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무릉에서 생겼던 일
구십여 년 전!
무림맹의 결성 직후, 적마교가 혈겁을 일으켰었다.
그들은 열 구의 혈강시를 앞세워 무림맹으로 진군했었다.
혈강시는 적마강신대법을 통해 제련된다.
적혼(赤魂)의 혈기!
적마강시대법은 음혈의 문을 열어 그 혈기를 불러들이는, 금단의 술법이었다.
붉은 기운이 들어간 시체는 강철처럼 단단한 육체로, 오로지 죽음만을 탐하는 혈강시로 부활한다.
당시 십구성좌의 열아홉 문파에서 내세운 연합군이 적마교의 혈강시를 맞이하여 싸웠다.
그들은 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사하고 나서야, 열 구의 혈강시를 모두 부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사도명과 제갈청미의 앞에 나타난 혈강시는 얼핏 보아도 열 구가 훨씬 넘어 보였다.
“다, 달아나야 해요.”
제갈청미가 말했다.
“일단 여길 벗어나서, 무림맹의 군사를 이끌고 오지 않으면 우리에겐 승기가 없어요.”
“완전한 것이 아니요.”
“!”
“완성된 혈강시라면 몸 전체가 타는 듯 붉어야지. 헌데 저자들은 눈만 붉어서 제갈 소저가 염라마인으로 착각을 했던 거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갈청미는 사도명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사도명이 양손을 뻗었다.
두 갈래 천극멸의 기운이 양쪽으로 날아가, 가장 앞으로 나와 있는 두 구의 혈강시를 때렸다.
꽈아-아앙!
두 구의 혈강시가 신음도 없이 뒤로 날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그들의 몸엔 수없이 많은 실금이 보였다.
가슴 부분도 움푹 아래로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천극멸이 통해요!”
“불은 마기에 극성! 단단한 외부를 부쉈으니, 이제는 통할 거요.”
사도명의 말뜻을 단숨에 알아들은 제갈청미가 움직였다.
왼쪽의 혈강시의 몸에 청강화염수를 때려 넣고, 뒤이어 오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키이!”
놀라서 바닥을 기는 혈강시의 등을 밟고, 갈라진 틈새 사이로 청강화염수를 불어 넣었다.
“불타버렷!”
“키야아아악!”
두 구의 혈강시는 푸른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맹주의 판단이 옳았어요.”
제갈청미가 양손에 끌어올린 화염수의 기세를 더욱 강하게 만들면서 외쳤다.
“완성된 혈강시들이 아니네요. 화염수가 통합니다.”
“그럼 이건 더 잘 통하겠지.”
사도명이 왼손을 들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뜨겁고 지독한 불길이 그의 손가락에서 떠올라 허공에 나타났다.
화르르르르르르-!
혈강시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불을 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생존의 본능이 남았단 건가?”
사도명이 그런 혈강시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그럼 마지막 이성만은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는 거네요.”
축융지환의 기운을 더 강하게 만들어 영역을 넓히면서, 사도명은 큰소리로 외쳤다.
“물러나세요. 당신들을 태우고 싶진 않습니다.”
“왜 그러세요, 맹주? 겁만 주지 말고 진짜 태워 버리세요.”
[축융지환을 쓰면 무릉도원까지 모두 태우게 되오.]
사도명이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싶지 않소. 이 사람들의 앞에선 더더욱!]
[그게 무슨 말… 서, 설마 이 혈강시들, 아니 생전의 이 사람들을 아시는 건가요?]
이상함을 눈치 챈 제갈청미가 전음으로 사도명에게 물었다.
[알고 있소. 먼저 나타났던 두 구와 이 사람들은 달라. 말했잖소. 무릉촌의 사람들은 무릉촌을 떠나지 못한다고.]
제갈청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서운 결과에 대한 상상!
사도명은 축융지환을 횃불처럼 허공에 떠올린 채, 혈강시로 변한 무릉촌 주민들 사이를 걸었다.
“크으으!”
주민들이 길을 비켰다.
그들의 눈엔 축융지환에 대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고통의 빛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도명은 개천도화목의 뒤로 돌아갔다.
그는 무릉도원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느리지만 분명한 호흡.
그 호흡의 주인이, 개천도화목의 뒤에 있었다.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인 노인이었다.
개천도화목과 연결된 검붉은 가죽이 노인의 두 손목과 두 발목을 파고 든 상태였다.
사도명은 그를 알아보았다.
“촌장님.”
무릉촌의 촌장 설인후!
검성 설운경의 직계 후손으로, 당대의 무릉촌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안하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나의 잘못.”
설인후가 중얼거렸다.
사도명은 온통 붉게 변한 그의 몸과 그를 묶고 있는 검붉은 가죽을 확인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촌장님? 저 사도명입니다.”
“…미안하구나, 자강아.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내가, 신녀를 잘못 깨우는 바람에….”
[제 정신이 아닙니다. 맹주를 맹주의 친구와 착각하고 있어요. 잘 됐습니다. 정보를 알아내세요.]
제갈청미의 전음이 아니더라도, 사도명은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촌장님. 저 연자강입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다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너를… 내가 너를 질투했다. 검성의 피를 이은 사람은 나인데… 으으, 너와 곽소혜가 수호인이 되어, 내 조상과 무릉신녀의 힘을… 이어 받는다 생각하니 질투가 나서… 으으….”
무릉신녀에 대한 일은 무릉도원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사도명은 무극대제가 남긴 천라옥벽을 열었었다.
그 때 무릉촌에 남겨진 최후의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검성 설운경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녀는 검성의 여인답게 무척 강하고 아름다웠다.
검성은 훗날 무릉신녀라 알려진 그녀와 함께 중년 이후 무릉도원에서 함께 살았다.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그녀와 함께 죽었다.
두 사람의 시신이 봉인된 곳이 바로 개천도화목이었다.
검성은 죽기 전, 봉신의 대법을 사용해 자신의 힘을 보존시켰다.
무릉신녀의 힘 또한 함께 보존시켜, 훗날 필요한 때에 개천도화목을 통해 두 사람의 힘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이 바로 수호인들이 천리도화를 개화시키는 비결이었다.
무릉촌이 천하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한 쌍의 수호인은 개천도화목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와서 검성이 남긴 힘과 무릉신녀가 남긴 힘을 각각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지려 했다. 남에게 주기… 싫었다.”
설인후는 핏물에 덮여 보이지도 않는 눈을 계속 움직이면서 말을 이었다.
“태명의 말이… 옳다 믿었다. 내 것을 왜 남에게 주느냐? 그래서… 무릉신녀의 봉인을… 열었지. 그 힘을 내가 가지려고, …열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계속 말해 주세요, 촌장님.”
“신녀가 깨어났고, 검성은 태명, 그 죽일 놈이….”
“태명이 누굽니까? 깨어난 신녀는 어찌 되었습니까?”
설인후의 눈이 흔들렸다.
핏물이 가득 찬 눈에서 붉은 회오리가 일어나더니, 이윽고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변했다.
“너도 이미 알잖느냐? 태명이 검성의 힘을 훔쳐갔을 때, 신녀의 힘을 막고자, 너는….”
설인후는 더 이상 신음을 흘리지도, 눈빛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혈강시를 만드는 적마강신대법은 적혼의 혈기를 불러들이고자 저승으로 통하는 음혈을 열어요.]
제갈청미의 전음이 울렸다.
[그 노인의 손과 발을 파고 든 가죽 끈. 이제야 기억났어요.]
[이 끈이 무엇이게요?]
[그때 죽은 사람의 몸을 묶는 건, 이미 과거에 혈강시로 제련된 자들의 살가죽이죠.]
[아!]
설인후가 사도명을 보았다.
“너는 연자강이 아니구나.”
“귀하는 촌장님이지만, 또한 그가 아니군요. 이미 죽은 겁니까? 아니면….”
“모든 것은 발전한다. 무림맹에 패한 후, 적마교는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산 사람으로 혈강시를 만드는 법을 개발했지.”
“발전? 그런 게?”
사도명이 고함을 질렀다.
제갈청미가 다시 외쳤다.
[도망쳐요. 그는 이제 완성된 혈강시입니다.]
사도명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설인후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당신은 혈강시로 완성됐으니 곧 신지를 잃을 겁니다. 그 전에 묻습니다. 태명이라는 건 당신에게 검성의 봉인을 깨뜨리라 현혹한 자의 이름이 맞습니까?”
“대답해 줄 거 같으냐?”
“저는 자강의 친구입니다!”
사도명이 소리쳤다.
“유일한 친구란 것, 알고 계시잖습니까?”
설인후가 붉게 번들거리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자강에게는… 미안하다. 나는 봉인을 깬다는 것이 힘을 얻는 것이라 믿었지, 희생하는 것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자강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태명이 검성의 힘은 가져갔다. 나는… 우리는 심마문의 힘이 이미 신녀의 꿈에 미쳤는지 몰랐어.”
“신녀의 꿈? 자세히 말해요.”
“자강은 신녀를 다시 봉인하고자 여자를 희생시켰지.”
“여자?”
사도명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은교교가 연자강과 함께 있었다는 전갈을 받았었다.
“어떤 여자입니까? 혹시 은교교를 말하는 겁니까?”
“그 여자는… 끄으어!”
설인후의 온몸이 흔들렸다.
그를 묶고 있던 혈강시의 살가죽으로 만든 끈이 뚝뚝 썩은 동아줄처럼 끊어졌다.
“내 이성은 이제 곧 사라진다. 연자강에게는 미안… 끄으어. 죽인다. 모조리 파괴….”
꽈아-앙!
설인후가 양손을 휘둘러 사도명의 가슴을 치자, 화탄이 폭발하는 듯한 폭음이 사방을 휘감았다.
사도명은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았고, 그런 사도명을 제갈청미가 뒤에서 안았다.
“맹주!”
“제일해 와로 힘을 밀쳐내려 했는데 실패했다. 망할! 위험하다. 물러나 있어!”
“다시 공격해 옵니다. 같이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와요.”
“이것은 우주가 꾸는 꿈!”
사도명이 전을 이용해 제갈청미를 멀리 옮기며, 오른손으로는 검강을 만들어 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우주 같은 기운은, 우주오검의 마지막 초식인 우주홍몽이었다.
“노력이 아니라 한낱 사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혈강시.”
쿠오오오오오오-!
힘의 그물이 마치 우주처럼 퍼지며 사도명의 주변을 감쌌다.
달려들던 혈강시 설인후는 촘촘한 힘의 그물이 자신을 옭아맴을 느끼며 놀랐다.
“크으아아!”
“그 정도를 이겨내는 일이 어렵다면, 여의무제란 이름을 사용할 자격이 없겠지?”
제갈청미는 처음부터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도명은 이미 수라겁황과도 싸워서 승리했다.
사도명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건,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설인후를 물리치되, 반드시 죽지 않게 하며, 혈강시로부터 되돌릴 수 있어야만 했다.
3년 전의 무릉촌.
그곳에서 깨어난 신녀의 힘을 봉인시키기 위해 희생시킨 여자가 누군지를 알아내야 했다.
설인후를 힘의 그늘로 꽁꽁 묶은 채, 사도명은 빠르게 그의 온몸을 훑었다.
그의 몸속에 이미 열려 있는 음혈의 문!
그 문을 닫아야 적혼의 혈기가 흐르지 않게 된다.
“지금 단전을 부술 겁니다, 촌장님. 내공을 잃고 목숨도 잃지만, 혈강시에서 벗어날지, 혹은….”
사도명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이 흘러 내렸다.
“혹은 혈강시만 벗어날 뿐, 생명 또한 잃게 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우주홍몽은 개벽의의 깨달음을 품고 있고, 개벽의는 음과 양을 합일해 궁극을 보는 무공이었다.
사도명은 그 힘을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 무영섬으로 뻗게 하여 설인후의 단전을 관통시켰다.
“!”
설인후의 눈이 흔들렸다.
사도명은 내공을 풀었다.
자신의 몸을 꽁꽁 묶었던 우주홍몽의 힘이 풀리자, 설인후는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도명도 비틀거렸다.
그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힘을 사용하기 위해 마음을 두 단계나 나누었던 것이다.
둘로 나눈 마음을 다시 각각 둘로 나눠 넷이 되게 했기에, 한 번에 소모되는 심력이 너무 컸다.
“초, 촌장님을 도우시오.”
“맹주!”
“어서 촌장님을! 혈강시의 대법은 이미 풀렸을 거요.”
제갈청미가 달려가서 설인후의 몸을 부축했다.
뚫린 단전의 주변을 지혈해,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했다.
설인후의 몸에서 일말의 내공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설인후의 눈빛은 평범한 촌부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지 않았군. 어, 어떻게 한 건가?”
설인후가 사도명에게 물었다.
제갈청미는 사도명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 촌장님. 혈강시로부터 되돌렸지만, 목숨을 구하진 못했습니다. 촌장님의 생명은 이제 곧 다할 겁니다.”
“사, 상관없네. 마귀로 죽게 될 줄 알았는데… 사람으로 죽게 됐으니, 고마울 뿐이야.”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까 말하셨던 신녀를 봉인한 여자.”
사도명이 다급하게 물었다.
“여자의 이름이 은교교입니까? 은교교가 혹시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