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44화 (44/168)

044화. 천하의 패배

사도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로 변한 무당의 터.

“무너지고 삼 년이 지났다지요? 세월도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합니다. 내가 본, 남겨진 흔적에는 격렬한 저항의 자취가 그다지 없더군요.”

청수진인도 주변을 살폈다.

“흔적으로 과거를 읽는다? 무량수불. 가능하다는 거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당은 싸울 여력이 있었으나, 일부러 멸망당했다는 것. 그래서 주변의 인기척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무량수불. 대체 시주는 누구인가? 자네와 같은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네.”

“삼안신창으로 주변의 잡초와 이끼를 지웠습니다. 삼안신창이 나타나자 미약한 동요의 기운이 감지됐는데 놀람이 아니라 반가움이어서, 확신했습니다.”

사도명의 눈이 빛났다.

“숨어 있는 건 백도의 사람. 그렇다면 무당파가 맞겠구나.”

청수진인은 놀람으로 크게 뜬 눈을 좁히지 못했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뜻이 있었던 거요?”

“생각했습니다. 지상에 흔적이 없으니 지하에 있겠지? 기척이 거의 흘러나오지 않으니 천밀엄엄류의 진법으로 기척이 새는 것을 막고 있겠구나.”

청수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시주는 대체 누구요? 삼안신창 서문광님과는 어떤 관계요?”

놀랍게도 사도명은 보지 못했으면서도, 무당파의 상황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보다 태극혜검에 대한 것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극혜검은, 어찌 아오?”

“냉심무적 장무정. 그가 남긴 유산을 무당파에게 전하러 왔습니다. 보여 주면 동요할 줄 알았고,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짐작했습니다.”

“그럼 이것 또한 알겠구려.”

청수진인의 양손에서 뿌연 진기가 피어올랐다.

면면부절.

끊이지 않는 진기의 흐름.

무당의 장기인 면장이 강하게 일어나 사도명의 좌와 우, 앞과 뒤를 모두 덮었다.

“시주가 적이 아니라고 판단했소. 그래서 나타났지만, 우리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오.”

사도명은 청수진인의 면장이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장악했음을 알고 웃었다.

“어찌하시려 합니까?”

“따라오시오. 시주도, 그리고 저 청년 또한!”

청수진인이 사도명과 산 채로 굳어 있는 서문용맹을 번갈아 보았다.

사도명은 웃었다.

“서문용맹은 운이 나쁘군요. 두고 가면 늑대의 밥이 되기 싫어서라도 최선을 다해 천중무극의 깨달음을 얻을 터인데.”

“무량수불. 서문 세가는 대대로 정의로운 가문이었소. 그들이 숨겨진 진실을 알아 나쁠 것은 없다고 판단하오.”

“하핫. 청수 장문인을 원망하라. 늑대밥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놓쳤구나.”

사도명이 오른손을 뻗어 서문용맹의 아혈과 마혈을 풀었다.

사도명이 먼저 기둥의 문으로 들어갔고, 서문용맹이 즉시 그 뒤를 따랐다.

뒤에 남은 청수진인은 오른손을 들어 사방을 휘저었다.

멀리 있던 잡초와 이끼들이 그 손짓을 따라 움직여, 기둥의 주변을 다시 덮었다.

“개개조화의 그날까지 우리는 기다린다. 극락의 문이 지옥의 문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는 그날을 고대한다.”

염원을 읊으며, 청수진인도 문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천밀엄엄의 진법이 어디선가 작동을 시작했다.

피어오른 기운이 문을 가렸고, 폐허가 폐허로 되돌아갔다.

시간이 흘렀고, 무당산에 밤이 찾아왔다.

달이 높아 솟아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호흡이 무척 깊었고, 움직이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숫제 호흡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서문용맹은 줄곧 사도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또 혈기가 발작하느냐?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이구나.”

“내공을 짚어놓은 탓인지 살의는 솟지 않습니다. 다만 묻고 싶을 뿐입니다.”

“물어라. 무엇이든.”

“천중무극의 깨달음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깨닫지 못하면 죽어야 할 정도입니까?”

서문용맹의 말에 청수진인이 깜짝 놀랐다.

“그대들도 천중무극을 알고 있소? 그럼 귀하는 혹시…?”

“개개조화.”

사도명의 말에 청수진인의 눈은 더욱 커졌다.

사도명이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비, 비슷한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누구로부터요?”

“아! 그건….”

“장문인께서는 왜 태극혜검에 대한 것부터 묻지 않습니까? 혹시 누군가 이미 양의심공과 태극혜검에 대해 알려준 것이 아닙니까?”

청수진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량수불. 믿을 수 없군. 시주는 마치 이곳의 모든 것을 아는 듯이 말하고 있잖소.”

“이 지하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사람이 장문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 그건 또 어떻게…?”

“한 사람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는 아마도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람 또한 나를 찾고 있었을 겁니다.”

사도명은 주변에 한 명 두 명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여러분이 여기 숨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마도 제가 바로 그 기회일 것입니다.”

청수진인은 한참 동안이나 사도명을 보았다.

눈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알겠소.”

청수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겠소, 시주! 서문용맹 소협. 같이 갑시다. 진실을 볼 기회란 적으니, 볼 수 있을 때 보는 편이 좋을 것이오.”

청수진인이 걷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사도명은 서문용맹에게 말했다.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왜 천중무극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거다.”

지하는 생각보다 넓었다.

복도를 걸으며, 서문용맹은 복도 곳곳에서 무당 도사를 보았다.

그들은 가부좌를 한 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밀엄엄의 진법은 기척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막상 진법을 펼친 자는 다른 사람의 기척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는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하지.”

“그, 그래서 극락문에서 오랫동안 찾아내지 못한 거군요?”

“이러한 무당이, 너는 정말로 무림을 배신했다 생각하느냐?”

서문용맹은 자신의 목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진실은 직접 듣고, 직접 본 후라도 더욱 깊이 생각해야 비로소 알 수가 있다. 소문만을 믿는 자에게 진실은 보이지 않아.”

복도는 이내 끝났다.

서문용맹은 복도의 끝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보고, 눈을 부릅 뜰 수밖에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복도의 끝에 앉은 사람도, 자신의 내공을 이용해 천밀엄엄의 진법을 돕고 있었다.

매우 유명한 사람이어서 서문용맹은 단숨에 그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이 어, 어떻게 여기에?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

또한 무당 장문인 청수진인과 마찬가지로, 이미 죽고 없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사도명도 그를 알아보았다.

“희미하게, 그러나 매우 또렷하게 느꼈습니다. 부 맹주.”

가부좌한 사람이 진법을 위한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떴다.

그의 얼굴 왼쪽 반은 녹아내려서 끔찍했고, 두 다리는 숫제 무릎 아래가 잘려나가고 없었다.

“아미타불.”

법허가 무사한 오른쪽 눈으로 사도명을 알아보고 웃었다.

“사, 살아 계셨던 거요? 아니면 이것이 혹 꿈인 게요, 태자?”

사도명은 앞으로 뻗는 법허의 손을 쥐었다.

“현실입니다. 저는 이토록 시간이 지난 줄은 몰랐습니다.”

“버, 법허 선사께서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무당의 청수 장문인이 해쳤다고 들었는데 어이해 두 사람이 함께 있습니까?”

서문용맹이 소리치자, 법허가 쓰게 웃었다.

“무림맹이 무너지고 우리 무림맹은 모든 것을 다하여 아수라혈교와 맞서 싸웠소, 태자.”

사도명의 손을 쥔 법허의 손은, 격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지쳐갔지만 싸울 의지는 잃지 않았지. 태자와 맹주의 희생을 보았기 때문이오. 개개조화. 오직 그 하나만을 꿈꾸며 싸웠다오.”

사도명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묻고 싶은 궁금함이 있었다.

하지만 애써 참았다.

지나간 세월을 설명하는 법허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싶었다.

“우리는 이겨야 마땅했소. 하지만 지고 말았지.”

“아!”

“아수라혈교만이라면 이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소. 설청산 맹주가 오대 노사를 태자가 수라겁황을 막아 줬으니 자신도 있었소. 그런데 그들이 나타났던 거요.”

“그들이란 누굽니까?”

“아수라혈교와 처음부터 손을 잡고 있었던 자들. 세상에 알려진 이름은 바로….”

법허가 서문용맹을 한 차례 쳐다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극락문!”

서문용맹이 눈을 크게 뜨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사도명은 설마 했던 우려를 확인한 절망에 이마를 쥐었다.

“그들은 혹시 우내의 삼대 마문이 아닙니까?”

무림맹이 모습을 갖추던 초기에 우내 삼대 마문 중의 하나인 적마교가 나타났었다.

무림은 큰 타격을 입었고, 파천도제 호불군의 지도 아래 오랫동안 기력을 회복해야만 했었다.

“맞소.”

법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소림에서 모든 힘을 결집했지. 심지어 곤륜의 운송자처럼, 조화인의 뜻을 깨친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로 뭉쳤소!”

“그런데도 졌단 겁니까?”

사도명은 법허의 눈 깊은 곳에 흐르는 격동의 빛을 보았다.

“승리를 예감했던 순간에, 적마교의 혈강시가 나타났소. 심마문! 그리고 적암마계까지.”

“아!”

“우리는 무너졌지. 그날 은령선자가 말하기를….”

사도명의 눈이 커졌다.

마침내 그가 바라던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은교교!

**

무당 장문인 천수 진인은 서문용맹을 또 다른 장소로 데려갔다.

거대한 석실이었고, 여러 명의 젊은 무사들이 앉아 있었다.

가부좌한 그들의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따뜻하며 온화한, 모두 동일한 느낌의 내공이었다.

“저건…?”

“천중무극의 기운. 자네도 이미 구결을 얻었지?”

“마음에 조화인을 기르는 구결이라 들었습니다.”

“조화인에 대해서 아나?”

서문용맹이 고개를 젓자, 청수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마음속의 마음. 이른바 양심! 타인을 위하는 마음!”

“무공으로 그런 걸 기르는 일이 가능하다고요?”

청수진인이 가부좌하고 운기조식하는 청년들을 가리켰다.

“직접 보면 알 것 아닌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기가 눈을 가려서네.”

서문용맹의 눈이 커졌다.

“마기? 천부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기를 기르는 마공 따위는 익힌 적 없습니다.”

“무림인으로 등록하고 명패를 받을 때, 혹시 극락문의 운기조식법을 받지 않았나가?”

“그랬습니다만, 그건 극락문의 신공으로….”

“심마문의 염라탈혼! 서서히 살기를 기르고 결국은 사람의 심성까지 잊게 만들지. 가장 큰 특징은 눈에서 피어나는 혈기.”

청수진인이 서문용맹을 보았다.

서문용맹은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정말로 저의 눈에 혈기가 깃들어 있습니까?”

청수진인은 운기조식하고 있는 젊은 무인들 중, 가장 앞에 앉은 준수한 외모의 청년을 불렀다.

“보현. 일어나 보겠느냐?”

“네, 사부님.”

보현이라 불린 청년이 일어나며 청수 진인에게 예를 표했다.

“이 사람은 서문용맹이다. 심마문의 염라탈혼에 물들었다. 도와줄 수 있겠느냐?”

“해 보겠습니다. 서문용맹 시주.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보현이 오른손을 뻗어 서문용맹의 머리를 잡았다.

잠시 기운의 흐름을 느낀 후, 보현이 물었다.

“혹시 최근에 쉽게 분노가 일어나고, 살기가 강해졌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분명!”

서문용맹은 사도명도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마공의 영향이란 말입니까?”

“시작합니다.”

정수리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기운은 부드럽고 편안해, 서문용맹은 긴장했던 몸이 풀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조화인의 기운이니 잘 기억하세요. 흐름을 느끼면 천중무극이 깨달음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 편안한… 큭!”

서문용맹은 갑자기 머리를 관통하는 고통에 신음했다.

“이, 이 고통은 뭐요?”

“조화진기가 염라탈혼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고통이 클 테지만,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보현이 손에서 뿜어내는 내공의 양을 늘렸다.

콰아아아아-!

서문용맹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생각했다.

“마지막 고비입니다.”

“크으윽!”

콰아-아아앙!

서문용맹은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천천히 돌아옴을 느꼈다.

“어, 어떻게 된 거요?”

“염라탈혼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천중무극을 익히지 못하면, 또다시 마기가 침습할 것입니다.

서문용맹은 뒷머리를 만졌다.

고통의 잔재가 남아 있었지만, 머릿속은 신기하게 맑았다.

그는 청수진인을 보며 물었다.

“무당파는 무림을 배신했던 것이 아니었군요. 아수라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은….”

청수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일전에서 우린 모든 힘을 합했네. 무당도! 소림도! 곤륜파까지. 그럼에도 우리는 지고 말았지.”

청수진인의 손에서도 보현의 것과 똑같은 기운이 솟았다.

그 기운이 자신의 머리에 스미자, 서문용맹은 마지막 남았던 고통의 잔재마저 사라짐을 느꼈다.

“은령선자가 마지막 제안을 했었네. 하늘 밖에, 무림을 구하도록 안배된 사람들이 있다 했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자는 것이 그녀의 제안이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