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불화(佛花)
지하는 깊었다.
법허 선사의 말처럼, 가히 바닥이 없을 정도였다.
사도명은 계속 떨어졌다.
깎아낸 듯 아래로만 뻗어 있는 통로의 옆벽은 미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사도명은 돌아올 방법을 갖고 있었다.
서문세가의 삼극무령심공.
삼단전을 모두 이용하는 그 무공은, 신법으로 응용할 때 삼안무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세 갈래 힘이 삼태극을 만들어, 디딤대가 없어도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는 신법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나 혼자라면 돌아올 수 있지만 법허 선사와 함께라면, 그를 데리고 날아오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
그것이 사도명이 혼자 불귀옥에 들어온 이유였다.
‘얼마나 더 떨어질까?’
사도명은 엄지와 중지를 계속 퉁겼다.
탁! 탁! 탁!
되돌아오는 반향을 들으며, 바닥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아직도인가?’
후-웅!
미약한 반사음이 사도명의 귀를 때렸다.
“바닥이냐?”
사도명은 삼극무령심공의 세 갈래 힘을 발아래에 회전시켰다.
삼태극의 소용돌이.
서로 밀치고 당기는 힘!
사도명은 한참 동안 떨어졌음에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사뿐히 착지했다.
파-웅!
넓게 펼쳐져 낙하의 충격을 흡수한 삼태극의 힘은 다시 진기로 분해되어 사도명의 세 군데 단전으로 각각 흡수되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한 올의 빛조차 내려오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사도명은 왼손을 들어 축융지환에서 빛을 만들었다.
어둠이 물러갔다.
사도명은 드러난 지하의 풍경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도대체…?”
바닥이 온통 뼈투성이였다.
“사람의 뼈가 분명하다.”
사도명이 사람의 뼈와 동물의 뼈를 착각할 리 없었다.
축융지환을 가까이 가져가서 뼈의 흔적을 살핀 후, 사도명은 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했다.
“참선한 흔적이 무릎뼈에 남아 있다. 승려의 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소림사의 승려야.”
다른 뼈도 같았다.
주변에 흩어진 뼛조각들은 모두 살았을 때 승려의 것이었다.
“풍화된 정도가 각각 다르다. 어느 것도 같은 시대의 것이 없다. 가까운 것은 일백여 년, 더 오랜 것은 수백 년이 넘는다.”
사도명은 뼈들의 흔적을 통해, 지하에서 벌어졌던 일을 추정해 보려고 애썼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마다 이곳에 승려가 들어와 죽었다.”
뼈의 흔적은 바닥에만 남겨진 것이 아니었다.
지하 공간의 한쪽에는 통로가 있었고, 그 통로에도 백골로 변한 시신들이 보였다.
“대를 이어가면서 소림사의 승려들이 들어왔고, 모두 저 통로를 들어가려고 노력했다는 건가?”
사도명은 통로를 향해 걸었다.
“어떤 이는 힘이 미치지 못해서 바로 죽고, 힘이 미치는 사람은 이 통로를 통해서 더 멀리까지 걸어갔던 모양이다.”
사도명의 추리가 맞았다.
걸어갈수록 백골로 변한 시신이 흩어진 거리가 점점 늘었다.
뼈에 남겨진 생전 내공의 흔적 또한 갈수록 강해졌다.
“통로의 안쪽. 지상에서 느꼈던 희미한 흔적은 저 끝에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저기에 있다. 그는, 여기에 시신으로 누워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다.”
통로는 갈수록 넓어졌다.
사도명은 처음에 허리를 굽히고 걸었지만, 나중에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걸을 수 있었다.
처음에 희미했던 기척이 갈수록 또렷해졌고, 통로도 밝아졌다.
어디에서 나오는 빛일까?
“법허 선사와 느낌이 같다!”
사도명은 통로의 꺾어지는 지점을 보면서 혼자 말했다.
느낌이 같다는 건 같은 종류의 내공을 지녔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명은 통로의 끝에 있는 사람이 소림의 승려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옳았다.
꺾인 통로를 돌아서자, 한 명의 승려가 가부좌를 한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사도명을 보고 놀라지 않았고, 사도명 또한 그를 보고 전혀 놀라지 않았다.
통로를 걸어오면서 사도명은 계속 승려의 존재를 느꼈었다.
승려 또한 다가오는 사도명의 존재를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사도명이 놀란 것은 그 승려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고난 후였다.
서 있는 사람은 사내였다.
피부가 더할 나위 없이 희고, 긴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길었고, 입술이 타는 듯이 붉었다.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다.
이목구비가 여자보다 고와, 기묘한 요염함을 풍겼다.
사도명이 놀란 이유는 그 사내가 곱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내는 호흡을 하지 않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 혈색이 선명한데도, 그 아래에서 박동쳐야 할 심장이 정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느껴지지 않았다.
사도명이 보는 건 분명히 승려와 사내였지만, 기척이 느껴지는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한 명이었다.
사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산 것이 아니었다.
“대체 뭐지?”
사도명이 혼잣말로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혼잣말이건만, 승려가 대답했다.
“빈승은 소림사의 대방이오.”
대방선사.
사도명은 분명히 숲속에서 그런 이름이 적힌 무덤을 보았다.
“장문인이십니까? 돌아가시지 않으셨군요.”
“소림의 대를 끊고 편히 열반할 수는 없는 노릇. 소림의 방장에게는 마지막 임무가 있다오.”
대방선사가 물었다.
“시주는 뉘시오?”
“사도명입니다.”
“무림태자?”
“지금은 설 맹주의 뒤를 이어 무림맹을 맡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대방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이 무사하구려. 법허 사숙은 어떠하오?”
“지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만 불귀옥으로 내려왔습니다.”
“잘 됐소. 그렇다면 무림은 다시 살아날 테지? 반드시 삼대재액을 막아낼 수 있을 거요.”
“일부러 가짜 무덤을 숲속에 만드셨습니까?”
“나는 꽤 다쳤소. 곧 무(無)로 돌아갈 테니, 조금 더 일찍 무덤을 만든들 무슨 상관이겠소?”
“장문인!”
“하지만 그냥 눈을 감을 수는 없었소. 소림의 장문인에게 주어진,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오.”
대방선사가 가부좌한 채로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강한 흡입력이 그의 장심에서 뻗어나갔다.
“살아남은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몸을 감추라 명했소. 소림의 명맥을 보존했던 거요. 만약 그들을 다시 불러내고 싶다면….”
어디선가 밝은 녹색의 옥으로 만든 불장 하나가 날아왔다.
“이것이 필요할 거요.”
녹옥불장.
소림사 최고의 권위를 지닌 신패가 대방선사의 손에 잡혔다.
“법허 사숙께 전해주시오. 다음의 의발은 청심에게 전할 터이니, 그것도 알려주시오.”
“장문인은요?”
“난 나갈 수 없소.”
“저 사람 때문입니까?”
사도명은 여전히 요염함을 쏟아내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계속 서 있었고, 여전히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깥의 백골들! 그분들은 혹시 소림사의 전대 장문인들입니까? 마지막 임무란 혹시 이 불귀옥에 들어오는 것입니까?”
“맞소.”
대방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의 장문인들은 모두 이분을 만나러 왔었던 거요.”
“…이분? 만나러? 이 사람은, 사람이 맞습니까?”
사도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요염한 사내는 젊어 보였다.
대방선사가 말을 높여 부를 정도의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사람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사내가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기에 전대와 전전대, 심지어 수백 년 이전의 사람들까지 모두 만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까?”
“밀소림의 창시자.”
대방 선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분은 육조의 제자로, 스스로를 불화(佛花)라고 부르셨소.”
“불화? 사내가 스스로를 꽃에 비유했단 말입니까?”
“본래 육조의 친구셨지. 육조께서 나무꾼으로 지내실 때, 불화께서는 친구이면서도, 육조를 무척 은애하셨소.”
“은애했다고요? 남자가 남자를 말입니까?”
**
소림의 육조(六祖) 혜능.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나무를 해서 삶을 꾸려갔었다.
어느 날, 나뭇짐을 팔다가 한 수행자가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
도를 얻고자 오조 홍인을 찾아간 혜능은 일로정진하여, 홍인으로부터 의발을 받아 육조가 되었다.
불화의 속명은 노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생김새가 고와 여자아이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혜능은 노심과 친했다. 그리고 노심은 혜능을 좋아했다.
타고난 성품인지, 아니면 놀림을 받다 보니 뒤바뀐 성품인지 노심조차 알지 못했다.
문득 깨달았을 때, 노심은 혜능에 대해 남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혜능이 육조가 되어 소림의 법통을 잇자, 노심은 그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스로 불화라는 법명을 만들어서 가졌다.
불화의 재능은 뛰어났다.
그는 달마역근경을 십 년 만에 통달한 뒤, 누구도 깨닫지 못할 거라던 반야대능력까지 익혔다.
심지어 그 힘을 변형시켰다.
“나와 내기하자, 친구여.”
어느 날, 불화가 혜능을 소림의 뒤쪽 암벽산으로 불렀다.
그는 무상반야대능력을 이용해 암벽의 지하로 끝도 없는 구멍을 뚫어내면서 웃었다.
“누가 강할까? 너를 내게서 빼앗아간 부처? 아니면 너를 향하는 나의 이 마음?”
불화는 자신의 친구였고, 이제는 스승이며,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싶어진 단 한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래에 스스로 나를 묻는다. 불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죽었으나 죽지 않고 너를 기다리마. 이겨 봐라. 네가 따르는 그 부처의 힘으로, 날 끄집어내 보아라.”
그렇게 말한 후, 불화는 스스로를 지하 깊은 곳에 가두었다.
그 날, 소림에서는 반야대능력에 대한 비급 후반부가 사라졌다.
불화가 가져갔던 것이다.
육조 혜능은 소림의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임무를 남겼다.
“불화를 구하라. 불화가 가져간 비급을 회수하라. 부처의 자비심이 그에게도 닿게 하라.”
명령은 장문인으로부터 장문인에게로만 이어졌다.
열반의 때를 예감하고 방장의 자리를 물려주면, 소림의 장문인은 불귀옥으로 가야했다.
그곳이 비밀의 소림사, 밀소림 전설의 시작이었다.
불귀옥의 지하는 죽었으면서도, 죽지 않은 불화의 힘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변했다.
역천반야대능력은 소림사에 전해지는 모든 공력을 무력화시킨다.
소림의 장문인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조금씩 불화의 역천반야대능력을 뚫고 들어갔다.
강한 사람은 길게!
약한 사람은 짧게!
소림의 역대 장문인들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불화에게 접근했다.
**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대에 이르러, 불화 님의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네.”
대방선사는 강했다.
그가 강하지 못했다면, 소림의 방장 자리를 물려받는 건 대방 선사가 아니라 법허였을 것이다.
“불화께서는 자신이 익힌 역천반야대능력의 모든 힘을 펼쳐, 이 지하에 장막을 펼쳤지. 그리고 힘이 다해 돌아가셨어.”
‘죽었다고? 그럴 리가.’
불화는 호흡하지 않았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도명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때론 현실과 괴리된다는 사실을, 사도명은 알고 있었다.
대방선사는 불화의 바로 옆에 놓인 한 권의 책을 집었다.
“불귀옥에 들어오면서, 나는 부처님께 빌고 다시 빌었소.”
책의 표지에 쓰인 일곱 글자가 대방선사와 사도명, 두 사람의 눈에 모두 선명했다.
<無上般若大能力>
“불화께서는 반야대능력을 역의 방향으로 익혔음에도 그 힘은 가공했소. 이것이야말로 반야대능력의 후반부! 밀소림에 전해지던, 무상반야대능력의 완성본이오.”
대방선사는 책자를 사도명을 향해 건네며 말했다.
“가져가시오. 도움이 될 거요.”
사도명은 비급을 받지 않았다.
그는 계속 불화만을 보았다.
대방선사가 자신이 가져가지 않고, 사도명에게 비급을 건넨 이유는 그의 말대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사도명은 비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육조 혜능은 비급을 되찾으라는 말과 더불어 다른 부탁도 남겼다.
- 불화를 구하라. 부처의 자비심이 그에게도 닿게 하라.
사도명은 대방선사에게 물었다.
“지금의 상황이 그에게 불심이 닿게 한 것입니까? 그렇습니까?”
대방선사의 눈이 커졌다.
단단한 손이 반야대능력의 비급을 든 대방선사의 손목을 쥐었다.
놀란 대방선사가 옆을 보자, 어느새 움직인 불화가 대방선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와 내기하자,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