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얻는 것과 잃는 것
설인후의 숨이 끊어졌다.
그가 죽은 후, 사도명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제갈청미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접촉은 단순한 동작이지만,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놀라울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고맙소. 좀 안정이 되는군.”
사도명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제갈청미는 개천도화목의 뒤로 펼쳐진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무릉촌의 주민들.
천하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세상을 구하기 위해 힘을 숨긴 채 기다렸던 검성의 후예들.
그들이 모두 손과 발에 묶여 적신강림대법에 노출되어 있었다.
처음에 사도명의 앞에 나타났던 십여 명의 불완전한 혈강시는, 대법의 중간에 풀려난 사람들.
사도명이 개천도화목의 뿌리를 타고 흐르는 마기를 건드렸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한 사람의 욕심이,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만들었네요.”
제갈청미는 설인후가 죽기 전 남겼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태명’이라는 이름은 설인후에게 접근했던 외부인이었다.
설인후조차 그의 성이 뭔지는 알지 못했다.
태명은 세상은 모르는 지하수로를 타고 무릉촌으로 들어와 설인후를 만났다.
“이상하군요. 촌장님이 본래 검성의 후예이니 모든 것은 촌장님의 것인데, 그것들을 일어날지조차 확실치 않은 미래의 혈겁을 위해 희생한단 말입니까? 대체 누구의 뜻입니까?”
“수호자 부부? 연자강과 곽소혜는 어떤 희생을 했기에 촌장님이 가져야 마땅한 그 힘들을 모두 가져갈 권리를 가지나요?”
현혹하는 말은 하얀 무명천 위에 떨어진 먹물과 같다.
놓아두면 빠르게 번지고, 아무리 씻어내려 해도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는다.
결국 설인후는 무릉도원의 문을 열었다.
핑계를 만들어 연자강을 먼 곳으로 보낸 후였다.
설인후는 봉신의 대법으로 봉인되어 있는 검성과 무릉신녀의 힘을 모두 깨웠다.
“하하하. 해 냈군요, 촌장님. 설마 이렇게 쉬울 줄이야, 하하하 짐작도 못했었답니다.”
검성이 남긴 힘이 풀려날 때, 태명은 껄껄 웃었다.
무릉신녀의 힘은 갈 곳을 잃고 폭주했다.
태명이 자신을 젖히고 검성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할 때!
설인후는 비로소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태명! 네, 네가 삼대마문의 사람이라고? 나, 나를 속여서 검성 조사의 힘을 훔쳐가려고 접근한 것이었다고?”
무릉촌의 주민들 중 약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태명은 이미 적마교의 독을 무릉촌에 퍼뜨린 후였다.
“그를 조심하라고, 제가 계속 말했잖습니까?”
연자강은 뒤늦게 달려왔다.
하지만 상황을 돌이킬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폭주하는 무릉신녀의 힘을 연자강이 가까스로 막아냈을 때, 태명은 이미 검성이 남긴 힘을 모조리 집어삼켜 버렸다.
“하하하. 이것이 검성의 힘인가? 달콤하다. 세상을 내 발 아래에 두고도 남음이 있어.”
태명이 두 구의 혈강시를 불러 들였다.
그들만으로도 무릉촌에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설인후는 곧장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적신강림대법을 위해 묶여 있었다.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산 사람으로 혈강시를 만들면, 하하하, 더욱 강하면서도 약간은 생각도 할 줄 아는 괴물이 탄생하지. 하하.”
고통에 몸부림치는 설인후의 앞에서 태명은 계속 웃었다.
“질투했잖아, 수호자를! 강함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어 했었잖아, 늙은이? 기뻐해. 그 강함이 이제 곧 너의 것이 된다. 네 마을 사람들의 것이 된다.”
설인후는 자신과 똑같이 적신강림대법을 받기 위해 묶인 마을 사람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적신강림대법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묶인 채 굶주림으로 죽어가지만, 또한 강림대법을 통해 공급되는 혈기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고통!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사도명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다.
“여자가 은교교냐고? 아닐세. 봉인이 풀린 건 삼년 전.”
죽기 전, 설인후가 말했다.
“은교교는 자네와 함께 왔던 그때 이후로 난 보지 못했네. 연자강은 무릉신녀의 혼과 힘을 자신의 아내에게 봉인했어.”
“곽소혜… 말입니까?”
“연자강은 지쳐 쓰러졌고, 곽소혜가 연자강을 안고 먼저 사라졌지. 태명은 굳이 사라지는 그들을 막지 않았었네.”
사도명은 안심인지 걱정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마을 사람들도 도와주게.”
설인후가 다시 말했다.
“그들을 죄가 없네. 죄를 지은 것은 나인데, 나는 사람으로 죽고 그들은 괴물로 죽는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설인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결국 눈을 감았다.
회상을 끝낸 제갈청미가 다시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그의 손에서 축융의 반지가 크게 늘어나더니 허공에 떠올랐다.
불은 뜨겁고 눈부셨다.
제갈청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
온 산이 밝고 뜨거웠다.
사도명과 제갈청미는 극락문 바깥까지 나오고서야, 지하의 불길이 전하는 뜨거움에서 벗어났다.
사도명이 축융지환으로 무릉도원과 무릉촌에 불을 질렀다.
“마음이 무겁소.”
사도명의 말에 제갈청미가 고개를 저었다.
“맹주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들은 고마워할 겁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오.”
“그렇다 해도 아직은 모르잖아요. 그들은 최소한 괴물이 되지 않고 죽을 수 있었어요.”
해소할 수 없는 분노가 있다.
무릉촌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은 설인후 때문이었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다.
“태명.”
사도명이 입술을 꾹꾹 눌러 씹으며,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성은 모르고 이름만 안다.
하지만 지금 죽어가는 생명의 모든 분노를 감당해야 할 이름은 그 한 가지였다.
제갈청미가 한숨을 쉬었다.
“저 불이 꺼지면 세상엔 더 이상 무릉도원이 없는 거군요. 사라진 전설을 세상의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하겠지요?”
- 오직 사라진 전설만이 영원한 법이지.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왔다.
제갈청미가 놀라서 몸을 돌렸지만, 사도명은 태연했다.
그는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극락문의 앞, 어느새 연자강이 나타나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느냐?”
제갈청미가 고함을 지르며 청강화염수를 쏘았다.
뜨거운 기운이 날아갔지만, 연자강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태연히 오른손을 휘둘렀다.
제갈청미는 자신이 쏜 불길이 연자강의 오른손에 휘감기는 것을 보았다.
“여자의 몸에 열양지기라?”
연자강은 오른손으로 휘감은 청강화염수의 열기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다시 제갈청미를 향해 쏟아냈다.
“특이하지만, 전혀 어울리는 선택은 아니군. 자, 피해 보라.”
콰아-앙!
청강화염수가 본래의 주인을 향해 되돌아와 제갈청미의 발아래에서 폭발했다.
제갈청미는 청성미리보를 전개하고서야, 가까스로 연자강의 반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큭!”
“비명이 아니라 신음? 보기에 여인이 분명하니 나의 공격을 소음의 방향으로 피하는 것이 편할 텐데, 굳이 소양의 방위를 밟아서 피한 것도 그렇고….”
연자강이 빙그레 웃었다.
“제갈평은 더 이상 후사를 볼 수 없다더니! 그가 아들 낳기를 포기하고 딸에게 후사를 맡기려 결심한 것이 오래 됐구나.”
제갈청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갈평이 그녀에게 제갈세가를 맡기려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다.
제갈청미 역시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여자가 아닌 남자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집안의 속사정을,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 파악해내는 연자강의 눈빛이 싫었다.
제갈청미는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거죠, 맹주? 당장 싸우세요. 제압해야죠.”
사도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연자강이 빙그레 웃었다.
“왜 그가 싸워야 하지?”
“당신은 극락문의 문주니까.”
“극락문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싸우라 강요하나?”
연자강이 제갈청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물어보자. 제갈세가가 혹시 극락문으로부터 큰 피해를 본 것이 있나?”
제갈청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하기에 극락문은 무림의 공적이 되는 것이 마땅했다.
“너, 너희는 포고를 내어 무림인들의 활동을 제약했고, 타인을 너희 뜻대로 하려고 했다.”
“극락문이? 그냥 무림이 스스로 원해서 충성의 맹세를 바쳤던 것이 아니었나?”
연자강의 말이 빨라졌다.
“포고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범죄의 숫자를 봐. 더 이상 약자가 강자에게 핍박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걸 누가 만들었지?”
제갈청미는 말문이 막혔다.
연자강의 말은 분명히 궤변이었지만, 어조에 힘이 있었다.
확신을 갖고 말하는 사람의 의견은 반박하기가 어렵다.
제갈청미는 사도명을 보았다.
“너희들은 저분을 감히 무림공적이라 칭했잖아. 그가 무림맹의 맹주신데도.”
연자강도 사도명을 보았다.
“무림의 공적이 되어 불편한 점이 있었나, 도명?”
사도명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다. 본래 싸우고자 했던 자들이 먼저 달려들어 편했고, 본래 교화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먼저 찾아와주어 또한 편했다.”
연자강은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다시 제갈청미에게 돌렸다.
“들었지, 제갈소저? 나는 극락문주로 친구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왜 만나자마자 싸워야 하나?”
“…….”
제갈청미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문답이 소용없다면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우열은 너무 명확했다.
제갈청미가 사도명에게 외쳤다.
“궤변을 계속 들을 건가요?”
사도명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강!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 터.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리지 말고 해라.”
“역시 도명. 나를 알아준다니까.”
연자강이 빙그레 웃었다.
“세상의 나쁜 뜻이 모두 나쁜 결과를 낳지 않듯, 좋은 뜻 또한 모두 좋은 결과만을 낳지는 않아.”
“그래서?”
“검성은 장차 다가올 혈겁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자 했어. 그건 진실된 선의였지.”
연자강이 사도명과 제갈청미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 선의가 정말 좋은 결과만을 세상에 남겼을까?”
제갈청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좋은, 이라는 건 세상에 없지. 좋으면 나쁜 게 있고, 나쁘면 좋은 것도 있으니까. 아는 내용이 적어, 답하기가 어렵군.”
“그럼 아는 걸 늘려 볼까?”
연자강이 후르르 몸을 날렸다.
“존좌께서 너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따라 와.”
사도명은 즉시 따라갔고, 제갈청미도 경신술을 전개했다.
따라가면서 사도명이 외쳤다.
“곽 소저에 대한 얘기를 들었네. 존좌란 혹시 무릉신년의 혼과 힘이 들어간, 곽 소저인가?”
“…소혜는 이미 연 부인이지. 오래 전부터!”
연자강은 거의 나는 듯한 속도로 달려갔다.
제갈청미가 힘에 부쳐할 때, 사도명으로부터 전음이 왔다.
[기억날 거요, 와의 깨달음! 흐름 속의 또 다른 흐름.]
[달려갈 때 공기의 반탄력을 오히려 앞으로 미는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결 말인가요?]
사도명은 이미 한 차례 제갈청미에게 창천사해 중 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었다.
[잊고 있었네요. 알겠어요. 적용해 볼게요.]
와의 깨달음을 떠올리자, 제갈청미는 자신의 경신술이 순식간에 빨라짐을 느꼈다.
앞서 가던 연자강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제갈청미는 방긋 웃었다.
“염려 마세요.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
갈라진 틈새에서 쉬지 않고 차가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믿기지 않아요. 그 따뜻하던 무릉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이토록 차가운 땅이 있다니.”
사도명이 제갈청미를 보았다.
“남는 곳이 있으면 당연히 모자라는 곳도 있지 않겠소?”
“그야 당연하지만….”
제갈청미가 웃었다.
“돈과 먹을 것 외에도 그런 규칙이 적용되는 건 몰랐어요.”
태초부터 얼어 있었을 것 같은 빙벽을 지나는데, 사도명의 귀에 연자강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성이 자신의 힘을 후세를 위해 남기려 결심한 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설명할 마음이 생긴 거냐, 친구?]
[특히 그녀에겐….]
연자강이 빙벽 중의 하나 앞으로 가서 여기저기를 만졌다.
[무릉신녀에겐, 그건 정말 너무나 아프고 잔인한 일이었지.]
쿠르르르르-!
커다란 빙벽이 굉음을 내며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