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형산괴사
소녀는 한참 동안 사도명을 올려다보았다.
사도명의 미소를 오래 바라본 후에야, 소녀가 비로소 물었다.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죠?”
사도명은 한 순간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형산신녀 화지약.”
소녀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휴우.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정확히 말해, 제가 아니라 한 분의 기억이 노선배님을 기억합니다.”
소녀는 사도명을 물끄러미 보다가, 달라진 말투로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
사도명은 오른 손을 들어 허공에 머리 크기의 원을 그렸다.
화지약의 눈이 커졌다.
사도명은 손칼을 만들어 허공에 그린 원을 반으로 잘랐다.
“그분은 살아 있는 내내, 심지어 돌아가신 후에도 청성의 푸른 하늘과 형산의 기암괴석을 잊지 못했습니다.”
화지약은 사도명이 허공에 그린 그림의 의미를 안다.
천하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그 그림을 알고 있었고. 그 둘 중의 한 명이 바로 화지약이다.
화지약은 결국 참지 못하고 사도명에게 물었다.
“그와는 어떤 관계냐?”
“그분의 기억을 이었습니다.”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그분이 제게 부탁하셨어요.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 지켜 달라고.”
화지약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도명과 화지약이 주고받는 대화의 의미는, 아무도 몰랐으며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 여자애가 정말 반로환동한 고수인가요? 형산신녀 화지약이란 이름은 제갈세가의 정보망 속에도 흔적이 없어요.]
제갈청미가 사도명에게 전음을 사용해서 물었다.
중년 여인이 화지약의 옆으로 오더니,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사부. 이 사내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기에 놀라십니까?”
화지약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휴우. 극락문이 공적으로 지정한 조화무제. 게다가 아마도 내 남자의 제자인 모양이다.”
화지약의 말에, 중년 여인 상서경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하, 하지만 금강도객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
콰아아아아-!
돌연 화지약의 몸으로부터 강력한 불길이 사방으로 뻗었다.
“그는 살아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죽고 나서야 약속을 지킬 사람을 보냈다고? 이 미묘한 시기에! 축융지환이 영글어가는 시기에! 그런 우연은 너무 억지이지 않느냐, 조화무제?”
화지약의 몸이 불길을 타고 허공 높이 떠올랐다.
콰아아!
불길의 가지 하나가 아래로 뻗어 나와 상서경을 휘감았다.
상서경의 몸은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는 채, 화지약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면, 너는 형산파를 찾고 있는 거겠지?”
사도명이 허공에 떠 있는 화지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줄 리 없다는 걸 너도 알 것이다. 한 번 어긴 약속을 다시 지키는 일이 쉬워선 안 되지.”
불길을 온몸에 휘감은 채로 떠 있는 화지약의 모습은 흡사 축융의 화신처럼 느껴졌다.
“스스로의 걸음으로 와라.”
사도명은 곧바로 물었다.
“스스로의 걸음이라는 의미는,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까?”
화지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휘감고 있는 불길이 하늘을 가르며 멀어졌다.
콰아아-아!
사도명은 몸을 돌려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제갈청미를 보았다.
“스스로의 걸음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 같소?”
제갈청미는 대답하지 않고 사도명의 뒤쪽 허공만을 보았다.
멀어지는 화지약의 불길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불길이 사라지자, 제갈청미가 큰소리로 외쳤다.
“축융봉의 동쪽이에요. 형산파는 바로 저곳에 있어요. 구지락은 더이상 필요 없을 거라는, 무제의 판단이 옳았어요.”
사도명과 제갈청미는 형산파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형산파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안내자로서 극락문 행운령주를 정한 사람은 제갈청미였다.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청미는 자신의 정보력을 발휘해, 행운령주를 찾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으로써 낭아보주 초엽을 만날 것을 제안했었다.
그런데 이제 사도명과 제갈청미는 형산파의 위치를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낸 것이다.
“당장 가요. 무제에겐 허공을 날 수 있는 신법이 있잖아요.”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오.”
“왜요?”
“스스로의 걸음.”
“아!”
제갈청미는 그제야, 조금 전 사도명이 했던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차렸다.
“쉽사리 갈 수 있는 장소에 형산파가 있다면,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왔겠소?”
“…흔적을 감추는 진법? 숨겨진 장소? 혹시 지하?”
“어느 쪽이건 한 가지는 명확하오. 우리가 쉬운 방법으로 가면 화지약은 납득하지 않으실 거요.”
사도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화지약이 납득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절대 축융의 반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고.”
**
형산은 72개의 봉우리와 기암괴석으로 유명하다.
사도명과 제갈청미는 그중의 제일봉인 축융봉에 올라야 했다.
“가장 높은 곳을 오르려면, 우리는 다섯 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해요. 굳이 걸어서 넘는 의미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두 사람이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는 저녁이었다.
때문에 첫 번째의 봉우리를 넘었을 뿐인데도 밤이 깊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내공의 고수라 밤의 어둠에 방해받지는 않았다.
산짐승의 위험을 걱정할 수준도 당연히 아니었다.
제갈청미는 오직, 신법을 이용해 빠르게 건너뛸 수 있는 길을 굳이 걸어서 천천히 지나야 하는 상황만을 불평했다.
“화지약은, 오직 애써 걸어온 노고만을 인정하겠단 거죠?”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제갈 소저는 본래 이처럼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잖소?”
“틀렸어요. 모든 여자는 말이 많아요. 궁금한 일이 생겼을 때는 아주 말이 많고, 저처럼 예쁜 여자는 특히나 말이 많죠.”
사도명은 가슴 한쪽 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옴을 느꼈다.
오직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아는 여자만이 이처럼 얘기한다.
은교교도 그랬었다.
사도명은 제갈청미의 말 속에서 은교교를 떠올린 것이다.
“어떤 여자는 소저처럼 예쁘지만, 말이 많지는 않았소.”
제갈청미가 빙그레 웃었다.
“교교가 생각난 거군요.”
은교교와 제갈청미는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있는 친구였다.
사도명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한 차례 쓰게 웃은 후에,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금강도객 곽혁신. 제3대의 무림맹주이기도 한 그분이 화지약 노선배를 처음 만났던 곳은 아까 우리가 출발한 남악진군사였소.”
“아!”
“그리고 친해진 두 사람은 걸어서 형산파로 갔지. 바로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제갈청미는 비로소 ‘스스로의 걸음’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다.
“화지약은 무제에게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게 하는 건가요?”
“사실은 내가 아닌 금강도객님을 걷게 하고 싶은 거겠지. 제갈 소저가 아닌 자신이 바로 그 옆에 서기를 원하고.”
사도명이 말을 이어갔다.
“형산파는 특이하오.”
“저도 알아요. 형산파는 매우 큰 절망과 좌절을 지녔죠.”
제갈세가는 무림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가문이다.
그들은 십자천하록을 집필하는 등, 무림의 대소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하고 있었다.
천하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제갈 세가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형산파는 본래 오대문파에 속하는 명문이었어요.”
제갈청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대문파가 구대문파로 변하는 확장의 과정에서, 오히려 명문의 지위를 잃고 말았어요.”
성공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몰락의 충격은 대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형산파의 몰락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 사소한 몇 가지 원인이 우연히 겹치면서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시대의 변화, 인재의 부족, 그리고 사소하지만 부적절한,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처신들!
바람이 불면 파도는 흔들린다.
여러 갈래의 파도가 섞이다 보면 유난히 높은 파도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의 이유도 유난히 낮은 파도도 만들어지는데, 구대문파로 확산되던 시대의 형산파가 하필 그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구대문파에서 탈락한 후 형산파는 만회의 방법을 찾고자 했다.
“제가 아는 건 그 정도예요. 형산파가 다시 영광을 재현할 방법을 찾아다닌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해요.”
제갈청미가 말을 마치자, 사도명은 자신이 아는 내용으로 그 뒤를 이었다.
“형산은 양기가 강한 곳이오. 축융의 전설에서 착안한 형산파는 극양의 기운을 축약하는 방법에서 탈출구를 찾고자 했소.”
제갈청미는 사도명이 말하는 바를 단숨에 알아들었다.
“축융의 반지?”
“형산파는 불의 신 축융의 이름을 이어받은 축융대제가 세운 문파기도 하오. 형산파의 원로들은 고금 미증유의 극양지기를 한 곳에 몰아넣을 방법을 오랜 연구 끝에 찾아냈지.”
제갈청미는 축융지환의 전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축융대제가 고금구천강에 속하는 전설의 무인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형산파는 축융지환이 완성되면, 다시 구대문파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소.”
사도명이 말을 계속 이었다.
“무림맹이 처음 만들어질 때 형산파는 십구 성좌에도 속하지 못했소. 그들은 무림맹 지부 중의 하나가 될 것만을 요청받자 무림맹에 참가조차 않았소. 봉문을 택했지.”
제갈청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어요. 본가에 남겨진 기록에서 읽었어요.”
“봉문한 형산파는 축융지환을 완성하려고 더더욱 노력했소.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게 되는 거요. 형산신녀 화지약!”
사도명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금강도객 곽혁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편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형산파를 끌어들이기 원했소. 그래서 금강도객님이 태자의 신분일 때 형산파에 왔던 거요. 형산파를 무림맹에 초청하기 위해서.”
**
두 사람이 세 번째의 봉우리를 넘어설 때, 날이 밝기 시작했다.
첫 번째의 이상한 일은, 바로 그 순간에 벌어졌다.
어디선가 울음이 들려왔다.
깊은 산의 차가운 아침이 어둠을 몰아내며 밀려오는 시각에, 사도명과 제갈청미는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흑흑. 흐흐흑!”
울음은 구슬펐다.
기암과 괴석이 즐비한 모퉁이를 돌아서, 울음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려왔다.
모퉁이를 돌아선 사도명과 제갈청미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흑흑. 흐흐흐흑.”
막 떠오른 햇살 아래에서, 아리따운 여인 한 명이 울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미녀는 처음부터 눈물을 흘릴 수가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제갈청미의 눈이 커졌다.
미녀는 울 수 없어야 마땅했다.
울고 있는 미녀는 사람이 아니라 돌이었기 때문이다.
“형산에 기묘한 돌과 나무가 많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하지만 혼자 우는 돌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제갈청미가 말할 때, 사도명은 미녀의 석상 앞으로 갔다.
그는 석상의 눈을 보고, 뺨을 보고, 아래로 내린 팔을 보았다.
“돌이 우는 것이 아니오. 돌을 조각한 사람과 그 대상이 된 사람의 마음이 돌 속에 하나로 녹아들었고, 바로 그렇게 남겨진 마음이 계속 우는 거요.”
제갈청미가 다가와서 석상의 표면을 만졌다.
“돌에 마음이 깃드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나는 진기에 깃든 여러 사람의 마음을 물려받았소.”
사도명이 되물었다.
“진기에도 마음이 깃들 수 있는데, 왜 돌에는 깃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제갈청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돌에 새겨진 마음을 우리 마음이 느끼는 거군요.”
“슬픔이란 본래 마음이오. 울고 있는 마음을 느낀다면 그 울음도 들을 수 있어야 마땅하지.”
“자세히 보니,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예요.”
제갈청미가 석상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석상을 만든 사람은 분명 이 여자를 사랑했을 거예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하지 못했겠죠?”
“당연히 그랬소. 또한 무척 슬퍼했다오.”
“슬퍼했다고요?”
“석상의 대상이 된 여인도, 석상을 만든 남자도 어찌나 슬펐는지. 생명이 없는 돌조차 그 슬픔을 오롯이 담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사도명이 석상을 쓰다듬었다.
뺨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어깨와 등을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내렸다.
제갈청미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무제는 석상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를 아시는군요.”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를 두고 떠나기 싫었소.”
“지금 무슨 소리를, 아!”
제갈청미는 사도명의 목소리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 깜짝 놀랐다가, 이내 사도명의 말이 자신이 아닌 석상에게 전하는 것임도 알아차렸다.
달라진 목소리는, 사도명의 몸에 깃든 또 다른 영혼의 것이었다.
“혹시 금강도객님의 목소리인가요?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