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적암마계
바람은 언제나 분다.
하지만 소실봉의 아래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자연이 만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옷과 옷이 스치는 소리.
날카로운 병장기가 서로 부딪치거나, 바닥에 끌리는 소리.
“적입니까?”
대방 선사의 물음에 법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다쳤는가? 평소라면 듣고도 남을 기척이건만.”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숲의 무덤은 이유 없이 만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방 선사가 녹옥불장을 든 손을 높이 들었다.
내공을 주입하자 녹옥불장의 끝에서 진초록으로 빛나는 빛이 튀어나왔다.
빛은 하늘로 올라가서 터졌다.
퍼어-어어엉!
진초록의 빛이 사방을 밝히며 퍼져나갔다.
그 빛의 모양새는 전체적으로 가부좌한 부처의 상을 닮았다.
“밤이니, 수백 리 밖에서도 보일 겁니다. 제자들이 올 겁니다.”
“그 전에 적들이 먼저 모일 테고, 아미타불.”
법허의 이마에서 계속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당황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사도명과 단둘이 올 때부터, 이런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적은 바보가 아니었다.
“적이 올 거라고는 짐작은 했네만, 그때 맹주가 없을 거라고는 짐작할 수가 없었지.”
법허가 쓰게 웃었다.
바람 소리는 이제 두 사람의 바로 주변을 감고 있었다.
왼쪽 수풀 사이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사람의 형상이 분명한데,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르-!
온몸이 타고 있었다.
법허보다 대방 선사가 그들의 정체를 먼저 알아보았다.
“가장 어둡고 끔찍한 세 개의 세상, 적암마계!”
대방 선사는 삼 년 전, 소림사를 공격했던 적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큰 내상을 입었고, 그 상처를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화괴입니다. 지옥염관의 불이 하루종일 몸을 태우기에, 화괴는 그 고통을 참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피를 마십니다.”
“인간이 아니란 뜻이지?”
오른쪽 수풀 사이에서도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온몸이 얼음인 괴인들.
“빙마입니다. 지옥빙잠의 피로 온몸의 피를 대체했기에,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사흘에 한 번씩 산 자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대방 선사는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은 중앙의 수풀을 보았다.
“하지만 삼 년 전의 싸움 때, 가장 끔찍했던 건 저 두 종류의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수풀이 흔들렸다.
단순히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부분이 동시에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아미타불.”
대방 선사의 불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온몸이 피고름으로 뒤덮인 괴인들이 중앙에서 걸어 나왔다.
“저주혈강! 마공의 이름이며 동시에 저 괴물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저 피고름은 독이며, 모든 걸 부수는 강기입니다.”
화괴와 빙마와 저주혈강이 각각 끔찍한 세상을 형성한다.
그 세 개의 세상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적암마계였다.
“삼 년 전에 소림 제자 대부분은 저들의 손에 죽임 했습니다.”
고오오오오-!
대방 선사의 온몸에서 강력한 패기가 솟구쳤다.
소림의 내공 중 가장 패도적이라는 서천여래의 공력이었다.
그는 삼 년 전에 있었던 싸움으로 큰 내상을 입었다.
내상은 지하에서 불화의 옆으로 다가가면서 더욱 심해졌다.
지금 대방 선사의 몸 상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럼에도 대방 선사는 겁을 먹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소림의 방장이었다.
자신의 문파를 무척 아꼈다.
“사숙께서 저들을 불러들이셨습니까? 맹주와 함께 이 소림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겠노라, 세상에 선언하셨습니까?”
대방 선사의 입과 코에서 검은 핏물이 흘렀다.
놀란 법허가 소리쳤다.
“물러나게. 억지로 내공을 끌어 올려서 내상이 도지고 있어.”
“고맙지 뭡니까? 죽음의 순간 앞에서 동문 제자들의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맞서는 방식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달아나고, 어떤 사람을 똑바로 마주 본다.
고통과 두려움에 굴복하는 사람은, 소림사의 방장이 될 수 없다.
대방 선사는 주변에서 몰려오는 세 종류의 괴물을 보며 물었다.
“제가 삼 년 전, 저 괴물들의 손에 동문을 잃고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아십니까?”
“나도 소림의 제자일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네.
법허가 좌불등천을 끌어올렸다.
“개인의 원한은 작으나 대의는 드높지.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동문의 원한을 갚고, 소림의 제자로서 천하를 구하는 일에 헌신하겠노라는 결의. 틀렸는가?”
- 하하하. 맞으십니다.
- 틀리실 리 있겠습니까, 법허 사숙조?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법허에게, 그리고 대방 선사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괴물들의 뒤.
낡은 불문 가사를 걸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몸에 묻어있는 흙을 보고, 법허는 소림의 제자들이 어디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숲속의 무덤! 그곳에서 귀식대법으로 신체를 정지시키고 녹옥불장의 빛이 터지기만을 기다렸던 것인가, 소림이여? 아미타불.”
즐비했던 무덤의 비밀이 비로소 풀렸다.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어, 생존자의 기척도 없었던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소림의 이름에 불명예! 그것만이 두렵습니다, 사부님!”
법허가 놀라서 소리쳤다.
“대운! 대성!”
괴물들의 뒤에서 다가오는 두 명의 승려는, 법허가 오십여 년 전 직접 가르쳤던 제자였다.
“푸하하.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소림 제자들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소림이 천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이 아니겠는가?”
법허의 몸이 회전하면서 허공 높이 떠올랐다.
천중팔불 중의 좌불등천이 사방으로 힘을 내쏘며 펄쳐졌다.
콰콰-콰콰콰콰쾅!
놀랍게도 법허는 다섯 명의 괴인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중에는 화, 빙, 강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저주혈강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맹주의 천지일명에서 배워낸 좌불등천이다. 당해낼 수 있겠는가, 괴물들?”
대방 선사도 백보신권을 이용해 화괴와 빙마를 각각 두 구씩 날려버리며 외쳤다.
“더욱 강해지셨군요, 사숙! 맹주님은 더 강합니까?”
퍼퍼퍼펑!
동료들이 날려가는 것을 본 화괴와 빙마가 괴성을 토해냈다.
“캬앗!”
“크아앗!”
저주혈강은 독기와 강기의 덩어리인 피고름을 뚝뚝 떨어뜨리며 대방 선사와 법허에게 달려들었다.
“어림없다.”
“저희가 있습니다! 삼심삽(三十三) 목인천강진을 펼치겠습니다.”
소림사의 저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칠십이 종의 절기로 무장한 소림사의 제자들!
그들은 삼 년 전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적암마계의 괴물들과 싸우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법허는 비로소 대방 선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강하지, 맹주는!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건 상황을 읽어내고 준비하는 능력일세.”
법허가 오른손을 들었다.
당문이 자랑하는 천리폭죽이 그 손에서 올라가 허공에서 터졌다.
퍼어-엉!
녹옥불장과는 다른 종류의 신호! 찬란한 불꽃이 하늘을 채웠다.
법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연합군이 선언한 결전의 날을 지켜줄 의무가 지옥문에 없다면, 우리에게도 당연히 그 날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겠지?”
슈르르-르르!
어디선가 미약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공 하나가 멀리서부터 호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리고 세 무리의 괴인들 중, 가장 흉포한 저주혈강의 가장 중앙에 떨어졌다.
처음엔 소리가 없었다.
그저 강력한 빛과 같은 기운이 공으로부터 개화하더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화괴와 빙마는 강했다.
하지만 저주혈강은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욱 강했다.
소림의 제자들은 한 명이 저주혈강 한 구를 상대하는 일에도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때 빛이 일어났던 것이다.
멀리에서 날아온 공에서 나타난 빛은 열 구의 저주혈강의 몸뚱이를 단숨에 뚫어버렸다.
꽈-드드등!
뇌성과 같은 폭음은, 저주혈강 열 구가 산산이 조각난 후에야 모두에게 들렸다.
소림제자들은 경악했다.
대방 선사조차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저런 힘이? 그보다도, 법허 사숙.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 힘은 분명히…?”
“맞네. 적암마계의 것이지. 또한 이젠 저 분의 것이기도 하고.”
법허가 어두운 하늘을 표표히 날아오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쳐다보았다.
“삼대마문 중 심마문과 적암마계는 수백 년 동안 검성의 안배를 무너뜨리려 계략을 꾸몄지.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저렇게….”
수십 개의 공들이 주변 이곳저곳에 떨어졌다.
번쩌-어어억!
빛이 먼저 솟았고 폭음은 그 후에 퍼져나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소개하겠네, 장문 사질! 은령선자! 아니, 은령신녀.”
법허는 표표히 떨어져 내리는 은교교를 보며 웃었다.
“신녀는 적암의 마녀가 될 운명을 벗어났지만, 그 힘만은 고스란히 손에 넣었지.”
은교교가 펼친 작은 공은, 적암마계의 화, 빙, 그리고 강을 모두 합하여 만들어낸 덩어리였다.
힘의 공!
은교교의 양손이 화괴와 빙마, 그리고 저주혈강을 순식간에 부수자 소림 제자들이 소리쳤다.
“와아. 무림맹이다!”
“삼 년 전과는 다르다. 무림맹이 마침내 우릴 도우러 왔다!”
법허가 고개를 저었다.
“도우러 온 게 아냐. 우리 모두의 싸움.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돕는다.”
- 그 말씀이 옳소. 푸하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커다란 덩치의 노인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구양걸이었다.
권제 다운 커다란 손으로 단숨에 화괴를 박살내면서, 구양걸은 다시 한번 웃었다.
“크하하. 지옥문이 며칠 빨리 와서 소림사 주변에 매복하려 든다면, 우리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꽈아-앙!
세 번째의 화괴를 뒤로 날리는 구양걸의 뒤를, 한 구의 저주혈강이 노렸다.
하지만 피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저주혈강의 손은 구양걸의 등에 전혀 닿지도 못했다.
한 자루의 검이 저주혈강의 목을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이곳에….”
화운악이 검을 고쳐 잡으며 주변의 괴물들을 둘러보았다.
“무림연합군의 전력이 모두 왔다. 약속한 결전은 닷새 후. 아니, 날이 밝으면 나흘인가? 그 전에 모든 걸 정리한다.”
“캬아앗!”
“캬옷!”
화괴가 불을 뿜고, 빙마는 냉기를 뿜었다.
저주혈강이 피고름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화운악은 검을 쥔 채로 자신을 노리는 그들을 보기만 했다.
퓨퓨퓨-푹!
차갑고 빠른 흐름 수천 개가 홀연 일어나자, 화괴의 불이 꺼지고 빙마의 냉기더 사라졌다.
저주혈강의 피고름은 스스로에게 역류해 그들 자신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크아악!”
“한 번 당하면 억울하지만, 두 번 당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맹주?”
만천화우를 펼쳐 수천 개의 암기를 적에게 박아 넣은 독제 당백룡이 법허를 보며 물었다.
“삼 년 전의 싸움에서 적암마계의 괴물을 파악했습다. 암기 하나하나마다 너희를 무력화시키는 약이 발라져 있죠.”
사방에서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구대세가의 고수들 역시 저마다의 특기를 선보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산 전체를 포위한 거지 떼였다.
“흘흘. 달아날 생각은 않는 게 좋다, 마졸들아! 이미 타구진이 펼쳐졌으니 달아나려다간 개처럼 흠씬 얻어맞을 것이다.”
현 개방의 방주인 옥현신개의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대방 선사가 털썩 주저앉았다.
“장문 사질.”
법허가 자신을 부르자, 대방 선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싸우다 다친 것은 아닙니다. 내상이 심해졌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기겠네요. 삼대재액을 무림맹이 또다시 막아냅니다.”
“하지만 이상하군.”
법허는 웃지 않았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늘 이곳에 연합군은 모두 모였네. 그런데 지옥문 마졸의 숫자가 왜 이것뿐이지?”
혼잣말을 마친 법허가 대방 선사를 보며 물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장문 사질? 지옥문이 이정도였다면, 대체 우리는 왜 일 년 동안….”
- 하하하하하!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러게. 너희는 왜 일 년 동안,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