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85화 (85/168)

085화. 여와방

지옥문의 본체는 황실이었다.

황제는 조카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후, 자신을 향한 세상의 불만을 잠재울 방법을 연구했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

검과 피의 대지, 무림.

그곳을 없애기로.

대장군을 동원하여 새외를 공격함으로써, 아수라혈교를 다시 한번 준동시켰다.

그들이 무림맹에 의해 패퇴 당하고 흩어지자, 혈교의 잔당을 발아래에 넣었다.

아수라혈교와 싸운 영웅인 설청산을 거꾸로 배신자라 소문낸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

무림은 철저하게 배신과 살육의 장소여야 했다.

극락문을 내세워 무림인을 등록시켰고, 하나하나 통제하는 방식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사도명이 제육대의 맹주로 나타났다.

일로종횡의 싸움 끝에 무림연합군은 지옥문과 싸워 이겼다.

그 와중에 놀랍게도 지옥문의 문주인 황제의 정체도 드러났던 것이다.

“무림맹의 재건이 시작되었다는 소식 들었나? 화운악 공자가 다시 무림태자로 돌아왔다는군.”

“그보다 무림맹주인 사도명이 동료를 이끌고 황실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충격적이야. 그건 말하자면 역모죄이기도 하잖아.”

무림인이라면 무림을 없애려는 황제의 음모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쉽게 싸울 수도 없었다.

황제를 죽이려 하는 것은 역모의 죄!

사도명은 자신과 몇 명의 조력자, 그리고 결사대로 황제를 죽이겠노라는 말을 남긴 후, 자금성을 향했다.

무림맹 자체는 역모의 계획에 개입되지 않게 하려는, 사도명의 배려였다.

**

“좋아. 다 좋은데….”

연자강이 최대한 낮게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쯤 자금성을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호북에서 산을 오르고 있는 거지?”

사도명과 연자강, 은교교.

세 사람이 오르는 산은 호북성의 융중산이었다.

“자금성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건 조화결사대만으로 충분하니까. 황제의 이목을 잘 끌 테지.”

융중산을 오르기 전, 사도명 일행은 객점에서 소문을 들었다.

무림맹주 사도명이 황제와 싸우겠노라 선언하며 자금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

그 사이에 황제의 정체를 증명하는 소문도 섞여 있었다.

- 대학사 방유님이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군.

- 구족이 아니라 십족을 멸했다면서? 대학사님을 알거나, 근방에 사는 사람조차 모두 죽였대.

- 다섯 살 먹은 아이도 거기에 포함되어있다고 들었는데.

“미친놈들. 나는 한시라도 빨리 황실로 가고 싶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중산을 오르는 건 결사대장님으로선 나쁜 일이 아니지 않나요?”

은교교가 웃었다.

연자강이 뒷머리를 긁었다.

“은 소저는 적암의 마녀가 되더니 말을 돌리지 않는구려. 사실이 그렇기는 합니다. 저는 지금 기쁨을 감추려고 투덜거리고 있죠.”

**

융중산에는 제갈세가의 본가가 존재하고 있다.

일로종횡을 시작할 때 봉문했던 제갈세가는 일로종횡의 완성을 앞두고 본가로 돌아왔다.

소림사에서의 대결전을 앞두고, 연자강은 제갈세가의 제갈평에게 곽소혜를 부탁했다.

제갈평의 아내 제갈호연은 환하게 웃으며 곽소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나 머리가 삼단 같을까? 이러니 연 공자가 사랑하는 거겠죠? 걱정 말아요. 곽 소저를 반드시 지킬게요.”

제갈호연의 본명은 주호연.

제갈세가는 혼인을 치른 며느리에게 자신들의 성씨를 부여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제갈호연은 아름다웠고 총명했으며 온유했다.

그녀는 제갈청미의 어머니였다.

강호인들은 모두 제갈청미의 아름다움이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노라고 말했다.

한데 소림사에서의 결전이 끝난 직후, 황궁으로 향한다고 천하에 알린 사도명이 연자강, 은교교와 함께 융중산으로 온 것이다.

“물론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연자강이 사도명을 보았다.

“자금성으로 가서 황제와 싸우는 것보다 중대한 일이 여기 생겨서 제갈세가를 찾는 거라면, 나는 마땅히 긴장해야 하겠지?”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맞았음을 직감한 연자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교교가 물었다.

“그 일은 혹시 제게 말했던 여와방의 일과 관련이 있나요?”

“그렇소.”

사도명이 대답했다.

“우린 한 시간 이내에 제갈세가에 도착할 거요. 그 전에 만날 사람이 한 분 있지.”

산길의 모퉁이, 커다란 바위가 두 개 겹쳐 있는 장소에서 사도명이 멈추었다.

아래쪽으로 멀리, 제갈세가 본가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향기가 피어올랐다.

주변의 나무와 풀에서, 빠른 속도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꽃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향기를 풍기는 곳은 꽃이 아니었다.

은교교는 사도명이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아. 오신다는 분이 그럼?”

사도명이 몸을 돌리며, 뒤쪽에 나타난 사람을 향해 포권했다.

“오셨습니까, 화왕 노선배?”

화왕 소빙유가 거기 서 있었다.

사도명의 인사를 받고, 소빙유는 은교교를 한 번 바라본 후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미 무림을 떠났다. 내가 지은 큰 죄를 씻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무림의 일에 끼어들고픈 마음은 없다.”

“은요진. 교교의 어머님과 무림이화로 불리셨지요?”

“모두 지나간 일이다. 법허 부맹주의 연락을 받긴 했지만, 교교가 부른다는 말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빙유가 은교교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잘 지내느냐? 이 사부가, 너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여와방이라는 이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사도명이 묻자, 소빙유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듣지 못했다.”

“은요진 님! 교교의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십니까?”

소빙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요진의 출신 문파를 알지 못했다. 혹시 그것이 여와방이냐? 칠음절맥을 치료할 무공을 익히게 했으니 큰 힘을 지닌 곳일텐데, 내가 왜 알지 못할까?”

“어머니에겐 사부님 외의 친구는 없으셨나요?”

“몇 명 있었다. 나만큼 친하진 않았으나, 같은 사문이라던 친구들! 그것이 여와방이었다니?”

사도명이 아래로 보이는 제갈세가를 가리켰다.

“그 친구가 혹시 저곳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어찌 알았느냐? 그녀는 제갈평과 혼인했고, 성씨도 제갈이라고 바꾸었다.”

소빙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호연. 웃음이 맑고 마음이 고왔다. 요진처럼 아름답진 못했으나, 현명했지.”

연자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사도명이 서둘러 융중산으로 온 이유를 깨달았다.

“이런! 호랑이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넣은 셈이었던가?”

“걱정만 할 건 아냐. 남녀의 일이란 언제나 그렇듯 변수가 많으니까. 은요진 님은, 여와방의 일원으로 설청산 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지만….”

사도명이 은교교를 보았다.

“자신의 생명을 던질 정도로 그 분을 사랑하셨어.”

은교교는 아래로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소빙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와방? 의도적?”

사도명은 소빙유에게 소림사에서 알아낸, 여와방에 대한 것을 빠르게 설명했다.

소빙유의 안색이 변했다.

“으, 은요진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설청산에게 일부러 접근한, 여와방의 제자라고?”

“그렇습니다.”

“서, 설청산도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거냐?”

“아셨을 걸로 짐작합니다. 두 분의 사랑은 생사를 뛰어넘었고, 숨기는 것이 없었을 겁니다.”

은교교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소빙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도 나는 거부한 건가? 교교야. 슬퍼하지 마라. 여건이 험하긴 했으나, 네 아버지는 모든 걸 알면서도 네 어머니를 사랑했다. 은요진은 그만큼이나 사랑받았던 것이다.”

“흐흑. 흐흐흑.”

눈물을 터뜨린 은교교를, 사도명이 안고 다독거렸다.

“그래서 제갈청미를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또한 여와방 소속이라는 걸,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계속 말해보라.”

“노선배께서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말했잖느냐? 나는 이미 무림을 떠났다. 잘못을 뉘우치며, 수왕 탁호천과 함께 친구처럼 조용히 살고 있다.”

사도명이 사방에, 철을 모르고 피어난 꽃을 보았다.

“노선배의 무공은 저주혈화공이었지요? 원망하는 기운이 어려, 보는 이조차 스산하게 만드는!”

소빙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 하고프냐?”

“지금은 내공에 따스한 기운이 넘칩니다. 나무가 그 기운에 반응하여 꽃을 피웠고요.”

사도명이 당황스러워하는 소빙유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수련을 게을리하시지 않으셨군요. 수왕 탁호천과 함께 계속 무공을 닦으신 겁니까?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 그 아이를 속일 방법이 없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잖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커다란 덩치의 늑대 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교교는 들려온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수왕님?”

늑대 떼 뒤에서, 푸른 빛의 거대한 늑대를 타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더는 마음을 속일 필요 없어, 소빙유. 죄책감을 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껏 속죄의 싸움을 이어가는 거겠지?”

수왕 탁호천이었다.

그가 사도명을 보며 말했다.

“무엇이든 부탁하라.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

“저희가 나선다면 제갈호연은 곧바로 눈치챌 것입니다.”

“그렇겠지.”

“화왕 노선배께서 제갈세가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해 주세요.”

소빙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수십 년을 모른 척 지내다가, 하필이면 이렇게 공교로운 때에 만나러 왔다고?”

연자강이 말했다.

“다른 핑계는 어떻습니까? 어여쁜 제자가 무림맹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알리는 것은?”

은교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안 돼.”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 교교의 이름, 무엇이든 나오기만 해도 경계할 것이다. 다른 핑계가 필요해.”

“혼례로 하자.”

소빙유의 말에 은교교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부님. 도명의 말처럼 제 이름이 나온다면….”

“네가 아니다. 내가, 이 사부가 혼례를 치를 생각인 거다.”

모두가 소빙유를 보았다.

수왕 탁호천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요? 설청산은 이미 죽었잖소, 화왕.”

“은요진은 내 친구예요. 내가 친구의 남자와 혼례 얘기를 꺼낼 정도로 나쁜 년 같나요?”

“그, 그럼 누구와 혼례를?”

소빙유가 탁호천을 보았다.

탁호천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서, 설마… 설마….”

“나도 여자예요. 평생 날 지켜준 사람. 내 죄를 알고도 끝까지 떠나지 않는 사람.”

소빙유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남자에게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여자가, 나는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아요.”

**

비록 오행왕이 아수라혈교의 간세로 밝혀져 그 위명이 바랬으나, 팔왕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다.

그런 팔왕 중의 두 명이 제갈세가를 방문했다.

햇살이 서산으로 완전히 넘어간 늦은 저녁이었다.

제갈호연은 소빙유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어머! 어머머!”

그녀는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연이어지는 감탄사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알아보겠니?”

소빙유가 묻자, 제갈호연은 제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어찌 몰라보겠어? 여보. 화왕 소빙유, 전에 말했죠? 제가 화왕과 친구라고. 은요진이라는 어릴 때의 친구에게서 소개받긴 했지만, 훨씬 더 좋아진 친구라고요.”

제갈평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소빙유는 제갈평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소빙유에게는 동행이 있었다.

수왕 탁호천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떠올린 채 여기저기 인사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평안하십니까, 제갈가주? 하하하. 제가 이번에 혼인을 하게 됐지 뭡니까?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제갈부인. 제가 혼례를 치르게 됐습니다. 하하하.”

누구에게나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소망이 있다.

그리고 소망은 뜻밖의 장소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뤄지곤 한다.

제갈평 부부와 화왕, 수왕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제갈평은 화왕, 수왕에게 숙소를 안내하고 자신의 서재로 왔다.

“하하하. 하나의 방이라니. 방 하나라니요. 하하하.”

멋쩍게 웃던 탁호천을 생각하며 제갈평은 서재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굳어 버렸다.

서재 안에, 사도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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