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흑사련 회동
무림에는 정도 문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백도와 대치되는 개념인 흑도를 추구하는 방파도 존재한다.
흑도의 방파는 백도의 문파와 달리 쉽게 뭉치지 않는다.
살아가는 태도의 올바름보다 개인의 이득과 영달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이다.
그래서 구대문파와 일방, 그리고 구대세가로 대표되는 정도의 방파와 달리, 흑도에는 역사가 길고 세력이 큰 대표적인 방파가 존재하지 않는다.
흑도의 거대 방파를 굳이 찾는다면, 하남성에 있는 흑사련이 거의 유일무이하다 할 것이다.
하남성 등봉현에 숭산이 있다.
숭산의 소실봉에 오르면, 작은 숲이라는 이름의 사찰을 하나 만날 수 있다.
소림사!
정도 무림의 태산이고 북두!
하남성에 천하 최대의 흑도 방파가 존재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소림사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강력한 정도 문파 때문에, 흑도 방파는 오히려 작은 규모로는 생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햇살이 뜨거우면, 벌레는 큰 그늘 아래를 찾아 숨기 마련이다.
흑사련은 소림사의 그늘 아래에서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산하에 소규모 흑도 방파를 열두 개나 지녔다.
그리고 일곱 명의 공동 련주가 흑사련을 다스렸었다.
십자천하록은 흑사련의 칠대련주를 칠마라고 불렀다.
천하인들 중 가장 마기가 강하다고 알려진 일곱 명 중에서, 이제는 네 명만이 남아 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검마였다.
그는 무령마, 풍마와 함께 자신의 모습을 바꾼 채 동심맹의 일원으로 무림맹에 암약했었다.
검마는 결국 설청산의 손에 머리가 부서져 죽었다.
무령마와 풍마는 모두 사도명에게 죽임을 당했다.
칠마 중에 네 명이 남아 흑사련 칠대련주는 사대련주가 되었다.
대풍마(戴堸魔)는 산발한 듯 흩어진 머리카락이 새집과 같아서 그런 별호가 붙었다.
호마(虎魔)는 성품이 호랑이 같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사람의 살점을 뜯고 피를 핥기를 좋아해서 호랑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적발마(赤髮魔)는 언제나 머리카락이 붉었다.
죽은 사람의 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번뇌마(煩惱魔)는 칠마 중의 막내였다.
무공 수준만을 놓고 보면, 그는 칠마 중의 아래가 분명했다.
하지만 남은 사대련주 중에서는 그의 발언권이 가장 셌다.
마음 씀씀이가 잔혹하여, 더없이 마두다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죽임으로써 살인을 시작했다.
다음으로 아내를 죽였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다.
“어차피 세상은 번뇌다. 오래 살 필요가 있나?”
번뇌마는 살인을 좋아했다.
“살아간다는 건 고통.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제거해줄 때 행복하다.”
소림사가 흑사련을 제거하고 싶어했지만,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번뇌마 때문이었다.
번뇌마는 백팔번뇌를 거느리고 다녔다.
백팔번뇌란 번뇌마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독을 복용한, 일백팔 명의 노예였다.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
번뇌마가 나눠주는 해독약이 없으면, 그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소림사가 번뇌마를 해친다면, 결국 백팔번뇌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이 잔뜩 흐린 날에 흑사련의 인원이 총결집했다.
검은 태양을 상징하는 깃발을 하늘 높이 건 흑사련의 총단!
산하 열두 개의 흑도 방파를 다스리는 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칠마 중의 네 명, 사대련주도 왔다.
총단 내부, 커다란 대전에는 한창 음식이 차려지는 중이었다.
백팔번뇌는 백도의 공격을 방지하는 인질이었고, 동시에 평상시에는 노예였다.
청소하고, 음식을 차리고, 주변을 정돈하는 사람들은 모두 번뇌마의 백팔번뇌였다.
열두 명, 산하 방파의 방주들을 위한 자리는 이미 마련되었다.
련주들을 위한 네 개의 자리를 정돈하는 노예는 청년이었다.
검은 끈을 머리에 둘러 눈을 가린 청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매우 익숙하게 탁자를 정돈하고 음식을 차렸다.
이윽고 사대련주가 나타났다.
대풍마와 호마, 적발마가 먼저 나타나 자리에 앉았고, 가장 마지막에 번뇌마가 나타났다.
“형님들이 먼저 와 계셨군요. 시작합시다.”
번뇌마가 자리에 앉자, 흑화방주 요화빙빙이 앞으로 나섰다.
흑화방은 흑사련 산하 방파중 하나로, 기루를 운영하면서 정보 수집을 특기로 하는 곳이었다.
사 년 전 요하빙빙이 방주가 된 후, 흑화방은 최고의 중흥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닷새 전, 삼문협에서 결전이 있었습니다. 우리 흑사련 산하 강자들의 절반 이상이 참가한 대결전이었습니다.”
요화빙빙이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처참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참가한 사백칠십 명 중,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단 한 명도? 사백칠십 명이 모두 죽었다는 거냐?”
대풍마가 가시가 가득 돋은 철곤을 이용해, 산발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물었다.
요화빙빙은 고개를 저었다.
“백 명 가량만 죽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살아 있으면서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흑사련은 흑도의 마지막 도피처다. 백도 위선자들의 공격을 막아주는 곳. 그런데도 살아 있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풍마의 고함에, 호마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 얘기, 들어봤습니다.”
“뭘 들어봤다는 겐가, 아우?”
“무림맹주라는 자가 조화심이라는 수단을 부린답니다. 심지어 염라탈혼으로 이성을 녹여버린 염라마인들 중에서도, 조화심에 당해 놈들 쪽으로 변절해 간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번뇌마가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좋지 않군.”
대풍마와 호마, 그리고 적발마가 동시에 미간을 찡그렸다.
번뇌마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요화빙빙도 마른침을 삼켰다.
“백팔번뇌 중 열 명 정도에게 선물을 줄까 싶다. 적발 형님. 제 의견이 어떻습니까?”
백팔번뇌는 노예고 인질이다.
그들은 인간세상의 번뇌를 상징하기에 백팔번뇌라 불린다.
번뇌마의 선물이란 열 명을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고통 가득한 세상을 떠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번뇌마는 선물이라고 부른다.
적발마가 껄껄 웃었다.
“오랜만에 피 맛을 볼 수 있겠군. 말이 나온 김에 시작할까?”
적발마가 옆을 보았다.
그곳에, 눈을 가린 청년이 마지막 음식을 올려놓다가 적발마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저를 죽이려 합니까?”
“나쁜 기분을 풀려면, 붉은색의 피가 매우 효과가 크지.”
청년의 이름은 ‘화’였다.
그는 다른 번뇌 노예와 달리 스스로 백팔번뇌가 되었다.
“만약 련주님들이 저희를 죽이고 싶어지시면, 가장 먼저 저부터 베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백일 전에 스스로 자청하여 백팔번뇌가 되면서, 화는 사대련주를 향해 그렇게 말했었다.
번뇌마를 비롯한 사마는 껄껄 웃었다.
그들은 모두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고, 특히나 특이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흑사련은 지옥문에서 내려온 명령을 준비 중이었다.
삼문협에서의 결전!
지옥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두들은 한동안 참았다.
일이 바빠서 살인의 욕구도 그다지 솟구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네 명의 마두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진 것이다.
대풍마가 소리쳤다.
“그럼에도 지금은 살인을 참아야 할 때인 듯싶다.”
다른 세 명의 마두들이 일제히 대풍마를 보았다.
대풍마가 요화빙빙을 보았다.
“놈들의 전력을 말해 보라.”
“기존 무림 연합군에 더하여, 구대문파와 개방, 구대세가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대풍마는 세 명의 아우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이 드느냐?”
호마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삼문협에 보낸 전력은 우리 흑사련이 지닌 힘의 절반입니다. 십구성좌가 모두 모였다면, 남은 우리가 힘을 합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확실하군요.”
“항복해야 한단 겁니까?”
적발마가 미간을 찡그렸다.
“항복의 명분을 위해선 백팔번뇌의 피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이, 형님의 결론입니까?”
노예 청년 화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분은, 지금 항복을 논의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살인을 논하시는 겁니까?”
호마가 고함을 질렀다.
“저놈의 목만 벱시다. 놈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논의합시다.”
적발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팔번뇌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 수하는 어떨까요? 얼마 전부터 요화빙빙의 피로 내 머리를 물들인다면 어떤 기분일까, 자꾸만 궁금해지고 있었습니다.”
요화빙빙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칠마는 늘 피를 탐했었다.
기분이 나빠질 때 피를 보지 않으면 참아내지 못했었다.
“우리는 지옥문이 세상을 가질 거라고 믿었다. 숨어 지내야 했던 우리의 세상이 곧 올 수 있다고 믿었었다.”
“무림맹은 검마 형님과 무령마 형님, 풍마 형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대풍 형님.”
“그러나 우리는 오늘 알았다. 십구성좌가 완전히 뭉쳤다.”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은 아까도 했잖습니까?”
“삶을 도모하자. 백도가 뭉친 이상, 지옥문은 무림맹을 이겨내지 못한다. 우리….”
대풍마가 동생들을 둘러보았다.
“살아남자.”
“지옥문을 배신하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마가 물었다.
대풍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옥문이 우릴 배신하는 거야. 놈들은 약속해 놓고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잖느냐?”
“과연 그렇군요.”
적발마가 소리쳤다.
“하지만 백도에 항복하더라도, 저 자식의 목 하나만은 따고 항복합시다, 형님.”
적발마의 손은 노예 청년 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죽이겠다고 말했는데도 겁먹지 않습니다. 건방진 놈을 살려 놓으면, 백팔 노예들 모두가 장차 우릴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겁니다.”
“백도 놈들이 우릴 제거할 명문을 찾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그냥 항복하자고요?”
“살아남는다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젠가는 할 수 있다. 그게 설령 살인이라고 해도.”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번뇌마였다.
“미친 새끼들. 나중에 살인을 하기 위해서 지금의 살인을 미루자고 말하는 거냐.”
모든 시선이 번뇌마를 향했다.
번뇌마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말하고 있는 번뇌마!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음성이 거칠고 음산했다.
대풍마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태, 태황 존좌?”
“이야기는 잘 들었다. 지옥문을 배신하자는 간단한 내용을, 정말 길게도 말하더구나.”
“저, 저의 의도는 그러니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거기에 계신 줄을 모, 몰랐습니다.”
“나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훗날? 흡사 백도인처럼 말하는구나, 대풍마.”
“저는….”
날은 덥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풍마의 이마에는 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번뇌마의 눈이 적발마를 향했다. 그의 입이 말했다.
“베고 싶다? 그럼 베어라. 백팔번뇌를 죽이고, 새롭게 일천팔백 번뇌를 만들면 어떨까?”
“태황 존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흑사련 총련주인 대풍이 지옥문의 뜻을 배신하고, 백도에 투항하려 했다. 어쩌면 좋겠느냐?”
쓰컥!
둔탁한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대풍마는 호마를 보았다.
호마의 검이 자신의 배를 찔렀기 때문이다.
“네, 네가?”
“몇 번 생각했었소. 형님의 살점을 씹으면 어떤 맛이 날까? 오늘 그날의 궁금증을 해소하게 만들어주신 건 형님이오. 왜 지옥문을 배신하셨소?”
“나는… 나, 나는… 너희도 같이 살아남고자….”
호마가 검을 뽑았다.
상처를 막고 있던 검이 빠지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대풍마의 손에 들렸던, 가시 돋은 철곤이 둔탁한 소음을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피의 맛을 보고자 살아남겠다면, 지금 당장 그 맛을 보면서 살아가는 편이 훨씬 더 좋지.”
번뇌마가 적발마를 보았다.
“번뇌마는 지금 너의 행동을 기뻐하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서, 나는 번뇌마의 마음을 느낀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적발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 화는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다가오는 적발마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적발마가 태황에게 물었다.
“이놈의 피를 지금 제 머리에 적셔도 되겠습니까, 존좌?”
“푸하하. 아예 백팔번뇌의 목을 모두 베어라. 최후의 승리는 지옥문의 것이며, 백팔번뇌 따위의 인질은 이제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적발마는 청년 화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다가 멈추었다.
화가 홀연 사라졌기 때문이다.
적발마는 자신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진 화가 삼 장 거리에 떨어져 있는 번뇌마의 옆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았다.
“너 지금 거기에서 무엇을… 그보다 어떻게 갑자기… 아!”
적발마의 눈이 커졌다.
번뇌마의 목에 붉은 선이 나타났다가, 짙어졌다.
그리고 그의 목이 옆으로 잘려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목에서 솟구친 피가 천장까지 닿았다가 떨어졌다.
쏴아아아-!
적발마는 번뇌마의 피로 머리카락을 더욱 붉게 물들이면서, 청년 화를 향해 다시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청년 ‘화’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검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번뇌마의 목을 베기엔 충분해 보였다.
“나는 죄인. 사부가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게 만든, 큰 죄인.”
청년은 눈을 가렸던 안대를 천천히 풀었다.
“내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