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그녀를 구하시오
“무릉촌?”
사도명의 말에 법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은령선자는 무릉촌을 찾아갈 것을 제안했지.”
사도명은 무릉천과 그곳에 사는 친구를 떠올렸다. 연자강은 본래 법허의 제자이기도 했었다.
“은령선자가 말했소. 무릉촌을 찾아가면 자강이 도울 거라고. 나의 제자였다가 파문당한 연자강이 무릉촌을 이끌고 있으니, 그들을 찾아가면 된다고.”
은교교에게 그 말을 알려준 사람은 사도명 자신이었다.
무릉촌은 검성이 세상을 위해 남겨 놓은 안배였다.
“제가 교교를 무릉촌에 데려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연자강과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대비하기로 결정 내렸소. 무당과 곤륜이 힘을 남겨야 가능한 일이었지.”
격한 싸움의 와중에 힘을 남기는 일은 쉽지 않다.
살아남는 사람이 있으려면, 희생당하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소림. 아미타불! 나의 소림은 그러한 결정으로 정말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고 말았소.”
사도명은 소림이 거의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완전한 멸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당과 곤륜을 위해서! 그들의 힘을 남겨두기 위해서!’
법허의 뺨을 타고 한 줄기만의 눈물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깊이 잠들지 못하오. 늘 악몽을 꾸지. 소림의 영령들에게, 죽어간 제자들에게 너무나 미안하여서.”
승려의 눈물은 평범한 사람의 눈물보다 깊고 아팠다.
사도명 또한 깊고 아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무릉촌에는 갔습니까?”
“갔었소. 나와 은령선자와 곤륜의 운학자, 운진자, 운송자가 모두 함께 갔었다오.”
법허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당이 이곳 지하에 자리를 잡고 힘들게 살려 낸 후기지수들의 개개조화를 이루기로 한 사이에, 우리는 무릉촌에 찾아갔지.”
“자강을 만났습니까?”
“만났소.”
법허가 감았던 눈을 떴다.
하나뿐인 눈을 타고 서리서리 뻗어 나오는 것은 숨기지 못할 분노와 증오였다.
“연자강을 만나지 않았다면, 왜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여기에 있겠소?”
사도명은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법허의 말과 그의 눈빛이 전하는 내용은 확연했다.
사도명은 두 주먹을 힘껏 쥐면서 격동을 억눌렀다.
“무슨 뜻입니까, 부맹주?”
“연자강은 한때 나의 제자였소. 다시 만난 연자강은, 그러나 내가 알던 연자강이 아니었소. 그는, 그는 믿을 수 없게도!”
법허의 몸을 타고 걷잡을 수 없는 증오와 살기가 흘렀다.
사도명은 귀를 막고 싶었다.
법허의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들어야 했으며,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자강이 바로 삼대 마문을 총괄하는 극락문의 문주였다오.”
콰르르-르르릉!
사방의 벽이 흔들렸다.
사도명은 그 흔들림이 실재인지 환상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연자강의 손이 내 두 다리를 자를 때까지 나도 믿지 않았소.”
“…부맹주님.”
“몸의 반쪽이 불타고 나서야, 나는 겨우 믿게 되었지.”
“…교교는요?”
콰르르르-르르릉!
지하 공간이 또다시 흔들렸다.
마음의 충격이 만들어내는 착각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인가 강력한 폭발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알려진 건가?”
법허가 천장을 보았다.
사도명은 양심신공으로 마음을 나누어, 그 중의 하나로 지상의 인기척을 샅샅이 훑었다.
법허가 말했다.
“이곳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발각을 대비한 준비는 이미 되어 있으니까.”
“다른 일을 걱정하는 중입니다. 교교는 어찌 되었습니까?”
“은령선자는 나를 탈출 시켜주느라 붙잡혔소.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무당산에 왔을 때, 나는 이미 절반 이상 죽어 있었지.”
쿠르르르-르르르!
사도명은 흔들리는 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연자강의 손에?”
“그녀를 구하시오.”
법허가 말했다.
“무릉촌이 있는 곳은 나보다 태자가 더 잘 알지요?”
세상에서 무릉촌을 위치를 사도명보다 자세히 아는 사람은 몇 명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명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다시 한번 사방이 흔들렸다.
콰르르르르-!
청수진인이 서문용맹을 데리고 복도를 달려왔다.
“발각되었습니다. 누군가 천밀엄엄의 진법을 부수려 합니다.”
“아미타불. 청년들의 대피는 제대로 진행된 거요?”
“절차대로 하였습니다. 모두가 천중무극을 깨닫고 있으니, 이로써 조화인은 천하에 퍼집니다.”
“장문인도 피하시오.”
“부맹주님은요?”
“나는….”
법허의 몸이 가부좌한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땅 위를 구경하려 갈까 하오. 이것 또한 미리 준비한 일이지.”
법허가 사도명을 보았다.
“두 다리가 잘려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아시오, 태자?”
“좋은 점이 있습니까?”
“가부좌를 힘들이지 않고도 계속할 수 있지. 화두를 잡는 일 또한 손쉽소. 세상과 무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오.”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과연 좋은 점이 있군요.”
“이런 몸이 되어 깨달은 바가 있소. 보여 주고 싶은데….”
법허의 몸이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따라와 주시겠소?”
“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입니다, 부맹주님.”
“고맙구려.”
법허의 몸이 허공에 뜬 채로 복도를 날아갔다.
사도명이 서문용맹을 보았다.
“어찌하고 싶으냐?”
“지상에 모두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부?”
“흔적을 감지해 본 바로는 불과 한 명이다.”
“그, 그렇다면 혹시….”
서문용맹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극락문의 무인, 신인이 아닙니까?”
“강하다. 혼자 이곳 지하의 천밀엄엄 진법을 부수려 하고 있다. 혹시 신인이라면 두려우냐?”
서문용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습니다. 저는 극락문의 신인이 얼마나 강한지를 이미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두려워도 보겠습니다. 도망만 친다면, 저는 영원히 발전하지 못할 테니까요.”
“머릿속 마기가 사라졌구나.”
사도명이 웃었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깨닫고 있다. 네 본연의 마음이 점점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조화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천부.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도명이 몸을 띄웠다.
복도를 따라 빠르게 법허를 뒤따라가면서, 그가 말했다.
“사람 본연의 마음. 나는 너를 도운 것이 아니다. 네가 스스로 본래의 너 자신을 찾아가고 있을 뿐. 그것이 조화인이다.”
**
콰-아앙!
붉은 눈빛을 가진 괴인은 다시 한번 기둥을 쳤다.
일곱 번째의 타격이었다.
기둥은 흔들렸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진법의 막은 아직도 건재한 상태였다.
“흥! 그럼 한 번 더!”
괴인은 붉은 눈을 빛내며 잠시 휴식했다.
그리고 다시 기둥을 쳤다.
콰아-앙!
여덟 번째 타격이 들어가자, 기둥을 감싸고 있던 천밀엄엄의 진법이 마침내 깨져 나갔다.
츠츠츠츠츠-츠츠!
환영이 사라지고, 지하로 통하는 문이 기둥에 나타났다.
“지하에 꽁꽁 숨어 기척을 감춰 왔더냐? 이미 극락문에 모든 것을 알렸다. 더 이상은 …응?”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열린 문으로부터, 한 사람이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그는 걷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뛰지도 않았다.
괴인은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허공에 떠서 나오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법허?”
“아미타불.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는 것인가?”
법허가 양손을 앞으로 합장하며 말했다.
“누구인가? 나를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는 고대창! 하남에서 철심당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법허의 뒤를 따라, 서문용맹이 올라오면서 말했다.
“몇 달 전에, 극락당의 신인으로 선택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부러워했었는데….”
사도명도 서문용맹의 뒤를 따라 기둥의 문에서 걸어 나왔다.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야 함을, 지금의 너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서문용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에게 마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고대창의 눈에 어린 혈기.
서문용맹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공은 일반의 무공에 비해 발전이 빠르지만, 영혼이 오염됩니다. 세가로 돌아가면 극락문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늘어 가면, 언젠가 반격의 때가 온다.”
사도명이 웃었다.
“천중무극을 완전하게 이룬다면 삼극무령심공의 구결이 서문세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삼극무령심공이 돌아오면, 세가의 중흥이 시작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서문용맹은 고개를 돌려 법허를 보았다.
법허는 고대창을 마주보며 허공에 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질 한 바탕의 싸움을 지켜보는 일은, 서문용맹의 경험을 크게 넓혀줄 것이다.
고대창이 미간을 찡그렸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무척 놀라고 있소, 법허 선사!”
“무예란 올바른 길에 대한 추구. 백도에 몸을 담았던 무사가 극락문의 마공에 빠진다는 것이 나는 더욱 놀랍군, 고대창.”
“나는!”
고대창이 소리쳤다.
“극락문에 들어 존좌의 은총을 받고 신인(神人)이 되었다. 불구인 주제에 날 이기겠다고?”
퍼-엉!
고대창은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장을 쳐냈다.
혈기가 넘실거리는 장력은 법허의 가슴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꽈-앙!
폭음이 일어났지만 놀랍게도 법허의 몸은 밀려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고대창은 자신이 내쏜 장력이 사라지지 않고 법허의 몸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이건 무슨 사술이냐?”
“과거에 나는 천중팔불 중 불광조천하가 가장 강하다 생각했지. 한데 두 다리를 잃고 보니 좌불등천이 새롭지 않겠소?”
“듣고 싶지 않다.”
고대창은 연달아 다섯 번의 장력을 다시 쳐냈다.
퍼퍼퍼퍼펑!
다른 장력들도 법허의 주변을 맴돌 뿐, 그를 뒤로 밀지 못했다.
“좌불등천. 앉아 있는 부처가 어떻게 하늘까지 올라갈까? 금강부동신보를 생각해 냈소. 움직이지 않되 움직이고, 피하지 않되 반드시 피하는 보법.”
고대창은 자신의 장력이 점점 법허의 움직임에 동화되는 것을 보았다.
“나의 내공을 흡수한다고?”
“상대의 공격으로 상대를 막고, 상대의 방어로 다시 상대를 공격을 하는 방법.”
고대창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휘두르면서 외쳤다.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칼은 악독하도록 정확하게 법허의 목을 노렸다.
사도명의 담담한 음성이, 아예 눈을 감아 버린 법허의 얼굴 옆으로 흘렀다.
“고대창은 칼날이라면 법허 선사가 장력처럼 흡수하진 못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저 판단은 일견 옳아 보이지만 무척 잘못되어 있다. 너는 저 판단의 잘못이 어디인지를 알겠느냐?”
까가-가가강!
굉음이 일어났다.
고대창의 칼이 법허의 목을 잘라갔는데도, 쇠와 쇠가 부딪치는 폭음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