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지옥염마(地獄炎魔)
침묵이 오래 흘렀다.
형산파 제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이 따라 울었다.
결국은 모두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흐느꼈다.
슬픔은 감염된다.
오랜 시간을 묵힌 서러움이 야기한 눈물은,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웠다.
“흑흑!”
“으흐흑! 그 오랜 희생이 이제야 겨우….”
하지만 울음만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상여경이 소리쳤다.
“9대 문파의 이름 앞에 형산파의 이름이 드높을 그 날까지, 우리들 모두는 의를 숭상하고 공도를 지킬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설움이 깊었던 만큼, 환호성도 높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져 나온 환호성이 축융봉을 채웠다.
“와아아아-! 앞으로는 19성좌가 아니라 20성좌야.”
“9대 문파가 아니라 10대 문파다. 우리에겐 자격이 있어.”
사도명이 제갈청미를 보았다.
“웃으세요. 기쁜 날입니다. 화지약 노선배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형산파의 소망이 이뤄지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제갈청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날이네요.”
“나로서는 삼대 재액과 싸울 힘을 얻은 날이기도 하네요.”
“기뻐요. 하지만 불안하네요. 극락문이 이미 구지락의 죽음을 알았으니 지금쯤이면 분명히 움직임이 있어야 할 텐데….”
딸랑 딸랑.
갑자기 사도명 허리춤의 방울이 울기 시작했다.
은교교의 방울이었다.
사도명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기운 한 덩어리가 소리도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방울이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청미는 날아오는 붉은 덩어리를 뒤늦게 보고 소리쳤다.
“저, 저게 뭐죠?”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붉은 기운은 보였다 싶은 순간에 이미 사도명을 완전히 덮쳤다.
“안 돼!”
제갈청미가 몸을 날려 사도명을 안을 때, 축융봉 정상을 뒤흔드는 폭발이 굉음과 더불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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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이보시오! 그쪽으로 가면 아니 되오.”
약초 바구니를 등에 멘 노인이 놀라서 손을 저었다.
형산 축융봉.
산길을 오르던 중년인 한 명이, 노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안 돼? 무엇 때문에?”
“앞은 절벽이우. 추락하면,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다오.”
산의 햇살에 그을어 까맣게 낯이 탄 노인은 끌끌 혀를 찾다.
“죽고 싶은 건 아닐 거잖수?”
“하지만 길은 저렇게나 뚜렷하게 보이잖아, 늙은이.”
중년인이 앞을 가리켰다.
과연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멀쩡하게 뻗어 있는 땅이 보였다.
노인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혹 화신(火神)의 지맥(地脈)이란 걸 들어 보셨수?”
“산맥을 따라 흐르는 용맥을 말하는 거라면 대충 안다.”
노인은 중년인이 입은 비단 옷에 가죽신을 보고 한숨을 다시 한번 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비슷한데, 형산은 다르오. 일반의 용맥은 지하 수맥의 통로지만, 형산의 용맥은 땅속 깊숙한 곳 매우 뜨거운 기운의 통로라오.”
“지심극화 말이냐?”
“아는 거유? 그럼 설명이 쉽네. 지극심화가 때로 뻗고 때로는 휘감겨 돌아서 이런 기묘한 지형을 만들었지. 공간이 왜곡되어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한다오.”
“현혹한다?”
“없는 걸 보여준단 소리오.”
노인은 조금 전 중년인이 가리켰던 길을 다시 가리켰다.
“사막의 신기루 아시지? 보시오. 길이 사라지고 있지 않소?”
“아아! 과연.”
정말 기묘한 광경이었다.
분명 길로 보였던 곳에 뿌연 안개가 끼더니, 이내 한 치 아래가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변하였다.
“이것 재밌네.”
“신기한 게 아니라 위험했던 거유. 내가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그쪽은 이미 아래로 떨어져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거요.”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리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달리? 어떻게 달리?”
“가령 지금 보이는 저 절벽이 지심극화가 만들어내는 환영이고, 아까의 길이 실체일 수도 있지.”
“뭐,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처럼 생각도 멋대로구먼. 죽고 싶다면, 걸어가 보시든가.”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형산 축융봉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비루한 무림 문파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데 혹시 아나?”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한다는 거요?”
“형산파란 이름이야.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은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했지. 그 이유는 아나?”
“왜 알아야 하는지 묻지 않수?”
“형산파는 지심극화의 열기가 만들어 낸 자연의 진법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지.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가 있었어.”
중년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형산파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는, 사도명이 제갈청미가 함께 걸었던 긴 우회로밖에 없었다.
노인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이는 마치 지상에 위치하면서도, 지하 속 요새와도 같아. 지심극화의 힘으로 보호되는 곳.”
노인은 결국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네 놈은 누구냐?”
“하지만 때때로 지심극화가 요동치면, 없던 빈틈이 만들어지기도 하지. 조금 전처럼”
“누군지를 묻지 않느냐.”
“그런 통로를 통해서 사람들이 들어올까 봐, 형산파는 몇몇 중요한 기로에 제자를 세워 두지.”
노인이 호미를 들며 외쳤다.
“누구인지 말해. 설명 못하면, 네놈은 여기에서 죽는다.”
단순한 호미이건만, 그 끝에서 일어난 아지랑이가 중년인의 목을 감쌌다.
형산파 무인들은 누구나 극양의 무공을 사용한다.
중년인이 빙그레 웃었다.
“네가 약초를 캐는 약초꾼이 아니라 형산파의 외문 순찰 진시엽이 듯, 나 또한 단순한 유람객이 아닌 것이 당연하겠지?”
“크아악!”
진시엽이 비명일 질렀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호미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진서엽은 불타는 호미를 청년의 이마를 향해 던지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이, 이런 종류의 양기공은 우리 형산파에도 없다. 대체 뭐하는 놈이란 말이냐?”
진서엽은 본파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호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소리는 울리지 못했다.
뜨거운 불길이 날아와 진서엽의 입술과 얼굴을 단숨에 뒤덮었다.
“크아악!”
“이름을 원한다면 공야굉. 나이로 말하자면, 너보다 삼, 사십 년 쯤 오래 살았을 테고.”
중년인 공야굉은 얼굴에 이어 몸까지 불타고 있는 진서엽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도망치면서 호각을 분다? 제대로 배웠구나.”
“크아악! 뜨, 뜨거워. 크악!”
“그런데 어쩌나? 머리를 쓰는 일이라면 당히 우리 적암마계쪽이 훨씬 더… 아, 이런! 쯧쯧.”
공야굉이 혀를 찼다.
진서엽의 몸은 이미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린 후였다.
“죽은 귀신에 대고 혼자 떠든 셈인가? 재미없네.”
산 아래에서 여러 명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공야굉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파멸령주님을 뵙습니다.”
“명하신 대로 호남의 무림인들 중 천계의 신공을 은사 받은 자들은 모두 모이라 알렸습니다.”
공야굉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무림인들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다시, 지금은 절벽으로 보이는 갈림길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니 이젠 재밌는 일을 해야겠지? 저기, 무엇이 보이느냐?”
“저, 절벽이….”
“그렇다면….”
공야굉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 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열기가 뻗어나가, 절벽으로만 보이는 공간을 덮쳤다.
콰우우-!
회오리가 사방으로 뻗치며 일어나며 공감을 휘감았다.
“이제는 무엇이 보이느냐?”
“아! 저, 절벽은 사라지고 평범한 산길이 나타났습니다.”
“적암마계의 화염은 지옥염마의 화염이다. 축융의 불길을 능가하는 것이 마땅하지.”
공야굉이 새롭게 만들어진 길로 걸어갔다.
“따라 와라. 오늘, 형산파라는 이름을 영원히 지우자.”
무릎을 꿇었던 자들이 공야굉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극락문에 투신한 자들.
그들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탁한 잿빛이었고, 끈적거리는 늪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무림은 그들을 신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극락문이 전하는 천계의 무공이란 사실 염라탈혼이었다.
심마문의 염라탈혼에 의해 혼과 마음을 점점 잃어가는 마인.
그것이 바로 신인의 정체였다.
공야굉은 빠르게 걸었다.
조금 전 지심극화가 크게 흔들렸던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염마의 힘을 이은 내 본능이 말하고 있다. 축융지환이 완성되었다. 축융지존이 탄생했다.’
축융봉의 정상 바로 아래!
그곳에 과연, 완성된 축융지환의 기운이 머물러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공야굉은 금제에서 풀려나자마자 그에 대한 설명을 들었었다.
조화무제 사도명.
극락문이 지명한 무림의 공적!
공야굉은 내공을 극단까지 끌어올려, 붉은 공을 만들었다.
파멸염구는 지옥마염이 지닌 열기의 덩어리이며, 그 정화였다.
지심극화처럼 파멸염구의 열기도 공간을 왜곡할 수 있었다.
마땅히 들려야 하는 것을 들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소리가 없고 기척도 없다. 모르는 사이에 타서 죽어라.’
공야굉은 파멸염구를 사도명을 향해 던졌다.
지독할 정도로 정확했고, 소리조차 없는 공격이었다.
공교로운 운명일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사도명 허리의 방울을 흔들었다.
사도명의 시선이 파멸염구를 발견했고, 제갈청미의 눈도 뒤늦게 붉은 덩어리를 좇았다.
“안 돼!”
제갈청미가 사도명을 향해 몸을 날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꽈아아아-아아앙!
축융봉 정상을 뒤흔드는 폭발이 굉음과 더불어 일어났다.
불길도 치솟았다.
소리를 왜곡하던 지옥마염의 효력이 사라지자, 폭발의 굉음은 형산파 전체를 휘감으며 퍼졌다.
“푸하하. 파멸염구는 지옥의 불길 그 자체다. 죽어라, 축융의 후예여! 파멸령주의 이름으로 명한다. 형산파를 쓸어 버려.”
“와아아아아-!”
신인의 이름을 욕심내다가 마인으로 전락한 무인들.
그들이 달려 나갔다.
마인들의 고함에는 염라탈혼의 기운이 섞여 있어, 형산파 무인들은 고함만 듣고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때 담담한 목소리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울렸다.
“염라탈혼에 걸린 자들은 서서히 이성을 잃지. 하지만 직접 행동하면 탈혼의 속도가 빨라진다. 마인이 되는 속도 말이다.”
“어떤 놈이냐?”
공야굉이 소리쳤다.
“나는 불! 모든 삿된 것과 마장을 태우는 천상의 불이다!”
공야굉은 머릿속까지 관통하는, 한 줄기 벼락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내 쏘았던 파멸염구가 만들어 낸 불길로부터 서서히 위로 솟는 두 사람을 보았다.
파랗다 못해 희게 빛나는 불길로 온몸을 덮은 사도명과 그런 사도명이 안고 있는 제갈청미였다.
공야굉은 사도명을 덮은 불길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추, 축융이냐?”
고오오오-오!
하얗고 자그마한 원이 사도명의 정수리로부터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하나.
하지만 이내 수십 개의 작은 원들이 사도명의 머리 위에 떠오르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푸푸퓩!
퍼퍼퍼퍼-퍼퍼퍽!
작은 원은 반지였다.
하얗게 빛나는 반지는 축융의 반지라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 마!”
공야굉이 소리쳤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십 개의 반지는 염라마인들의 몸을 단숨에 꿰뚫고 나서야 사도명의 머리 위로 되돌아왔다.
사도명은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자신의 손가락으로 들어오는 축융지환을 잡으며, 제갈청미를 안은 채 바닥에 내려섰다.
“마, 말도 안 돼. 두 사람 모두 상처조차 없다고?”
공야굉이 소리를 지를 때, 사도명은 제갈청미를 내려놓았다.
그런 후에야 공야굉을 보았다.
“너는 스스로를 파멸령주라 불렀는데, 맞지?”
“그는 또한 염마입니다.”
상여검이 검을 뽑아서 공야굉을 가리켰다.
“축융 신의 오랜 숙적인 지옥염마(炎魔)의 후예입니다.”
지옥염마의 전설은 축융의 전설과 나란히 전해온다.
태초 음양이 나뉘었을 때, 신계로 올라간 뜨거움이 축융이 되었고, 마계로 침잠한 뜨거움이 지옥염마가 되었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정말로 묘하기 그지없군.”
사도명은 천천히 공야굉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오늘 화지약 노선배의 염원을 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타난 극락문 파멸령주가 지옥염마의 후예라니.”
공야굉은 자신도 모르게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는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불길을 만들어 왔었다.
모든 불길이 크고 강했다.
‘하, 하지만 저건….’
사도명의 머리 뒤에서 타오르고 있는 찬란한 불길과 그 빛.
그건 공야굉이 평생토록 만들어본 모든 불길을 모은 것보다 더 크고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