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52화 (52/168)

052화. 축융의 반지

“흑흑. 흐흐흐흑.”

석상은 계속 울었다.

사도명이 울고 있는 석상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대 또한 나를 보내기 싫어했음을 아오. 하지만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

석상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울음은 아주 낮은 호흡으로 변했다가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사도명은 울음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석상을 안고 있었다.

제갈청미는 왠지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죠?”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몸을 떼어내며, 사도명이 제갈청미에게 말했다.

“내가 안은 것이 아니오. 제갈 소저도 이미 알잖소?”

“금강도객님인 맞아요?”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태자였던 금강도객은 형산파를 찾다가 남악진군사에서 형산신녀를 만났소.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천천히 걸어서 형산파로 갔지.”

사도명이 덧붙였다.

“짧은 길이었소. 하지만 청춘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기엔, 또한 충분하게 길었다오.”

제갈청미는 이제는 울음을 그친 미녀의 석상을 보며 물었다.

“그럼 이 석상은 화지약 노선배의 젊은 시절을…?”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도객께서 직접 만드셨소. 만드는 내내 두 분은 헤어져야 하는 운명에 슬퍼했기에, 그러한 슬픔이 고스란히 석상에 담길 수밖에 없었소.”

제갈청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분이 그토록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왜 헤어져야만 했던 건가요?”

“한 분은 무림맹으로 가서 맹주의 직위에 올라야만 했고, 다른 한 분은 여기에 남아서 형산파의 꿈인 축융의 반지를….”

사도명이 여러 번 입술을 깨물더니 이윽고 한숨처럼 말했다.

“축융의 반지를 만드는 일은 결코 간단한 과정이 아니오.”

“알 것 같아요. 간단하다면 형산파가 이토록 오래 봉문하며 숨어 있을 리 없죠.”

제갈청미가 말했다.

“제가 모르겠는 건요, 그 일과 두 분의 이별은 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축융의 반지를 만드는 방법은 오직 하나요! 절세의 재기와 처절한 희생.”

“그 희생이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건가요?”

“형산을 떠나기 전에 금강도객과 형산 신녀는 재회의 약속을 나누었소.”

“짐작하고 있어요. 재회를 약속하고도 금강도객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떤 거잖아요? 그래서 화지약은 그토록 금강도객님을 원망하는 것 아닌가요?”

사도명의 시선은 여전히 화지약의 석상을 떠나지 못했다.

“세상의 일이 그처럼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정이 있어요?”

사도명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금강도객은 맹주가 된 후 자신을 휘감고 있는 아수라혈교의 음모와 조화의 운명을 깨달았소.”

“무림맹의 맹주를 대대로 아수라혈교에서 배출해 왔다는 무제의 말을, 솔직히 저는 아직도 믿기가 어려워요.”

“아무튼 금강도객께서는 치열하게 싸웠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생각만은 잊지 않았다오. 돌아가야 하는데. 만나야 하는데.”

사도명의 음성이 또다시 금강도객의 것으로 바뀌었다.

달라진 음성으로, 사도명은 석상을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언제나 달려오고 싶었지. 그럴 때마다 생각했소.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만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소.”

제갈청미는 금강도객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숫자만큼의 사랑이 존재한다.

저마다의 사랑을 일일이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방은 완전하게 밝았다.

사도명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나의 봉우리만 더 지나면 축융봉이군. 갑시다. 내 머릿속에 깃든 금강도객님의 영혼이 살아서 만나지 못했던 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드립시다.”

**

네 번째의 봉우리는 가팔랐다.

산을 오르다가 제갈청미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더워지는 것 같지 않아요?”

산이란, 위로 오를수록 기온이 떨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제갈청미는 오를수록 점점 더워진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축융의 반지에는 반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뿐 사실은 반지가 아니오. 그건 일종의 그릇이지.”

제갈청미가 빙그레 웃었다.

“갑자기 반지 얘기를 꺼내는 건, 올라갈수록 더워지는 이 봉우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죠?”

“축융의 반지를 만드는 일은 사람으로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우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오. 귀 기울여 보시오. 지금도 어디선가 고통에 찬 비명이 들릴 거요.”

제갈청미가 쫑긋 귀를 세웠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제갈청미는 즉시 달려갔다.

제갈세가 특유의 청운미리보가 펼쳐지면서, 그녀의 몸은 암석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거대한 암석 뒤쪽에서, 놀람에 찬 제갈청미의 탄성이 들려왔다.

“아! 이럴 수가….”

사도명은 매우 천천히 걸었다.

그는 암석 너머에서 제갈청미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도명이 아닌 그의 마음 속 ‘금강도객’이 그것을 보기 싫어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사도명은 ‘스스로의 걸음’으로 축융봉을 올라야했다.

화지약이 요구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화지약은 비로소 사도명 속의 금강도객과 마주볼 것이다.

이윽고 암석을 돌아가자, 제갈청미가 놀란 이유가 나타났다.

화르르르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악. 크아아아악!”

비명도 계속 흘렀다.

불은 풀이었고, 나무였고, 나무에 핀 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에서는 타오르는 불로 만들어진 나무와 풀과 꽃과 바위가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뭔가요?”

“청강화염수를 익힌 몸이니, 알아보실 수 있잖소.”

“이건 불이에요. 하지만 불이 어떻게 나무와 풀의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죠?”

“형산 아래, 지극히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지심극화의 불이오.”

“다시 묻지만 제 말은….”

제갈청미가 미간을 찡그렸다.

“불길이 어떻게 나무와 풀, 바위의 형상까지 흉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불 속을 자세히 보시오.”

제갈청미는 안력을 돋웠다.

불길 속을 자세히 보고 나서,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사, 사람이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불길 속에 사람이 보였다.

불의 나무, 불의 풀, 무엇이건 가릴 것 없이 사람이 존재했다.

고통에 찬 비명의 근원은, 불속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보다 제대로 말하자면, 죽은 사람의 영혼!”

사도명이 말했다.

“모두가 축융의 반지를 만들기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이오.”

“아!”

“지심극화를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려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소. 그 사람들의 영혼은 여전히 불의 기운에 사로잡혀 스스로 나무가 되고 풀이 되어 있는 거요.”

제갈청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길로 만들어진 풀과 나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자신이 보는 현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믿기 쉬운 일보다 믿기 어려운 일이 훨씬 더 많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그럼 이 많은 불길들이 모두 다 사람이란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희생자들. 축융의 반지를 얻고자 자신을 희생한, 형산파의 제자들이오.”

사도명은 불의 산을 천천히 걸어갔다.

“형산신녀께서 나타나신 이후에야 형산파는 비로소 희생자를 더이상 만들지 않게 되었다오.”

제갈청미도 사도명의 뒤를 따라서 불길 사이를 걸었다.

불은 생생했고, 그 뜨거움의 정도만큼이나 슬펐다.

제갈청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아. 사람의 노력이란 이처럼 비장한 거군요.”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지.”

“신녀는 금강도객님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으셨나 봐요.”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판단도 같소. 그래서 반드시 걸어서 오라고 말한 것이오.”

“무제 마음 속의 금강도객님은 뭐라 말하고 계신가요?”

사도명은 입을 다물었다.

금강도객의 기억이 전하는 회한과 슬픔을 단지 몇 마디의 말로 전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제갈청미가 다시 물었다.

“신녀는 금강도객님을 원망한 게 틀림없네요. 그래서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보여주고, 그 아픔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휴우.”

사도명은 오직 긴 한숨만을 내쉰 다음에 제갈청미를 보았다.

“제갈 소저는 혹시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있소?”

“어, 없어요.”

제갈청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지금 왜 지금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과 똑같이 힘이 드오. 더구나 한 번 떠나면, 두 번 다시 살아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제갈청미가 놀라서 외쳤다.

“금강도객님은 그렇다면, 처음부터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건가요?”

사도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분은 너무나 돌아오고 싶어 하셨소.”

“하지만 무제께서 방금하신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이미 네 개의 봉우리를 모두 넘었소. 곧 저기의 축융봉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사도명이 앞의 봉우리를 가리키자, 제갈청미가 말을 끊었다.

“무제는 아직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지 않았어요.”

“듣기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겠소?”

사도명의 말에 제갈청미의 눈이 반짝거렸다.

“형산파에 도착하면 모든 질문의 답을 알게 될 거란 말씀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는 그저….”

사도명이 나직이 덧붙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과, 그 운명에 가슴 아플 뿐이오.”

**

형산파를 찾는 일은 쉬웠다.

화지약이 상서경을 데리고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짐작이 맞았죠? 역시나 화지약 노선배는 금강도객님께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니까요.]

제갈청미가 전음으로 말했다.

“노선배님.”

사도명은 포권하면서 화지약을 향해 고개 숙였다.

화지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상의 울음이 사라졌더구나. 네가 한 일이냐?”

사도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서 직접 하신 일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화지약이 사도명의 눈빛 속에 깃든 누군가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사도명 속의 기억이 말을 했고, 사도명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화지약에게 전했다.

“정말 오고 싶었다고 하십니다. 애써 오지 않는 것이 신녀님을 사랑하는 최선이었다고 하십니다.”

화지약은 사도명을 오래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도명 속에 깃든 누군가를 아주 오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눈물은 천천히 흘렀다.

하지만 일단 흐르기 시작하자, 계속 흐르고 다시 흘러서 화지약은 자신의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부님.”

상서경이 옆에 서 있다가, 놀라서 화지약을 불렀다.

“아니, 아니야. 나는 괜찮다. 정말로 괜찮아.”

화지약은 손을 저었다.

“저 말을 듣고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저, 단 한 마디의 말을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어.”

“수 백, 수 천 번을 혼자 말했다 말하십니다. 살아서도! 그리고 생명이 다한 후에도!”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이 말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노선배의 모든 기억을 보았고, 그 속에 깃든 오직 하나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화지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네. 당연히 믿어.”

그녀는 계속 울었다.

울면서, 화지약은 상서경을 향해 말했다.

“준비를 하거라. 축융환을 세상에 내보낼 때가 되었다.”

놀란 상서경이 소리쳤다.

“사부님!”

화지약은 상서경을 보지 않고, 오직 사도명만을 보았다.

“혁신! 헤어질 때 우리에겐 각자 해야 하는 일이 있었지요. 그 일들은 운명을 다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상서경이 제갈청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화지약이 사도명을 보면서 다시 말했다.

“다시 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와서 내가 완성한 나의 운명을 봐 준다고 말했잖아요!”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달라진 음성, 금강도객의 음성으로 말했다.

“오고 싶었소. 하지만 내가 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절대로 올 수가 없었소.”

상서경은 다시 한번 제갈청미를 끌었다.

“어서 나가요.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요.”

화르르르르-!

화지약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불은 강력했고 뜨겁기 그지없어서, 제갈청미는 나가기 전에 사도명을 보며 손짓했다.

“여기 있으면 위험… 아!”

제갈청미는 사도명의 왼손에서 일어난 부드러운 기운이 자신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느꼈다.

제갈청미는 상서경과 함께 밖으로 밀려나왔고, 즉시 문이 닫혔다.

콰-앙!

닫힌 문 안에서, 끔찍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열기가 뿜어 나왔다.

“저, 저게 뭐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축융지환의 탄생입니다.”

상서경의 뺨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축하해 주세요. 축융의 반지가 세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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