타다다다다다당!
튀는 불꽃!
검에서 일어난 불꽃이 실에 반사되었다.
연자강은 소리 내지 않는 진사의 공격을 눈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피하거나 튕겨냈다.
“호호호. 그런 방법도 있었나? 미처 생각지 못했군.”
그 와중에도 연자강은 계속 제갈호연을 향해 다가갔다.
“내 아내를 풀어주라고 말하고 있소, 지금 당장!”
“호호호. 그러나 자네의 편법은 제삼초 천도무형에는 쓰지 못해. 이건 숫제 보이지가 않거든.”
불똥을 반사하던 실의 흔적이 돌연 사라졌다.
연자강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제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실의 칼날을 피하거나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도와줘야 하지 않나요?]
은교교가 전음으로 사도명에게 물었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요.]
연자강은 휘두르고 있던 검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검기로 호신강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막아낼 방법이라고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천망엄밀과 천무고요를 피해내느라 움직였던 나의 모든 동작들! 실이 다가오면 물러나고, 실이 물러나면 오히려 다가갔던 내 움직임들!’
연자강은 숫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이 반 치 허공으로 떠올랐다.
휘우우우-우웅!
수없이 많은 가닥의 실이 날아오는데, 연자강은 눈을 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그거야!”
사도명이 소리쳤다.
실의 칼날이 몸에 닿는다 싶은 순간, 연자강의 몸이 반응했다.
잔잔한 물 위에 뜬 나뭇잎은 막대로 저으면 도망가고, 멀어지려 하면 따라온다.
연자강의 몸은 진사가 뿜어내는 강기에 반응하여, 저절로 멀어지고 저절로 다가가고 있었다.
“의형수형의 신법!”
제갈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도무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지.”
연자강은 다시 한번 제갈호연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리 제갈호연이 진사를 휘둘러도, 연자강의 몸은 유령처럼 그 사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소혜를 풀어주시오.”
“호호호. 진사비침에서는 진사술이 아니라 비침술이 더 위험하지.”
제갈호연이 손과 팔과 몸을 기이한 자세로 움직이면서,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비침 제일초, 목우종형.”
바로 옆에 있던 곽소혜가 제갈호연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소혜!”
“제가 움직이는 거 아니에요. 몸이 저절로 움직여요.”
“호호호. 황제는 언제나 이 비침술을 욕심냈었다네. 심마문의 어기전혼이 애초 단순히 상대를 조종하는 것에서, 상대의 몸까지 움직이는 것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
제갈호연이 손과 발을 어지럽게 움직이자, 곽소혜가 똑같이 움직이며 연자강을 공격했다.
연자강은 검을 휘둘려, 검면으로 곽소혜를 막았다.
하지만 반격할 수는 없었다.
제갈호연이 깔깔 웃었다.
“목우란 나무로 만든 인형. 적이 아끼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지. 호호호. 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히 손을 대겠는가? 이것으로 적이 아끼는 사람으로 적을 죽일 수 있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자강은 차마 곽소혜를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나기만 했다.
**
[왜 돕지 않는 거예요?]
은교교가 다시 물었다.
전음을 사용하는 이유는, 돕는다는 말이 연자강에게 수치로 느껴질까 우려한 탓이었다.
[도울 수 없소.]
[연 공자가 위험하잖아요. 곽 소저도 위험하고요.]
[당신에게는 저 모습이 서로 싸우는 것 같소?]
은교교의 눈이 빛났다.
[제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건가요? 싸우는 게 아니면 뭐죠?]
[호소하는 거요.]
사도명이 곽소혜를 가운데에 둔 연자강과 제갈호연의 싸움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제갈 부인은 남편에게 호소하고 있소. 슬프군…. 여와방의 다섯 여인은, 모두 슬픈 운명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
연자강은 계속 피했다.
진사술을 피하면서 깨달은 의형수형의 신법이 없었다면, 피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 곽소혜의 몸이니 반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 피하면서도, 연자강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저는 피할 뿐이지만 부인께서는 자신과 소혜를 같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먼저 지치실 겁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제가 이깁니다.”
연자강의 판단은 정확했다.
제갈호연도 연자강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형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도 괜찮은가 볼까? 비침술 제 이초는 철우광형일세!”
나무 인형인 목우에 비해, 쇠 인형 철우는 훨씬 단단하다.
휘두르는 곽소혜의 손과 발끝에 강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목우종형에 비해 철우광형이 뛰어난 점은 시전자의 내공이 진사를 타고, 비침을 통해 꼭두각시의 몸속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휘이-이이잉!
곽소혜의 손발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듣기만 해도 섬뜩했다.
“아아! 제발 그만 해요. 남편을 해치고 싶지 않아.”
곽소혜가 울부짖었다.
옆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정말로 해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의지로 저항하시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사도명이 전음을 보내온 것이다.
[몸속을 흐르는 기운을 느끼시오. 어디로 흐르며, 어떻게 융합되고 분리되는지를 느끼시오. 그 움직임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시오.]
연자강은 가까스로 피하고 있었으나, 등이 벽에 닿자 더 이상은 피하지 못했다.
“미안하오, 여보.”
연자강이 검을 움직였다.
까가강!
곽소혜의 손에서 뻗은 강기와 부딪친 검이, 불꽃을 튀기며 곽소혜를 뒤로 밀어냈다.
[너도 마찬가지다. 눈치 채고 있겠지만, 이건 싸움이 아냐.]
연자강의 귓속에도 사도명의 전음이 울렸다.
[기의 흐름에 반응해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의형수형. 그걸 몸의 바깥에 펼칠 수 있다면, 당연히 몸 안에도 펼칠 수 있다.]
연자강의 눈이 커졌다.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천하에서 두 번째라고 말하면 서러워할 기재였다.
곽소혜가 다시 달려들었다.
연자강은 검기로 뿜어내던 호신강기를 거두고, 숫제 검까지 아래로 내려버렸다.
“왜 그래요? 위험해. 그러지 말아요, 여보!”
놀란 곽소혜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제갈호연의 조종에 따라 속절없이 자신의 남편을 공격했다.
퍼퍼퍼-퍼퍼퍼펑!
“크윽!”
연자강이 입과 코에서 피를 토하며 정신없이 물러났다.
곽소혜의 손에 얻어맞은 그의 몸 열두 군데는 순식간에 옷이 해어질 지경이었다.
“제발 그만둬요! 더 이상은 하지 말아요!”
곽소혜가 초췌한 얼굴로 제갈호연을 보며 애원했다.
제갈호연의 얼굴에도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목우와 철우. 그리고….”
제갈호연이 두 손을 허공 높이 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가공할 힘이 솟구쳐 올랐다.
힘이 진사를 타고 곽소혜에게로 넘어가는 광경이,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보였다.
“마지막은 괴뢰번명. 내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는 인형과는 다르다. 곽소혜! 나의 힘을 모두 넘겨받아라. 그리고 내가 지정한 행동을 수행하는 괴뢰가 되어라!”
콰콰콰콰콰콰콰-!!
곽소혜의 몸에서 빛이 솟았다.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흠을 넘겨받으면서, 곽소혜가 소리쳤다.
“싫어! 더 이상은 싫어!”
“내 말을 들어. 내 명령을 들어. 죽여라! 내가 명령하는 그 상대를, 당장 죽여-!”
“으아아!”
곽소혜가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연자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기까지, 됐습니다!”
차분한 음성이 제갈호연의 뒤에서 들렸다.
은교교의 옆에서 사라진 사도명이, 어느새 거기에 있었다.
“이제 충분합니다. 제갈 부인의 마음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제갈호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십 년 이상 늙어보였다.
짧은 순간에 자신이 지녔던 내공을 모두 쏟아냈기에 벌어진, 참담한 결과였다.
“여보!”
제갈평이 옆으로 다가와 제갈호연의 오른손을 잡았다.
“어떻게 됐어요? 곽소혜는 어떻게 됐나요?”
제갈호연이 왼손으로 연신 흐려진 눈을 비비며 옆을 보았다.
곽소혜의 오른손이 연자강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연자강은 저항하지 않고, 양손을 앞으로 뻗은 채였다.
그 손이 천천히 움직여서 곽소혜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끌어당겨 그녀를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곽소혜가 울음을 터뜨렸다.
“왜 피하지 않았어요? 내 손으로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평생… 평생… 흐흑.”
“믿었으니까. 당신이 힘을 제어해 줄 거라고.”
연자강이 그녀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렸다.
“흑흑. 어떻게 믿어요? 나조차 믿지 못했는데.”
연자강이 곽소혜를 안은 채 고개를 돌려 제갈호연을 보았다.
“만약 당신이 제어하지 못했어도 난 죽지 않았을 거요.”
“어, 어떻게요?”
“당신이 처음 두드린 열두 개의 혈도! 그게 제갈호연 부인이 알려준 호신무공의 운기법임을 아슬아슬한 순간에 알아차렸지.”
곽소혜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연자강에게 안긴 채 제갈호연을 보았다.
제갈호연은 매우 늙어 보였고, 지쳐서 초췌했다.
“설마 나 때문인가요? 저에게 내공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곽소혜는 자신을 손발을 살폈다.
며칠 동안 박혀 있던 금침이 이제는 더 이상 없었다.
“주호연도 저 아이 같았어요, 여보! 늘 혼자서 외쳤어요. 싫어.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야.”
제갈호연이 제갈평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주호연이 더 불쌍해요! 알죠? 저 아이는 꼭두각시에서 벗어나면 남편을 지킬 수 있지만, 주호연은 그렇게 하면 부모님이….”
“알겠소. 주호연은, 불쌍해.”
“어쩌려고 그랬어요? 곽소혜를 주호연에게 맡겼다가, 나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당신은 제갈호연이니까.”
“!”
“사랑하는, 내 아내니까!”
제갈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믿었다가, 나중에 배신당하면 어쩌려고요, 여보?”
“사랑에는 책임도 따르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소.”
“호호. 이렇다니까. 이런 남자를 배신하라고 도광효가 그랬어요. 정말 어리석어요. 그렇죠?”
제갈호연이 환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로 제갈호연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제갈평을 안았다.
“행복했어요. 자격은 없지만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왜 이러시오? 곧 떠날 사람처럼 말하지 마시오.”
“떠나야 해요. 떠나지 않으면 부모님이 무사하실 수 없어요.”
냉랭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 하하하. 그거야 당연하다. 네가 지금 당장 떠나지 않는다면, 네 부모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주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