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53화 (53/168)

053화. 조짐, 그리고 조화

사도명이 무림맹주의 신분으로 제갈세가를 찾았을 때, 가주인 제갈평이 그를 가장 먼저 맞이했다.

그는 천하십자록을 집필한 사람이었고, 제갈청미의 아버지였다.

사도명은 2년 전 무림맹에서 벌어졌던 일과, 얼마 전 무당산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말했다.

제갈평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사도명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주었고, 또한 사도명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도 알려 주었다.

“아득한 시절, 무림이 태동하고 성장하던 시절에 세상에 던져진 예언이 있습니다.”

제갈평은 제자를 시켜 양피지 한 장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곳에는 기이한 모양새의 글이 적혀 있었다.

“조짐이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고 계실 겁니다.”

양피지에 그려진 갑골문.

제갈평은 설명을 시작했다.

“거북의 등껍질이 갈라진 모습이 조(兆)이며 배의 갈라진 틈이 짐(朕)이라 불립니다. 이건 조짐으로 읽어낸 무림의 미래를 갑골문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조짐? 무림의 미래?”

사도명은 미간을 찡그린 채 양피지를 오래 보았다.

하지만, 읽어내지 못할 글로 미래를 짐작할 능력이 사도명에게는 없었다.

제갈평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시대의 분기점.”

“분기점이라고요?”

“이 태초의 예언은 검성께서 강호에 던지신 예언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무림이 분기점을 맞게됨을 예언하고 있지요.”

“멸망… 을 뜻하는 거요?”

제갈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데 멸망은 멸망이지만 멸망이 아니기도 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분기점이란 나무의 가지의 끝부분과 같습니다.”

제갈평은 갑골문 중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조짐은 말합니다. 분기점에서 삼재액(三災厄)이 동시대에 출현할 것이라고요.”

“세 가지의 재액? 그 중의 하나가 아수라혈교인 거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도 우내의 삼대마문!”

삼대마문은 이미 극락문이라는 이름에 나타나 있었다.

“두 가지만으로도 한숨이 나는데 세 가지라는 거요? 그럼 마지막 세 번째 재액은 대체 뭐요?”

제갈평이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합니다. 알아내고자 노력 했으나,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제갈세가의 정보망으로도 알아내지 못했다면, 다른 누가 나서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도명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조와 짐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집니까?”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무림은 멸망한단 겁니까?”

“이미 말했습니다. 나뭇가지의 끝. 더 이상 자라지 못하거나! 새로운 싹이 돋아 더욱 융성하거나.”

사도명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제갈평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멸망의 운명이 융성의 운명과 같이 예언되었다는 겁니까?”

“언제나 끝은 새로운 시작. 깊은 절망이 높은 희망을 잉태하는 법. 그러하기에 예언은 피할 수 없지만 또한 극복될 수 있는 거지요.”

제갈평이 양피지에 적힌 조와 짐의 갑골분을 쓰다듬었다.

“천하에 제갈이란 이름이 알려지기 전부터, 우리의 선조는 새로운 희망을 연구했습니다.”

사도명은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참으며 제갈평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두 개의 글자를 찾아냈습니다.”

사도명의 눈이 다시 커졌다.

제갈평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짐작하시지요?”

“설마? 그걸 믿으란 거요?”

“믿으셔야 합니다. 맹주께서 스스로 별호를 말하였을 때, 제가 곧바로 믿었던 이유지요.”

제갈평이 또렷하게 말했다.

“두 개의 글자란 다름 아닌 조와 화. 바로 조화입니다.”

사도명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고 있다. 생각했었다.

한데 까마득한 옛날, 한낱 거북의 등껍질에 이미 자신의 운명이 예언되어 있었다니.

“하, 하지만 제가 비록 조화라는 이름을 잇지만, 모든 재악을 감당할 능력은 없습니다.”

“미래를 읽고, 세상을 걱정했던 것이 비단 저희 제갈세가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명은 주먹을 쥐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검성 설운경.”

“천라대제님도 마찬가지. 수많은 영웅들이 이 시대를 걱정하여 자신의 힘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세상이 그 영웅들과 그들이 남겨놓은 힘을 어떻게 부르는지, 맹주님도 아시지요?”

사도명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

아득한 태고부터 저마다의 방법으로 희망을 찾은 사람들이 세상에 남겨 놓은 빛!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고금구천강.”

사도명의 말에 제갈평이 웃으며 뒤를 이었다.

“네. 그리고 환우구대기보!”

청옥소검과 천라옥벽은 이미 사도명과 인연이 닿았다.

또 다른 고금구천강인, 파천도제 호불군이 남긴 천중무원신공이야말로 사도명이 조화무제라 불리는 바탕이었다.

“결국 고금구천강의 모든 인연은 맹주께 모일 겁니다.”

제갈평이 지금까지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미녀를 보았다.

“맹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때를 맞춰 또다른 환우 9대 기보인 축융지환의 소식이 들려온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합니다. 청미야!”

양피지를 가져왔던 미녀가 사도명을 향해 포권했다.

“형산의 하늘에 축융의 별이 떴어요. 극양의 진기를 익힌 무림인이라면 모두 그 기운을 느낄 겁니다.”

사도명은 제갈청미의 몸에 흐르는 극양의 진기를 느꼈다.

“혹시 소저도?”

“제 몸속의 청강화염수도 계속 끓어대고 있어요. 제가 형산으로 안내할게요. 곧, 축융의 반지가 나타날 겁니다.”

**

“웃으세요. 웃어야 합니다.”

상여경이 외쳤다.

자신의 막상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어야 한다 소리치는 것이다.

제갈청미는 무서운 열기가 뿜어 나오는 방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오열한다.

“사부의 소원이 이뤄지시는 순간입니다. 제발 웃어 주세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웃을 수밖에 없다.

제갈청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축융지환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슬퍼합니까?”

“지심극화! 땅속 깊은 곳의 지극한 불로 극양진기의 정화이며 축융의 상징!”

“제가 여쭙는 것은….”

“우리 형산파는 오래 전, 그 불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사람 그 자체뿐임을 알아냈습니다.”

“사람 그 자체?”

“사람의 몸과 마음요.”

상여경이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닦았다.

제갈청미는 미간을 찡그렸다.

사도명의 말을 되새겼다.

그는 축융지환의 탄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최고의 인재와 그 희생이라 말했었다.

그리고 제갈청미는 산봉우리를 넘으면서 희생자들을 보았다.

“설마 축융지환이란 것이 신외지물이 아닌 겁니까?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은 설마…?”

“사부는 어릴 때 축융의 반지가 되기로 맹세하셨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축융지환이 되면, 자신을 가질 사람은….”

상여경이 억지로 미소지었다.

“사랑하는 사람. 오직 그 한 명뿐이라고요.”

제갈청미는 비로소 깨달았다.

금강도객이 그토록 화지약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나러 오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본래 살아서는 영원히 다시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금강도객이 화지약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축융환을 어느 정도 완성시킨 단계였다.

돌아온 금강도객에게 축융지환을 주겠노라는 의미는, 자신의 영혼을 바쳐 축융지환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가지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랬었나? 그래서 금강도객은 형산에 올 수가 없었구나.”

금강도객은 화지약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리워서 만나러 간다면, 화지약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녀가 목숨을 버리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영원히 기다리게 만드는 길 뿐이었다.

제갈청미는 열기가 뿜어 나오는 방을 보았다.

“그, 그런 희생을?”

“환우구대신보는 고금구천강께서 멸망의 시대를 대비하여 남긴 힘입니다. 사부는 그 희생의 서약을 깨뜨릴 수 없으셨지만….”

상여경이 눈물을 닦았다.

“자신의 분신만은, 사랑하는 분에게 넘겨주려 했던 겁니다.”

“아아!”

방에서 전해오던 열기가 빠르게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상여경이 다시 몸을 떨었다.

모든 상황이 끝났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축융지환의 완성은 화지약이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삐-걱!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사도명이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사도명의 머리 위에 붉게 빛나는 커다란 환 하나가 맴을 돌고 있었다.

환은 붉은 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파란색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하얗게 백열하면서 점점 크기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하얀색은 가장 뜨거운 태양의 색! 저런 극양의 기운을 몸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화지약 선배는…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화지약에게 극양의 강기란 평생의 사랑과 같았을 것이다.

버릴 수 없지만, 간직하려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한 고통은 금강도객이 평생 참아냈던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그리워했고, 또한 그 사랑으로 서로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은 사랑 자체로 행복하지만 때로는 그 행복 자체로 인해 불행한 것이다.

화지약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상여경은 무릎을 꿇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부! 흑흑흑, 사부님!”

화지약을 반노환동까지 하며 수명 이상으로 살아있도록 만든 원동력은 한 가지였다.

금강도객을 다시 보고자 하는 그리움!

이제 화지약은 모든 것을 버리며 평생토록 품고 키웠던 기운마저 밖으로 토해냈다.

강기의 환은 점점 크기를 줄이더니, 이윽고 작은 반지처럼 변해 사도명의 눈앞을 떠다녔다.

사도명이 눈을 떴다.

떠도는 반지를 붙잡아서, 자신의 왼손 중지에 꼈다.

반지는 스스로 크기를 바꾸며, 사도명의 중지에 안착했다.

반지는 화지약의 평생이었다.

또한 그녀의 염원이었고, 아픔이었으며 그 자체로 사랑이었다.

“두 분은 다른 세상에서 이제 만나셨습니까? 그곳은 어떤 의무도 없으니, 영원히 평안하시길.”

사도명이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자, 주저앉은 상여경과, 서 있는 제갈청미가 보였다.

두 사람은 모두 울고 있었다.

사도명도 자신의 눈 끝에 고인 습기를 천천히 닦아 냈다.

형산파 제자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허공에 떠 있는 사도명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사도명을 떠 있도록 만드는 것은 축융지환의 극양지기!

사도명이 오른손을 들어 건너편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축융환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많은 영혼이 모여 있었다.

지심극화에 사로잡힌 영혼.

“진기로 강기를 만드는 건 어렵소. 하지만 그 강기를 실체 있는 사물로 만드는 일은 숫제 차원이 다르게 어렵지.”

사도명의 손가락이 희생당한 영혼들이 모여 있는 봉우리를 향한 채 둥근 원을 그렸다.

“압축과 압축을 더하고 또다시 압축과 압축을 더하여, 지심극화를 반지로 승화시킨 화지약 노선배! 그 힘을 물려받은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사도명의 손에서 하얀 서광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전혀 뜨겁지 않으나, 필요하다면 세상 무엇보다 뜨거울 수 있는 빛이 건너편 봉우리를 휘감았다.

“희생하신 분들의 구제!”

콰-우우웅!

그 빛은 봉우리를 감았다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상승하는 빛을 타고,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희뿌옇게 빛나는, 작은 광채들이 수 없이 보였다.

“영혼인가요?”

제갈청미가 물었다.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갈청미의 옆에 내려섰다.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신 분들. 그분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하고 당연하오.”

형산파의 제자들이 모두 그를 보았다.

상여경은 사도명 왼손의 반지를 보며, 마침내 울음을 삼켰다.

“형산의 제자들은 모두 경배하라. 축융지환의 계승자시다. 불의 신을 뒤를 잇는, 새로운 축융지존이시다.”

화지약이 전전대 이전의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제자인 상여경은 이미 형산파 최고의 배분이었다.

형산파 제자들이 일제히 사도명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축융의 화신을 배알합니다.”

“형산의 제자가 삼가 무림의 맹주님을 뵙습니다.”

사도명은 형산파의 제자들을 한 명 한 명씩 둘러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음으로 정리했다.

“무림맹주로서, 그리고 축융환의 계승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려 합니다.”

“하명 하소서.”

“천하 무림이 위험합니다. 형산파가 나서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영광스럽게도!”

상여경이 포권하면서 외쳤다.

“다만 저 역시 형산파를 대표하여 무림맹주께 바라옵건데, 공을 세우면 형산파에도 19성좌의 자리를 허락하시겠습니까?”

“제가 하려는 두 번째 부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저는 축융의 힘으로 무림맹 19 성좌와 9대 문파를 뛰어 넘어 보려 합니다. 형산파의 이름을 그 모든 문파 위에 우뚝 세워보려 합니다. 이것도 도와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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