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실패는 패배와 다르다
소림사에는 나한진이 있다.
나한소진은 열여덟 명이 시전하고, 나한대진은 일백팔 명이 시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소림의 기나긴 역사에서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는 진법.
개방에 전해오는 타구진은 나한진과는 달리 숫자의 제한이 없다.
작게는 팔백 명부터 많게는 삼천 명까지 펼칠 수가 있었다.
소림사로 오면서, 만약을 우려한 대책을 가장 먼저 제안한 사람은 제갈청미였다.
“우리들에겐 매우 강한 사람과 적당히 강한 사람들이 같이 있어요. 대규모의 적들을 만났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뭘까요?”
개방의 장문인 옥현신개는 무공보다 진법에 더 재능이 있었다.
그는 소림의 나한진과 개방의 타구진을 섞어, 양쪽의 장점을 활용해 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노라고 밝혔다.
법허가 동의하여, 초월나한타구진이 완성되었다.
무려 삼천 명이 한꺼번에 돌아가면서 공격과 방어를 모두 겸할 수 있는 절진이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무림연합군이 고수의 집단이어도 나흘이나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일천팔백 구의 혼돈마인.
영원히 지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연합군은 진법의 외곽에서는 싸웠고 그 안에서 필수불가결한 휴식을 취했다.
음식도 섭취했다.
그렇게 해서 나흘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진법에서 가장 중요한 아홉 군데의 요충지인 구궁은 각각 은교교와 연자강, 법허, 화운악, 서문용맹, 구양걸, 당백룡, 청수진인, 그리고 운학자가 맡았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서, 그들마저 지쳐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양걸이 맡고 있던, 건휴의 방위가 뚫렸다.
놀란 옥현신개가 소리쳤다.
“위험하다. 조화결사대는 권제를 도와 뚫린 곳을 막으시오.”
하지만 소용 없었다.
일단 구멍이 뚫리자, 혼돈마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흐흥. 막을 방법이란 없다. 이건 마치 역병이 퍼지는 것과 같아서 한 번 뚫리면 끝이야.”
자신의 옆에서 땅을 박차고 쏘아가는 백호위를 보면서, 포옥경이 빙그레 웃었다.
“결판이 났다. 우리가 이기고 너희가 졌다, 연합군. 하하하!”
백호위는 빨랐다.
포옥경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진법 속으로 침투했다.
“권제를 보호해!”
옥현신개가 놀라서 외쳤지만, 백호위의 목적은 처음부터 권제 구양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얼리는 한기를 뿜는 백호위의 검은, 진법의 변화 전체 총괄하는 옥현신개의 목을 똑바로 노리고 있었다.
“나, 나였던 것인가?”
구궁의 요지(要地)를 막고 있는 고수는 움직이지 못한다.
위험한 사람을 구하려고 그들이 움직이면, 진법에는 또 다른 구멍이 뚫리기 마련이다.
“옥현신개! 위험… 헉!”
법허가 놀라서 외치다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불길을 발견하고 헛바람을 삼켰다.
주작위도 움직였던 것이다.
“네 목은 내 몫이다, 법허!”
법허가 양손을 연이어 움직여 천중팔불로 주작위를 막아냈다.
콰콰-쾅!
나흘 동안의의 싸움으로 법허는 지쳐 있었다.
연달아 뒷걸음질 치면서, 주작위에게 수세에 몰려야만 했다.
“치잇. 이렇게 되면….”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법허뿐만이 아니라 백호위의 공격을 받고있는 옥현신개의 목숨 역시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초월진을 깨고, 소진으로 전환한다. 각자가 십팔나한소진을 펼치며 대응하라.”
은교교는 자신이 지키던 진상의 방향을 버리고 몸을 날렸다.
어차피 옥현신개가 죽으면 초월나한타구진은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연자강도 은생의 방향에 진각을 넣어 한 차례 흔들었다.
꽈아-앙!
혼돈마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노려서, 연자강은 법허를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제갈 소저가 옥현신개 대신 진법을 지휘하시오. 전체 진법의 지휘가 흩어지면 아니 되오.”
카카캉!
연자강의 파극멸은 단숨에 주작위가 전개한 염마의 불을 산산이 흩어놓았다.
옥현신개를 노리는 백호위와의 싸움도, 은교교가 합세한 이후에는 우세였다.
“안심하면 안 됩니다. 절반 이상의 혼돈마인들이 남았습니다.”
화운악이 소리를 질렀다.
결국 진법이 풀렸다.
혼돈마인들은 밀물처럼 진법 안으로 쳐들어왔다.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혼돈마인을 상대할 힘을 남겨 놓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왕삼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혼돈마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젠장. 지옥문이 황실이라고? 세상 어디에 백성을 죽이려는 황실이 존재한다는… 큭!”
소리치다가, 왕삼은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고 뒤로 삼 장 가량이나 날아갔다.
“왕삼!”
도언직이 달려왔다.
왕삼을 해치려는 혼돈마인의 뒤를 공격하면서 그가 외쳤다.
“무제여! 우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거 같소. 대체 어디에 계시기에, 나타나지 않으시오?”
“푸하하. 조화무제? 놈이야 이미 겁을 먹고 숨지 않았을까?”
포옥경이 의자를 벗어나 허공을 걸으면서 웃었다.
“그것이 협객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자들의 본색! 약자를 핍박해 세상을 어지럽히지만, 강자를 보면 꼬리를 말고 달아난다.”
허공을 나는 것은 어렵다.
포옥경처럼 천천히, 걷듯이 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은교교는 백호위의 빙검을 날려버리고, 염마의 불로 그의 몸을 태우려 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 순간, 포옥경이 은교교의 앞에 내려섰다.
내려서면서, 포옥경은 은교교의 불을 옆으로 쳐냈다.
쾅!
은교교가 혼돈폭강을 쏘았다.
포옥경은 똑같은 혼돈폭강을 펼쳐 다시 그녀의 힘을 막았다.
“은교교! 장난은 여기까지만 용납한다. 백호! 이 정도 도왔으면, 옥현신개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야 하지 않겠나?”
백호위가 기합을 내질렀다.
“으아아!”
그의 빙검이 옥현신개를 찔러갔다. 옥현신개가 몸을 틀지 않았더라면, 왼쪽 어깨가 아니라 목이 그대로 찔렸을 것이다.
“옥현 장문인!”
“남의 상처에 놀랄 틈이 너에게 과연 있을까, 적암의 마녀?”
포옥경이 활짝 웃었다.
“본래 내 종이 되었어야 할 계집. 나와 백 초 정도 싸울 자신이 있다고 했나? 검증해 볼까?”
쿠오오오오!
포옥경의 온몸에서 불길하기 그지없는 힘이 솟았다.
혼돈폭강과는 달랐다.
지옥문의 무공이 아니었다.
붉은 빛이 눈부시면서도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제갈청미가 그 무공을 알아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혈봉황. 황실에서만 전해진다는 파천봉황신공이 분명합니다.”
“제갈의 계집이라 과연 똑똑하다. 다시 묻는다, 은교교? 아직도 백 초를 버틸 자신이 있느냐?”
“물러낫!”
은교교가 양손을 뻗었다.
혼돈폭강의 기운을 담은 두 갈래 장력이 포옥경의 가슴을 좌우에서 동시에 노렸다.
포옥경은 오른손을 휘둘러 두 기운을 모두 날려버렸다.
콰-쾅!
폭음과 흙먼지 속에서, 포옥경은 손이 은교교의 목을 쥐었다.
“결과를 보니 단 일 초도 버티지 못하지 않느냐, 은교교?”
목을 잡혀 위로 들린 은교교의 두 발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크윽! 나, 나를 죽여도 달라질 것은 없다.”
“죽여? 너를? 내가 왜?”
“일 년 동안, 일로종횡의 의지와 조화의 마음이 세상에 퍼졌다. 회유해도 넘어갈 사람은 이제 정도 무림에 없다.”
“너는 심마문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하하하.”
포옥경의 웃음이 은교교의 말문을 막았다.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세뇌될 거야.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 특히 제갈청미와 너는 쓸모가 아주 많을 거 같군. 그래서 기쁘다.”
포옥경은 강했다.
그는 지옥문 적암마계의 계주이자, 황실 비전의 파천봉황신공마저 익혔다.
‘그래도 그가 있다면?’
은교교는 사도명을 생각했다.
사도명을 생각하자, 은교교는 뿌듯하면서도 아쉬웠다.
대체 어디에 있을까?
왜 이런 상황에도 나타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도명이 있어도, 포옥경의 이 터무니없는 강함은?!’
혼돈마인들이 모조리 진법의 안으로 들어왔다.
소형 진법을 펼쳐 저항했지만, 연합군은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끝인가?’
태양은 동쪽 하늘의 중간쯤에 떠올랐다.
패배가 눈앞에 있었다.
“은 소저!”
연자강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려 했지만, 스무 명의 혼돈마인이 동시에 그를 막았다.
“너희는 졌다.”
포옥경의 말에 은교교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래. 패배한 모양이네. 하지만 실패하지는 않았다.”
“하하하. 패배와 실패가 다르다 말하는 거냐?”
은교교의 눈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
“조화의 마음이 세상에 남는다. 우리는 다시 도전할 거다.”
포옥경이 빙그레 웃었다.
“하하하 과연 대단해. 은요진이 낳은 딸답구나. 은요진은, 귀엽고 당돌한 아이였지.”
“!”
“칠음절맥을 타고 나서 스물을 넘길 수 없었다. 하도 영특하고 쓸 만한 아이여서 도와주었다.”
은교교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을 잡혔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 어머니를 안다고? 도와줬다는 건 무, 무슨 소리냐?”
“죽을 생명을 연장시키는 게 쉽진 않았다. 하하하. 설청산이 그 아이의 동정을 깨뜨리지 않았다면, 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녀석은 오래 살 수 있었겠지?”
은교교의 눈이 커졌다.
포옥경이 빙그레 웃었다.
“궁금하냐? 내 눈을 봐라. 심마의 노예로 살다 보면 알게 될 거다. 존좌께서 이으신, 태초의 맹세와 의지까지 일러주마!”
포옥경의 눈이 빛났다.
심마문에는 삭혼과 최혼의 술법이 존재한다.
은교교는 조화심법을 끌어올려서 심마에 저항했다.
“소용없다. 혼돈안은 내공이 약한 자가 내공이 강한 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 그렇다면 차라리….”
은교교는 내공을 움직여, 스스로 심맥을 끊으려 했다.
포옥경이 먼저 오른손을 움직여서 그녀의 마혈을 짚었다.
“안 되지. 딸이라면 어미의 운명을 좇아가야지 않겠느냐?”
포옥경의 미소는 요사했고, 사악했다.
“영원히 살게 해 주마, 나의 노예로! 애초부터 너는….”
포옥경의 눈에서 온갖 색채가 뒤섞인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은교교의 눈을 통해 흘러들어가 그녀의 온몸을 침습했다.
“적암의 마녀였잖느냐? 내 노예가 될 운명이었어.”
드드드드드드드!
땅이 또다시 흔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아까보다 진동이 크다. 이건 단순한 지진이 아냐.”
포옥경의 눈빛이 변했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났다. 힘이… 올라온다. 이 힘은… 불길하다.”
콰아아-아앙!
땅의 한 곳이 폭발하며, 눈부신 금빛의 광채가 솟구쳤다.
곧장 위로 솟구친 빛은, 하늘로 계속 오르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그대로 올라가 우주의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 천지일명을 깨닫고도 계속 무엇인가가 허전했다.
백호위가 금빛의 광채가 만든 바닥의 틈을 가리켰다.
“저기 누군가 올라옵니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 파천사해와 우주오검! 검성이 남기신 두 갈래 무공 중 우주오검만이 합쳐졌다는 점이 아쉬웠다.
사람 한 명이 그 구멍으로부터 둥실 떠올라서 나왔다.
연자강이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 자식아!”
법허와 화운악, 서문용맹, 제갈청미도 모두 그를 알아보았다.
은교교의 뺨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무사했군요.”
사도명은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둥실 허공에 떠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렸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매우 안락해 보였다.
“그 신법은 뭔가요, 천부? 우리가문의 삼안무류가 아닌데도 훨씬 더 자유롭게 떠 계시다니.”
제갈용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도명은 연자강을 보았다.
연자강의 주변에는 스무 구의 혼돈마인들이 모여 있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
사도명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미간을 찡그리는 행동조차 숫제 없었다.
그런데도 돌연 연자강의 주변에 있던 혼돈마인들의 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례로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혼돈마인의 폭발은 마치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갔다.
퍼퍼퍼퍼퍼퍼펑!
놀란 포옥경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백호! 주작! 저 자식을 막아!”
백호위와 주작위가 땅을 박차고 날아갔다.
전력을 끌어올리며 각각 사도명의 왼쪽과 오른쪽을 노렸다.
사도명은 그 중, 왼쪽으로 다가오는 백호위의 눈을 보았다.
“괴인들의 이름은… 음, 혼돈마인이라 불린다고?”
퍼퍽!
미미한 소음 두 번이 울리며, 백호위와 주작위는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했다.
포옥경의 눈이 커졌다.
그는 사도명의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했다.
포옥경이 보기에, 백호위와 주작위는 스스로 사도명의 발아래에 쓰러진 것 같았다.
“어, 어떤 방법을 쓴 거냐? 사, 사술이라고 쓰는 거냐?”
사도명의 시선은 계속 백호위를 향하고 있었다.
백호위가 부들부들 떨면서 포옥경을 향해 말했다.
“부, 부윤 대인께 고합니다. 무, 무엇인가가 제 머릿속을 훑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저는 혼돈마인이라는 이름을 말한 적이 어, 없었습니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반야대능력 안에 혜광심어라는 수법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 상대의 마음에 전달하는 전음술. 이걸 역천으로 돌리면 어찌 될까? 상대의 생각을 내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된다.”
포옥경의 눈이 더욱 커졌다.
법허가 놀라서 소리쳤다.
“맹주! 밀 소림의 인연을 이으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