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물아불이(物我不二)
사도명은 어둠 속에 있었다.
빛은 앞쪽 멀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한 줄기밖에 없었다.
빛 속에 소년이 한 명 보였다.
맑은 눈을 가진 소년은, 빛이 내려오는 하늘 위를 계속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사도명이 소년의 옆으로 갔다.
“뭘 보는 겁니까?”
사도명은 소년이 누군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소년은 지금도 사도명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바로 불화였다.
소년의 모습을 한 불화가 오른손을 들어 높은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가 보였다.
“저기, 내 친구일세.”
불화의 역천반야대능력은 사도명이 익힌 창천사해와 기묘하게도 닮은 모습이었다.
서로의 사이에 거울을 두면 서로가 구분되지 않을 터였다.
사도명의 공격을 불화는 공격으로 중화시켰고, 불화의 공격 역시 사도명이 공격으로 중화시켰다.
방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명 사이에서 힘의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건 마치 부처의 가르침인 윤회의 모습 같았다.
“친구가 육조가 되자, 나도 불문에 귀의했지. 친구를 빼앗아간 부처가 정말로 그렇게 위대한지, 알아보고 싶었으니까.”
“알아보셨습니까?”
“불법이라는 게 배울수록 똥막대기이더구나. 세상은 가난하고, 슬프고, 배곯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어지러운데, 쓸데없는 인과 연만 잔뜩 늘어놓고서, 그 속에서 다시 윤회하면서 돈다 하더구나.”
불화가 빛에서 걸어 나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강해지겠노라고. 부처보다 더욱 강해져서 내 친구를 되찾아오겠노라고.”
“강해지셨습니까?”
“역근과 세수를 익히고 대반야능력을 역천으로 바꾸었지.”
불화가 빙그레 웃었다.
“모두가 인정했어. 나야말로 소림제일인. 이후 소림사에서는 누구도 나를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내 친구조차 인정했다니까.”
“친구분은요? 되찾으셨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엔 실패했지. 그래서 결심한 거다.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 하자! 언제든, 반드시 나는 이길 테니까. 그래서 여기에 스스로를 묻었다. 밀소림을 만들고, 나 자신을 묻은 채 기다렸지.”
불화는 사도명을 보았다.
“내가 멈춘 세월은, 혜능의 후예가 역천반야대능력을 깨뜨리면 다시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네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제가 혜능님의 윤회전생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라면 왜 저기에 내 친구가 있을까?”
불화는 자신이 지금 막 벗어난 빛의 위쪽,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부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오자 나타났다. 그 전엔 한 번도 보지 못했었지.”
사도명은 부처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빛 속으로 들어가서, 하늘을 보며 양손을 들어 합장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빛 속에 있던 부처가 사도명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어떤 질문이 하고프냐?”
“혜능 님이 맞으십니까?”
부처의 상이 아래로 내려왔다.
천천히 내려와 바닥에 서더니, 환한 빛 속에서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차츰 변해갔다.
불화와 같은 나이!
부처를 닮은 소년이 불화를 보며 방긋 웃었다.
“나의 친구이자 제자의 앞에서 어찌 부인을 할까? 나는 확실히 그런 이름으로 불렸었다.”
사도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불화, 그리고 혜능의 환생이 존재하는 이곳이 현실일 수는 없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내공 싸움의 와중!
그 속에서 오묘한 정신의 작용으로 나타난 환영이 분명했다.
“저는 왜 여기 있습니까?”
사도명이 불화를 힐끗 본 후에 다시 혜능을 보았다.
“정말 저분의 생각처럼, 제가 귀하의 환생이기 때문입니까?”
혜능이 빙그레 웃었다.
“계곡의 물과 바닷물은 같은 물이다. 하지만 또한 다르니 그 구분이 무슨 의미이랴?”
“제가 환생이 아니라면….”
사도명은 다시 불화를 보았다.
“왜 제가 저분과 싸우고 있는 이때, 이와 같은 환영이 일어나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이 환영 같으냐?”
“현실은 아니니 당연히 환영일 것 아닙니까?”
“현실이 또렷하지만 범천의 꿈처럼 한낱 미몽인데, 그 두 가지가 잘도 구분되더냐?”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불화를 보며 말했다.
“선문답 속의 깊은 도리는 제가 깨우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군요.”
“무엇을 알겠단 거지?”
“저는 혜능 님의 환생이 아닙니다. 이건 저의 꿈도 아니고요.”
불화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의 손과 사도명, 그리고 혜능을 바라보았다.
“네가 일으킨 환영이 아니라고? 네가 와서 내 친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그럼 자네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혜능이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起心)!”
불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혜능이 읊은 구결은 그가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혜능! 친구여.”
“있어야 할 곳이 아니어도, 마음이란 일어나는 법이지.”
혜능이 빙그레 웃었다.
“불심을 내가 자네에게 전하려 했는데 어찌 외부의 사람에게 있을까? 마음은 스스로 발(發)하며, 발하지 않는다면 또한 청정함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화의 눈이 커졌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혜능을 보며 물었다.
“자, 자네는 나를 내버려 둔 것이 아니었나?”
“늘 자네와 함께 있었네. 여기로 내려와 자네를 찾던 후예들의 마음에 속에도, 난 있었어.”
혜능은 빛 속으로 돌아갔다.
그 빛에 휩싸여 흐릿해져 가면서도, 그는 빙그레 웃었다.
“인연의 끈은 넓지. 그러니 세상을 구하겠노라 찾아온 저 청년의 마음속에도 역시 나는 있네.”
혜능이 둥실 떠올랐다.
다시 부처의 형상으로 돌아가 빛을 거슬러 올라가는 혜능을 보면서 불화가 외쳤다.
“나, 나를 혐오하지 않았었나? 사내면서도 같은 사내를 은애한 나를 미워하지 않았었나?”
“자네는 좋은 친구였지. 자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늘….”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혜능의 모습도, 그가 변했던 부처의 상도 어느 순간 완전히 보이지 않게 없어졌다.
“기껍고 매우 좋았네.”
**
불화가 눈을 떴다.
사도명은 조금 전에 이미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환영이 아니었지?”
불화가 물었다.
사도명은 자신의 두 손과 맞닿은 불화의 양손을 한 차례 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보았습니다.”
“내 친구는 나를 버리지 않았네. 늘 내 곁에 머물면서,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군.”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사도명은 자신과 불화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힘과 힘의 윤회를 보았다.
“계곡의 물과 바다의 물이 다르지만 또한 다르지 않다면, 노선배의 힘과 저의 힘도 그럴까요?”
사도명의 눈이 빛났다.
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야대능력의 오의가 바로 그것일세. 만물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인지하는 것. 일의관통! 모든 것에 의한 모든 것의 인지!”
“아!”
“나는 그것을 뒤집었지. 역천반야대능력. 모든 다른 것이 또한 같다면, 모든 같은 것은 오히려 다를 수 있다는 궤변. 그리하여 역천반야대능력에는 소림의 내공을 흩어놓는 효과가 생겨났어.”
불화의 얼굴이 핏기를 잃었다.
“나를 찾아 밀소림으로 왔던 후예들. 고통스러웠겠지? 역천대반야능력이 내공을 산산조각 내는 고통을 참으면서, 그들은 줄곧 내게 깨달음을 알려주려 했겠지?”
“이제는 알겠습니다.”
사도명의 말에, 불화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무얼 알겠단 건가?”
“혜능의 윤회전생은 제가 아닙니다. 아마도 그분은….”
불화는 사도명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천하는 넓고 천상은 무변합니다. 한 사람이 윤회 전생하여 동시대에 태어나고, 그 윤회가 스스로에게 도를 깨치도록 해주는 일도 불가능만은 아닐 겁니다.”
불화가 부르르 입술을 떨었다.
“혜, 혜능이 나의 윤회전생이라고? 그래서 보자마자 나는 그에게 마음이 끌린 것일까?”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계곡의 물이 바다로 가지만, 바다의 물 또한 다시 돌아옵니다.”
사도명의 눈이 빛났다.
“끝없는 윤회.”
“아,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화의 이마에서 환한 빛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법명처럼 부처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사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합장했다.
“나,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난 것이었나? 혜능을 만남으로써 불법을 만나고, 혜능은 나를 만남으로써, 구분 없음을 깨닫도록 되어 있었던 인연이었나?”
“어쩌면 저 역시.”
사도명이 말했다.
“천하가 어지럽습니다. 삼대재액이 모두 나타나리란 예언의 시대가 마침내 닥쳤습니다.”
그와 불화 사이에서 오가던 내공의 생성과 소멸이 어느 순간 기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생기심! 마음이 일어납니다. 노선배와 저 사이 힘의 윤회를 단숨에 끊는 발심(發心)을 하였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창천사해는 모두 하나군요. 일어나고 사라짐이 또한 구분되지 않습니다.”
쿠오오오오오오!
사도명의 마음이 힘의 생성을 멈추고, 소멸도 같이 멈추었다.
“모두가 부처님의 안배인 것이군. 아미타불. 혜능이 있고 내가 있듯, 자네가 있어 나는 깨닫고, 내가 있어 자네는 천하를 구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니! 아미타불.”
불화가 눈을 감았다.
그의 몸 전체가 환영 속의 혜능처럼 눈부신 금빛에 휩싸였다.
“자네는 반야대능력을 얻었네. 그리고 그를 뛰어넘었으니, 바로 무상(無上)의 대능력일세.”
생성과 소멸이 자유로운 의지!
사도명이 천장을 보았다.
그곳은 위에서부터 무너진, 크고 무거우며 끝이 없을 정도로 겹겹이 쌓인 돌로 막혀 있었다.
“대방 장문인이 저와의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지상에서는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억겁! 어쩌면 일수유!”
불화의 이마에 빛이 모였다.
모인 빛은 더욱 휘황하게 빛나더니 하나로 응축되었다.
“내가 살아온 모든 윤회가 영겁이고, 일수유구나.”
불화가 막힌 천장을 보았다.
그의 이마에서 눈부신 빛이 솟구쳐 오르며 막힌 바위 사이에 길을 뚫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빛 속에서 불화의 몸이 천천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사도명. 모든 것이 인연법에 따라서 돌고 도는 것이니! 명심하거라. 물아불이(物我不二)!”
불화의 마자막 목소리는, 휘황한 빛 속에서 들려왔다.
“모든 재액의 해답은 어쩌면 이 깨달음 속에 있을지도!”
**
싸운 지 나흘이 지났다.
지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무림연합군의 구성원들은 모두 고수였다.
하지만,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나흘 동안의 싸움을 감당할 이는 드물었다.
“마침내 오늘이군요. 천하에 선언했던 날입니다.”
은교교가 점창파 제자를 공격하던 혼돈마인의 왼팔을 날려버린 후, 법허에게 말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에겐 손가락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쉴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적암의 마녀인 은교교가 멈추면 상대적으로 내공이 떨어지는 십구성좌 휘하의 일반 제자들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아미타불. 저들은 정말 지치지도 않는구려.”
혼돈마인들은 지치지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머리를 뽑고 두 팔과 두 다리를 잘라낸 후에야, 그들은 더 이상 무림연합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연합군에서는 벌써 스무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옥문의 혼돈마인은 절반 이상이 동작 불능이었다.
숫자상으로는 연합군의 우세.
하지만 전세는 이미 지옥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연합군은 인간이어서 지쳤고, 혼돈마인은 결코 지치지 않았다.
“해가 뜨는군.”
포옥경은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백호위와 주작위가 관병들이 시켜 마련한 의자였다.
“한 시간 안에 결판나겠지?”
“놈들의 희생이 적은 이유에는 옥현신개의 활약이 큽니다.”
백호위가 대답했다.
“개방의 타구봉진을 소림의 백팔나한진에 응용할 줄이야. 초월나한타구진 때문에 놈들의 희생이 스무 명에서 그친 겁니다.”
“진법이 깨지면 너는 옥현신개의 목을 가장 먼저 따라, 백호.”
“존명.”
“너는 법허의 목이다.”
포옥경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작위를 보았다.
“부맹주를 죽여 사기를 떨어뜨려라. 제갈청미와 적암의 마녀는 내가 맡는다.”
포옥경이 빙그레 웃었다.
“특히 마녀에게 꼭 전해줘야 할 말이 있지. 하하하.”
드드드드드-!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지하 깊숙한 곳, 무슨 일인가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포옥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서두르자. 예감이 그다지 좋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