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나쁜 예언을 깨뜨리는 법
낙루석의 벽이 꿈틀거렸다.
희고 검은, 더러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자국들이 계속 변했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정말 자연적인 것이란 건가요?”
곽소혜가 놀라서 말했다.
은교교도 고개를 흔들었다.
“숨겨진 비밀이 있겠죠?”
문양들이 이내 마치 그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애초 벽에 새겨져 있는 사도명의 얼굴 옆에, 무림연합군 사람들은 모두 아는 얼굴이 새롭게 하나 더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 얼굴! 설마?”
모두가 은교교를 보았다.
대리국 병사들도 나타난 그림과 은교교를 번갈아 보았다.
은교교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내 얼굴이 왜 저기 있죠?”
“끝이 아니에요. 또다시 나타나고 있어요.”
곽소혜가 소리쳤다.
세 번째로 나타난 얼굴은 곽소혜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사도명과 은교교의 뒤에서, 연자강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무공이 극의에 달하면 하늘의 뜻을 살필 수 있게 된다 들었습니다.”
흑호저가 말에서 내리며 말하자,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래서 개국왕께서는 천기에 감응하는 기운을 낙석루 안에 남기셨다고 전해집니다.”
“천기에 감응? 일종의 예언 같은 건가요? 내공으로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곽소혜가 은교교에게 물었다.
그녀는 본래 무공을 익히지 못했고, 무릉신녀의 기운이 빠져나간 지금은 더욱더 무공이나 내공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은교교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네요. 최소한 아직 저의 재주로는 가능하지 않아요!”
곽소혜가 고개를 돌려 남궁태보를 보았다.
“가능성은 있을 듯하오.”
남궁태보는 세 명의 그림을 드러내고도, 여전히 조금씩 모습을 바꾸고 있는 낙석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대리국 객국왕인 단사평은 적과 싸울 때 눈을 감고, 심지어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도 모든 공격을 피해낸 적이 있다 들었소.”
“그랬지요.”
흑호저 장군이 우렁찬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개국 초 천 명의 적군이 대리를 침범했을 때, 개국왕께선 홀로 그 모든 공격을 상대했습니다.”
일인전쟁은 대리국에 전해오는 전설이었다.
장족(長族)의 군사 천여 명이 백족(白族)이 세운 나라인 대리국을 침범해 왔을 때!
개국왕 단사평은 홀로 그들의 앞에 막았다.
그리고 일체의 반격조차 하지 않고 한 시진 넘게 천 명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힘의 차이에 놀라고, 반격하지 않는 도량에 감동한 장족의 군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대리국의 백성이 되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 일을 기념하여, 개국왕께선 작은 석산을 깎아, 이 낙루석을 만드셨지요.”
설명하는 흑호저 장군의 두 눈 깊은 곳에 이채가 스쳤다.
“낙루석은 국가에 큰 환란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립니다. 전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낙루석 안의 사람이 밖을 나와 세상을 떠돌 때, 대리국 왕가가 멸문하고 대리국은 사라질 것이라고.”
은교교가 미간을 찡그렸다.
“내공도 끌어올리지 않고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그게 미래를 보는 능력과 관련 있다고요?”
“찰나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 계속 발전하면, 머나먼 후대의 일도 느낄 수 있게 되나 봅니다.”
남궁태보가 말했다.
“검성도, 천라대제도, 축융님도 모두 미래의 환란을 읽고 대비를 하셨잖습니까?”
말을 나누는 사이, 흑호저가 데려온 대리국의 군사들은 무림연합군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쌌다.
그들이 차지한 위치와 그 연관에는 엄밀한 법도가 있었다.
남궁태보는 진법이 일가견이 있어 그 형태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팔진도?”
제갈량이 개발했다 전해지는 팔진도는, 내부에 가둔 사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남궁태보가 검을 뽑으며 흑호저를 향해 외쳤다.
“낙루석을 보러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우릴 포위하며 가두는 의도는 대체 뭐지?”
흑호저가 들고 있던 창을 남궁태보를 향해 뻗었다.
검은색의 창끝에서, 주홍색의 빛이 일어나 남궁태보의 가슴팍을 노렸다.
꽈-앙!
남궁태보는 제왕검형을 펼쳐, 흑호저의 창강을 막았다.
“으음!”
답답한 신음을 삼키며, 남궁태보는 두 걸음 물러났다.
흑호저는 자신의 앞에 찍힌 세 개의 발자국을 보았다.
“과연 남궁세가란 건가? 일 대 일의 싸움은 승산이 없으니, 진법을 펼치는 게 역시 옳았다 싶소.”
남궁태보는 검을 고쳐 잡았다.
제왕검형 중의 군림식이 펼쳐지며, 사방이 거의 검세에 놓였다.
콰아아아아-!
“우리는 무림맹주가 결성한 무림연합군의 자격으로 여기 왔다.”
폭풍처럼 피어오르는 검세의 가운데에서, 남궁태보가 외쳤다.
“대리국이 별도의 국가라 하나, 무림에서 본다면 무림맹과 결맹한 문파이기도 한데 어찌 이토록 무례하게 행동한단 말이냐?”
흑호저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군사가 낙루석을 보러 왔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오.”
“그렇다면 왜 팔진도를 펼쳐 포위한단 말이냐?”
“낙루석에 전해오는 전설 또한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오.”
흑호저는 연합군의 뒤를 막고 있는 낙루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렇게 낙루석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사실이듯 말이오.”
드드드드드드드-!
낙루석 전체가 갑자기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눈물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진동하는 낙루석, 그 커다란 암벽에 나타난 그림들 중의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그림의 눈 부분에서 정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은교교가 탄식했다.
“아! 왜 하필 내가?”
세 사람의 그림 중, 울고 있는 그림은 은교교뿐이었다.
곽소혜가 은교교를 보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단순한 그림일 뿐이잖아요.”
은교교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어, 천지간의 기운에 감응하는 재주를 지녔었다면?”
곽소혜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이세요?”
“그 사람이 자신의 재주를 저 석벽의 뒤에 남겨 놓았다면, 석벽은 현실에 반응하겠죠?”
곽소혜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제가 무공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알아요. 애초 내공을 단전이 아닌 사물에 그렇게 오래 남길 방법은 없잖아요.”
“…….”
은교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낙루석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그림에만 온통 집중이 되고 있었다.
그 순간, 눈물 흘리던 은교교의 그림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저, 저런 일이?!”
곽소혜가 깜짝 놀랐다.
그림은 조각조각 찢기더니, 삽시간에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하게 사라졌다.
“왜 저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도대체 저 돌벽의 안에는 뭐가 있는 걸까요?”
곽소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은교교는 쓰게 웃었다.
“그런 건가? 한낱 돌벽 따위가 정말로 미래를 느낀다는 건가?”
낮은 목소리였다.
하도 작아 바로 옆에 서 있는 곽소혜조차 듣지 못할 정도였다.
흑호저가 갑자기 소리쳤다.
“싸움이 끝났다.”
은교교와 남궁태보가, 대리국 군사들 너머의 궁궐을 보았다.
그 하늘 위에 어렸던 어지러운 내공과 살기의 흔적이 사라졌다.
궁궐 안에서 싸움이 있었다.
죽고 죽이는, 흉험했던 싸움이 마침내 끝이 나고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것이 분명했다.
“누가 이겼냐에 따라….”
흑호저가 자신의 군사들을 둘러보면서 다시 외쳤다.
“충성을 바칠 분이 정해진다. 우리는 군인이며, 명령에 복종한다. 나라의 주인이 누군지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중요하다.”
흑호저는 군인 정신 그 자체에 충실한 자였다.
남궁태보가 고개를 흔들었다.
“왕궁 내부의 모략과 그 반역. 그 싸움의 결과를 낙루석이 알려줄 거라 믿는 건가? 결과에 따라서는 우리를 벨 수도 있어서, 팔진도를 전개했고?”
흑호저는 대답하지 않고 아직은 닫혀 있는 궁궐의 문을 보았다.
이제 곧 그 문이 열리고, 궁궐 내부 싸움의 승자가 나설 것이다.
무림연합군 한 명 한 명의 귀에 남궁태보와 은교교의 전음이 번갈아 울렸다.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대비하라.]
[문을 열고나올 사람이 누군지는 뻔해요. 그러니 싸움이 더 커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끼이이-!
이윽고 문이 열렸다.
어린 왕, 단벽이 가장 먼저 걸어 나오자 흑호저는 놀랐다.
“와, 왕이시여.”
“놀란 눈치구나, 흑호저 장군! 단홍 숙부가 아니라 짐이 먼저 나와서 실망했느냐?”
“왕이시여.”
흑호저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군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리며, 왕을 향해 복지했다.
“왕이시여.”
“흑기군은 나라에 충성할 뿐, 판단하지 않습니다.”
단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사도명이 숨이 끊어진 단홍의 시신을 두 팔에 안고 나왔다.
흑호저가 입술을 깨물며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앙다문 이가 그의 입술을 짓눌러, 피가 뚝뚝 떨어졌다.
흑호저의 등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떨렸다.
‘승상! 실패하신 겁니까?’
흑호저는 단홍을 좋아했다.
단홍은 단 씨 가문의 사람들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났음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마음이 넓었다.
“힘든 일 하나 해 볼까?”
단홍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주었을 때, 흑호저는 내심 기뻤다.
욕심 많은 왕실의 가족들.
병약하여 왕좌에서 물러난 선왕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이유로 주변 친족들로부터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왕.
언젠가부터 왕과 그 주변으로 외세가 끼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흑호저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을 베고 제대로 왕을 세우자는 단홍의 제안을, 흑호저는 개인적으로 환영했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달랐다.
“저는 흑기군의 대장군. 사람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합니다.”
흑호저는 군사를 동원했다.
하지만 왕실의 일에는 결코 끼어들지 않겠노라고 거사를 일으키기 전부터 선언했다.
“왕궁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승리하신 분이 저희 흑기군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승리한 사람은 왕이었다.
단홍은 죽었다.
흑호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한 가지 사실뿐이었다.
“조화무제가 왜 승상의 시신을 들고 있습니까?”
단홍은 흑호저에게 왕과 그 주변에 스며든 암운의 정체가 지옥문이라고 알려주었다.
조화무제 사도명은 그런 지옥문과 싸우는 자였다.
조화무제가 살아 있다면, 죽은 사람은 단홍이 아니라 왕이어야 마땅했다.
“단홍! 승상! 나의 숙부!”
단벽이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했고, 짐을 일깨워 주었다.”
“!”
흑호저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왕을 보는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왕이시여. 그 말씀은…?”
“왕좌를 탐했던 자들! 백성을 돌보고자 함이 아니라 군림하고자 왕좌를 욕심낸 자들! 조화무제가 짐을 도와 그들을 처리하였다.”
단벽은 흑호저와 흑기군의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뿐만 아니라 짐에게 들어왔던 심마도 격퇴시켜 주었다.”
사도명은 낙루석에 새겨졌던 자신의 모습 옆에 연자강의 모습이 새롭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래에 서 있는 은교교와 곽소혜의 기척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사도명이 남궁태보에게 전음으로 물었고, 남궁태보는 전음으로 간략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단벽이 말을 이었다.
“이에 짐은 조화무제를 대리국의 태공으로 임명한다. 공적을 치하하여, 무제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단벽은 사도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라. 짐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무례도, 물론 용서한다.”
“나쁜 꿈, 나쁜 전설, 나쁜 예감. 심지어 나쁜 예언! 그런 것들을 깨뜨리는 법을 알고 있나?”
단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짐은 태공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겠구나.”
“부수는 것! 말보단 행동으로 보이는 편이 명확하겠지?”
사도명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