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86화 (86/168)

086화. 진사비침(眞絲飛針)

사도명이 서재에 있었다.

그는 앉아서 편안한 태도로 있다가, 제갈평이 들어오자, 숫제 자신이 서재의 주인인 양 제갈평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가주님.”

제갈평은 사도명의 태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우선 사도명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행적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알려도 되는 볼 일이라면, 사도명은 서재가 아닌 대청에서 제갈평을 기다렸을 것이다.

두 번째로 사도명은 제갈평을 떠 보고 싶어했다.

아니라면 사도명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인사하기 전에 주인보다 먼저 서재를 차지한 무례에 대해서 사과했을 것이다.

제갈평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오셨소, 맹주?”

사도명이 웃으며 물었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맹주와 나는 모르는 사이가 아닌데, 놀랄 게 뭐가 있소?”

“역시 제가 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계셨던 거군요.”

“오늘 제갈세가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이 두 명 왔소.”

제갈평은 화왕 소빙유와 수왕 탁호천의 방문을 언급했다.

“혼인을 알리러 왔다고 말하더구려. 황실이 지옥문의 본체임을 알고, 황실이 무림 자체를 없애겠노라 선언하여 흉흉한 때에 말이오.”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듣고 보니 정말 때가 좋지 않군요.”

“제갈세가가 짐작하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 벌어지는 경우는 오직 두 가지뿐이지요.”

제갈평이 사도명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는 제갈세가의 정보망이 완전히 마비되는 경우. 두 번째는 누군가가 제갈세가를 일부러 속이려 꾸미는 경우.”

사도명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두 번쨉니다.”

“그럼 설명을 들어봅시다.”

제갈평은 끌어올렸던 경계의 기운을 풀었다.

사도명이 말했다.

“화왕과 수왕께는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수왕께 매우 좋은 일이 된 것 같습니다.”

“혼인이 아니라 그들을 보낸 이유에 대해서 묻고 있소.”

“제갈세가의 주변은 언제나 천문금쇄의 진법이 감싸고 있죠.”

제갈평은 비로소 사도명이 화왕을 보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제 알겠소. 우리는 화왕과 수왕을 맞기 위해서 세가를 감싸고 있는 천문금쇄진을 풀어야 했소.”

제갈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법을 일부러 풀게 한 건, 몰래 들어오기 위함이었소?”

“저희의 행적을 알리면 아니되는 사람이 제갈세가에 있었습니다.”

“저희? 혼자가 아니란 거요?”

“제갈세가의 천문금쇄는 촘촘합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세 명이나 몰래 숨어들어올 능력이 저희에겐 없습니다.”

설명 속에 칭찬을 숨긴다.

제갈평은 당황했지만, 화를 내기가 어려웠다.

“제갈세가의 안에, 맹주의 행적을 숨겨야 할 사람이 있다고?”

사도명이 한숨을 길게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평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맹주는 본가의 누군가가 무림맹의 적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구려?”

“의심이 아닙니다.”

사도명은 내공으로 바닥에 두 개의 글자를 썼다.

<여와(女媧)>

“저는, 확신합니다.”

제갈평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의, 의심조차 아니라 확신이라고? 대체 누구를?”

“여신 여와는 신과 사람을 함께 탄생시켰습니다.”

사도명이 제갈평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가주께선 이미 아신다고 믿습니다.”

제갈평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비틀거리더니, 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를, 이해해 주셔야 하오.”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호연은 좋은 여자요. 내가 먼저 좋아했고, 내가 먼저 고백했소. 그녀가 여와방 소속인 줄은, 정말로 처음엔 알지 못했었소.”

- 그럼 이젠 아신다는 거군요?

고운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렸다.

재갈평은 은교교가 어느새 나타나 자신의 왼쪽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 아버지도 어머니가 여와방 소속임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사랑하셨대요. 무척이나.”

“은 소저.”

- 하지만 제 아내가 제갈호연과 같이 있는 건 다른 일입니다, 제갈평 가주님.

오른쪽에도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석고처럼 표정이 없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제갈청미 소저와의 친분을 돌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연자강이었다.

제갈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곽소혜 소저의 보호를 맡았을 때 이미 각오했소.”

제갈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미는 데려오지 않았소?”

“그녀는 교교의 친구이며, 저 역시 무척 좋아합니다.”

사도명이 눈을 빛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사도명이 말하는 만에 하나의 상황이 무엇인지, 제갈평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져선 아니 되지. 좋소. 따라오시오. 아내를 만나러 갑시다.”

**

제갈호연은 자신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곽소혜가 앉아 있었다.

곽소혜는 무릎에 실타래를 올려두고 뜨개질을 하는 중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실이 천으로 변해 옷이 만들어졌다.

- 계시오, 부인?

바깥에서 제갈평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먼저 열렸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을 거면, 왜 물어보신 거죠?”

제갈호연이 곱게 눈을 흘겼다.

제갈평은 언제나 제갈호연의 이런 표정을 좋아했다.

평소라면 껄껄껄 웃었을 제갈평이, 계속 딱딱한 표정으로 제갈호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가주?”

제갈평은 대꾸하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의 탁자 위에, 품에 넣어 가져온 책자와 붓을 꺼냈다.

“십자천하록을 보완하다가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갑자기 생겼지 뭐요?”

제갈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저는 무림의 일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걸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라면 무척 잘 아실 거요.”

제갈평이 책을 폈다.

십자천하록 중의 오은(五隱)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오은은 강호에서 가장 은밀한 다섯 사람을 뜻하오. 그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지.”

제갈평이 제갈호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호호.”

“그들 다섯 사람은 놀랍게도 같은 문파의 출신이오.”

“그런가요?”

“다섯 사람은 나이가 비슷하며, 모두 여자지. 이래도 모르겠소?”

제갈호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보.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제가 어찌 알겠어요?”

제갈평은 물끄러미 제갈호연을 보다가, 붓을 들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오?”

“물론이죠.”

“얼마나 사랑하오?”

“처음 보았을 때는 단순히 사랑했는데, 지금에 와선 목숨만큼, 아니 목숨보다 훨씬 더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제갈평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예전에는 몰랐었소. 그러다가 최근에 오은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소. 그들은 철저하게 교육받은 여와방의 제자들이오.”

그는 붓을 들어 오은의 항목 아래에 이름 하나를 써넣었다.

<은요진殷瑤珍>

제갈호연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임무는 무림의 곳곳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를 포섭하는 일.”

제갈평이 고개를 들어 다시 제갈호연을 보았다.

“이 여자는 설청산 전대 맹주를 포섭하는 것이 임무였다고 하오. 당신도 아는 이름이지?”

“제 친구라고… 말했잖아요. 요진은 화왕과도 친구예요.”

제갈평은 일필휘지로 세 사람의 이름을 더 써넣었다.

“혹시 아는 이름이 더 있소?”

제갈호연이 입술을 깨물고, 더 이상은 대꾸하지 않았다.

제갈평은 마지막 이름 하나를 쓰려다가 붓을 멈췄다.

붓의 끝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붓을 제갈호연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차마 쓰지 못하겠소. 당신이… 대신 써 주겠소?”

제갈호연이 붓을 받았다.

판관필은 무거웠다.

전체가 철로 만든 것이라, 평범한 사람을 들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알려진 제갈호연이 판관필을 매우 가볍게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호연朱滸蓮>

제갈평은 눈을 감아버렸다.

제갈세가는 시집 온 여인에게도, 자신들의 성씨를 준다.

주호연은 제갈호연이 제갈평과 결혼하기 전에 사용했었던, 본래의 이름이었다.

“허락하다면, 이 불쌍한 여자 아이에 대한 얘기를 시작할게요.”

제갈호연은 자신의 이름을 마치 제삼자의 것인 양 불렀다.

“은요진의 처지는 차라리 나았어요. 그녀가 배신하지 못할 담보로 잡힌 것이 자신의 생명이었으니까. 버릴 수가 있었죠.”

제갈호연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책자 위로,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호연은 달랐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백부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었거든요.”

“백부란 곧 황제요?”

제갈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평이 책자를 찢었다.

오은의 다섯 이름이 적힌 쪽을 찢어낸 다음, 위로 던졌다.

문이 열리고 손 하나가 들어와, 펄럭거리는 종이를 쥐었다.

제갈호연은 나타난 사람이 사도명임을 알아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조화무제! 당신들은 황실로 간 것이 아니었나요?”

사도명이 아무런 말없이 뒤를 보았다. 연자강이 들어왔다.

그는 구석 자리 의자에 앉아 있는 곽소혜에게로 달려갔다.

“여보! …아!”

하지만 곽소혜의 바로 앞에서 멈춰야 했다.

곽소혜의 주변, 가늘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실들이 촘촘한 그물을 만들고 있었다.

실은 가늘면서도 날카로웠다.

“아버지는 번왕이었어요. 그러다가 역모죄로 몰려 폐왕 당했죠. 황족에서 평민으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주호연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여와방에 들어야 했어요. 공을 세우면 부모를 살려준다, 라는 조건이었죠.”

연자강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실! 들어본 적이 있소. 규화보전에 전해지는 진사비침(眞絲飛針) 중의 진사가 아니오?”

진사는 본래 누에고치에서 바로 뽑아는 실을 뜻한다.

하지만 규화보전 상의 진사는, 가늘고 강한 실을 내공을 더해 단련한 것을 의미한다.

강철로도 끊기 어렵고, 사람의 뼈조차 손쉽게 자르는 실이었다.

“규화보전은 환관이 익히는 거예요. 왕의 딸 주호연은 규화보전으 익히며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제갈호연이 제갈평을 보았다.

“주호연이 맡은 첫 임무는 무림의 모든 정보를 주관하는 제갈세가. 그곳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제갈평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래서 성공한 것이군.”

연자강이 제갈호연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당장 소혜 앞의 진사를 치워라. 그러지 않으면, 제갈호연! 귀하가 제갈 가주의 아내라고 해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

제갈호연은 연자강은 보지 않고 제갈평만 보았다.

“주호연은 본래 은요진을 욕했어요. 임무의 대상과 사랑에 빠졌다고요. 제갈평은 처음 본 후에는 근도 더 이상 욕하지 못했죠. 주호연 역시 사랑에 빠진 겁니다.”

“진사를! 치우라! 했다!”

연자강이 검을 쏘았다.

무영섬을 전개하는 연자강을 보고, 제갈평이 놀라서 외쳤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천기미리보가 제갈평의 발에서 펼쳐졌다.

금룡나포수는 제갈평의 손에서 뿜어나와 주변을 휘감았다.

그럼에도 제갈평은 연자강을 막지 못했다.

콰-콰쾅!

사도명이 먼저 제갈평의 앞을 천극멸을 이용해 막은 것이다.

“자강은 진중한 성격입니다.”

연자강의 검은 제갈호연의 몸에 닿지 못했다.

연자강을 막은 사람은 제갈평도 사도명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뒤쪽의 의자에 앉아 있던 곽소혜가 움직였다.

그녀의 두 손이 연자강의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을 쳤다.

퍼-펑!

폭음과 더불어, 연자강은 몸의 균형을 절반 이상 잃었다.

균형을 잃은 검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때, 이번에는 제갈호연의 손이 연자강의 가슴을 쳤다.

꽈앙-!

연자강은 세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빛으로 제갈호연의 옆에 서 있는 곽소혜를 보았다.

“다, 당신이 어떻게?”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곽소혜가 고개를 저었다.

연자강은 그녀의 손목과 발목, 그리고 어깨 등등에 가느다란 바늘이 꽂혀 있음을 확인했다.

“진사비침 중의 비침. 가는 바늘을 날려, 상대방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가?”

제갈호연이 웃었다.

“결국 주호연은 제갈평과 혼인했어요. 살면서 그녀는 무척 행복했죠. 왜냐하면 그녀는 제갈평을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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