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여래서천
공야굉은 적암마계 출신이다.
적암마계는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끔찍한 세 개의 세상이다.
화(火), 빙(氷), 강(罡)!
공야굉은 그중에서 화염계를 잇는 후손이었다.
화염의 무공은 백도의 축융과 마도의 염마로 크게 나뉜다.
두 갈래 힘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천 년을 대치해 왔다.
공야굉은 축융지환이 영그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서둘러 강호에 나서서, 새로운 축융지존의 탄생을 막으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겨우 나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무릉신녀. 그 년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한 발 빠르게….”
공야굉은 이를 갈았다.
다가오는 사도명의 몸에 어린 불길은 바로 축융의 재림!
공야굉은 정신없이 물러나면서도 그렇게 물러나는 자신의 모습에 분노하고 있었다.
“사도명을 공격해!”
3대 령주의 명령에는 극락문이 심어 놓은 심령통제의 힘이 깃들이 있다.
염라탈혼에 빠진 자들은 그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다.
축융봉에 올라온 염라마인들은 모두 한 차례 축융의 반지에 몸이 꿰뚫렸었다.
그 후,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그래도 망가진 건 아냐. 염라마인들이 축융의 적이 되진 못하겠지만, 일제히 공격한다면 저 녀석에게 허점을….’
하지만 공야굉의 계획은 작동하지 않았다.
염라마인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사도명의 몸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날 우습게 보지 마라!”
공야굉은 끌어올린 지옥마염을 모조리 사도명의 가슴에 단숨에 퍼부었다.
콰콰-콰콰쾅!
지옥마염의 연타는 끔찍한 열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공야굉은 그렇게 모진 열기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더더욱 뜨거운 화염을 느꼈다.
축융지환!
지심극화가 만드는 열기의 극!
“모든 것을 태운다.”
사도명의 담담한 음성에, 공야굉은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앞에 정사각형으로 떠오른 방벽은, 마염을 방패로 만들어 모든 것을 막아낸다는 지옥염벽의 공력이었다.
쩌어어어-어어엉!
그러나 축융지환의 힘은 그런 화염의 방패조차 모조리 녹여낸 뒤 공야굉의 몸을 덮쳤다.
“크아악!”
공야굉의 몸 전체가 하얀 축융의 불길에 뒤덮였다.
그의 피부가 탔고, 머리카락이 재로 변했다.
공야굉의 신음은 고통보다는 오히려 불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 사십 년 전에 이미 만화불침을 완성했다. 그런 내 몸을 태울 수 있다고? 크윽! 믿을 수 없다.”
공야굉의 평생은 불과 함께였다.
그럼에도 불의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하지만 지금, 공야굉은 작열하는 통증에 신음하는 것이다.
“뭐, 뭣들 하느냐? 공격하라지 않느냐? 크윽!”
염라마인은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축융의 불은 마기와 극성.”
사도명이 되돌아온 축융지환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고통이 극심한 건 불이 네 몸과 마공을 같이 태우기 때문이다.”
“!”
공야굉은 염라마인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도 깨달았다.
축융지환에 꿰뚫린 염라마인들의 신체 내부, 염라탈혼의 공력이 모두 불타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이까짓 불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냐?”
공야굉도 지옥염마의 공력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공야굉의 몸을 덮었던 축융의 불이 이윽고 서서히 꺼졌다.
지옥염마의 불도 약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겼다고 생각하나?”
공야굉은 온 몸을 뒤덮은 화상이 전하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면서, 염라마인을 가리켰다.
“저런 놈들은 얼마든지 있다. 권력을 좇아 투신한 놈들. 이미 호남성 모든 멍청이들에게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공야굉은 통로를 열어 놓았고, 그 길을 통해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가 극락문의 신인들!
정확하게는 염라마인!
극락문이라는 이름에 무인의 긍지를 팔고, 그 대가로 거짓된 힘을 얻은 자들이었다.
“서왕모 존좌께서 포고하셨지. 조화무제를 무림 공적으로 지정한다. 그를 제거하는 자, 한없는 상을 내리겠다. 몇 명이나 감당할 자신이 있나, 조화무제?”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사도명이 오른손을 들었다.
축융지환이 수십 개의 분신으로 갈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이젠 알았으니까. 화지약 노선배가 축융지환을 준비한 이유!”
축융지환은 고금9대 기보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다.
마공을 가진 자들과 싸우기엔 최고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크흐흐. 축융지환으로 저 많은 무림인을 죽이면, 네게 걸릴 상금이 더욱 더 커지겠군.”
사도명은 마음을 둘로 나눴다.
그는 왼손을 뻗어 공야굉의 목을 쥐고 오른손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염라마인들을 가리켰다.
촤아아아아-!
수십 개로 분화한 축융지환이 염라마인의 가슴을 관통했다.
“죽이지 않아. 내공만 사라지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결과는 같을 거야.”
“무슨 소리냐?”
“네가 마인드을 죽이지 않아도, 하하 우리가 죽일 거니까.”
“우리?”
“축융지환이 탄생했음을 이미 알았다. 무릉신녀, 그년 때문에 늦고 말았어. 늦었음에도 나는 왔다. 왜 굳이 왔을까?”
공야굉이 빙그레 웃었다.
“염마와 축융의 불! 어느 쪽이 뜨거운지 알아보고 싶었거든.”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네가 말한 우리가 누군지를 물었다. 무릉신녀는 또 누구야?”
“대답해 줄 것 같으냐?”
둘로 나눈 마음 중의 하나로 제어하던 축융지환이 사도명에게 돌아왔다.
뒤늦게 나타난 염라마인들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고, 사도명은 축융지환을 공야굉의 이마 앞에 겨누었다.
“겉이 아니라 속부터 태워줄 수도 있다. 몸과 평생 수련한 내공이 사라지는 고통! 느껴볼 테냐?”
“지, 지금 감하 협박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대답해.”
축융지환에서 일어난 불길이 공야굉 주변을 모두 감쌌다.
고오-오오!
“우리란 건 누구냐? 무릉신녀는? 서왕모는 대체 누구야? 아니 다른 무엇보다도….”
사도명의 눈이 빛났다.
“극락문의 문주가 누구인지, 그것부터 대답해. 혹시 그는…?”
“공야굉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권한이 없다네.”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왔다.
까마득한 하늘 위였다.
놀라서 고개를 든 사도명은,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거대한 손을 보았다.
“설마 저거…?”
콰콰콰콰콰콰콰-!
사도명과 공야굉은 몸과 주변을 한꺼번에 짓눌러오는 가공스런 압력을 느꼈다.
놀란 사도명이 둘로 나뉘었던 마음을 하나로 합치며 외쳤다.
“모두 멀리 피해-!”
형산파 고수와 제갈청미가 모두 사도명의 외침을 들었다.
공야굉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약속을 지키시는군요, 존야! 구하러 오셨군요.”
“존야? 이 무공은 설마….”
손은 어느새 거대하게 확장되어 사도명의 주변 십여 장을 모조리 덮고 있었다.
“…여래신장?”
사도명이 양손을 높이 들었다.
꽈아아-아앙!
굉음이 일며, 흙먼지가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사도명의 주변 땅이, 그가 서 있는 곳을 제외하고 움푹 꺼졌다.
“공야굉! 이 멍청한! 너는 설마 저 녀석이 너를 구하러 왔다고 착각을 했던 거냐?”
사도명이 위로 들었던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소리 질렀다.
공야굉은 대답하지 못했다.
공야굉은 입과 코로 피를 뿜어낸 채 내장을 세상에 선보이며 시체로 변해 있었다.
가공할 압력에 짓눌린 시체!
사도명의 눈이 떨렸다.
공야굉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여래신장이 어떤 무공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서천여래 중의 최후 초식.
부처의 손바닥이라는 이름과 달리, 여래신장은 결코 온화한 손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강기의 벼락이며, 떨어지는 탄력으로 힘을 극단까지 증강시키는 무공이었다.
너무 강력한 힘이기에,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온 대상을 구분하여 구할 방법은 없었다.
“존야(尊爺)는 처음부터 너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 공야굉. 왜냐하면 내가 아는 저 녀석은….”
사도명은 미처 감지 못한 공야굉의 눈을 쓸어내리며, 옆쪽에 나타난 존야를 보았다.
그리고 옆을 보며 말했다.
“…적어도 친구를 해치려한 자를 살려두는 성격이 아니니까. 내 말이 맞지, 친구?”
사도명의 옆으로 허공에 떠 있던 그림자가 내려섰다.
여래신장의 주인은 사도명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분명히 그런 사람이지.”
여래서천은 패도적인 초식들로 이루어진다.
그 패도성에 어울리지 않게도, 여래서천은 소림사의 무공이었다.
법허 선사가 서래여천을 익혔고, 그는 서래여천이 지닌 파괴력을 경계하여 오직 한 명의 제자에게만 그 무공을 넘겼다.
여래신장을 전개했던 ‘존야’가 사도명의 옆에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감히 나의 친구를 내 눈앞에서 해치려 들다니. 신분을 막론하고 죽어야지. 하하하.”
법허의 제자!
무림맹의 세 번째 특별순찰!
무엇보다 무릉촌의 수호자였던 연자강!
사도명은 부릅뜬 눈을 차마 깜빡이지도 못했다.
법허는 자신이 무릉촌으로 가서 연자강을 만났으며, 그의 손에 의해 두 다리가 잘렸다고 말했었다.
사도명은 법허를 믿는다.
그러나 연자강이 극락문의 문주라는 말을, 또한 어떻게 차마 곧바로 믿을 수가 있겠는가?
사도명은 두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했고, 이제 마침내 확인하였다.
“존야였군. 자네가 존야였어.”
“천하에 나 말고는 감히 그 이름을 쓸 수 있는 자가 없네.”
장내의 싸움은 끝이 났다.
본래 오래 끌 싸움이 아니었다.
사도명의 축융지환이 염라마인을 꿰뚫은 후부터, 그들은 더 이상 염라마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싸움을 멈춘 사람들이 모두 사도명과 연자강을 보았다.
그들 두 사람의 싸움이야말로 유일하게 남은 진짜 싸움이었다.
이제 둘 사이의 승패가, 모든 사람들의 생사를 가늠할 것이다.
사도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공야굉을 나에게 보낸 것도 자네였나?”
“오직 나만이 명령을 내리지.”
“법허 부맹주의 두 다리를 자른 것도 정말 자네인가?”
“그분은 나의 사부시잖나.”
연자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상의 어떤 자가 감히 내 사부의 다리를 내 앞에서 잘라낼 수 있단 말인가?”
사도명은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버텼다.
이제 모든 것은 확실했다.
“공야굉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될 거다. 그것 또한 자네의 뜻인가?”
“서왕모 존좌의 제2호 포고를 아는가? 존좌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단죄한다.”
고오오오오-!
사도명의 온몸에서 가공할 열기가 피어올랐다.
축융지환이 거대한 고리로 변해 그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법허 부맹주께서 말하길 교교가 자네와 함께 있다더군.”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 부탁하게. 하지만 그 전에….”
연자강의 몸에서도 푸른색 서기가 피어올랐다.
콰콰콰콰콰콰콰-!
하늘빛의 서기는 연자강의 몸을 밀어 올려 허공으로 띄웠다.
“자네의 뒤, 쓸 데 없는 자들의 목을 베고 나서.”
서기가 사방으로 발산했다.
하늘빛 서기는 강기였고, 또한 누구든 죽이겠노란 살기였다.
“처, 청운개벽강?”
제갈청미가 놀라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검성님의 무공이 마두의 몸에서 나타나다니.”
“무공에는 마음이 없지.”
연자강이 웃었다.
“선악의 구분은 오직 사람의 마음에 있으니, 내가 마두인지 아닌지를 제갈청미,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정한단 말이냐?”
제갈청미는 몸을 떨었다.
“나, 나를 알아본다고?”
“무릉촌은 겁난을 대비하여 언제나 천하를 살펴왔었다.”
사도명이 마음을 다시 둘로 나누며 말했다.
둘로 나눈 마음의 한쪽은 축융의 기운을, 다른 한쪽은 창천일원신공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무릉촌의 수호자가 제갈 소저를 알아보는 건 당연하겠지.”
콰아아-!
사도명의 몸에 서기가 어렸다.
“그러나 무릉촌의 수호자가 마문과 손잡는 건 당연하지 않다.”
제갈청미는 사도명과 연자강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이마에 돋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두 사람의 무공은 흡사 빼다 박은 듯이 흡사해요.
“그, 그럼 혹시 맹주의 내공 역시 검성님의…?”
“검성의 무공은 세 갈래로 나뉘어 강호에 남겨졌다. 창천문이 그 하나, 천라성이 다른 하나. 그리고 남은 것이 무릉촌.”
사도명이 길게 한숨을 쉬면서 연자강을 보았다.
“대답해라, 자강. 무릉촌의 수호자가 어이해 존야냐?”
“하하하. 어제와 오늘이 다르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연자강은 껄껄 웃었다.
“어제 지켰던 것을 오늘 부순다면 실로 공평하지 않을까?”
“헛소리 마!”
상여경이 갑자기 크게 소리치면서 몸을 날렸다.
“네게 어떤 실력이 있기에, 그리 말하는지를 보겠다!”
“안 돼! 멈추시오.”
놀란 사도명이 소리쳤지만 상여경이 검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상여검의 검이 연자강의 목에 닿으려 할 때 빛이 일어났다.
번쩍!
그리고 퍼지는 핏물!
그 피와 더불어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연자강의 목이 아니라, 상여경의 팔이었다.
“연자가-앙!”
목이 터져라 외치며 사도명이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에서도 연자강이 만들어 낸 것과 똑같은 검강이 사방으로 퍼졌다.
천지간이 검강이 뿜어내는 빛으로 휘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