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어둠속에서 깨어나다.
날이 훤하게 밝았다.
법허는 무너진 무림맹과 그곳을 빠져나온 무사들을 둘러보면서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실감했다.
“우리에겐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이 숫제 없소.”
구양걸이 말했다.
“어쩌면 슬퍼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심기가 다가와 날아온 전서구에서 모은 전갈을 펼쳐 놓았다.
“아수라혈교의 공격은 지금도 이어지는 중입니다.”
“아미타불.”
법허가 외쳤다.
“맹주와 태자가 돌아가신 지금, 부맹주인 내가 잠시나마 무림맹을 맡으려 하오. 모두들 찬성합니까?”
“원로원주는 찬성하오.”
“찬성합니다.”
“저도 찬성할게요.”
소빙유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호법의 자격이 아직 있다면요.”
법허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과오는 나중에 말합시다. 전서구의 전갈을 분석하여, 아수라혈교의 전략을 예측해야 하오. 종심기, 맡아 주겠느냐?”
“존명.”
“무림맹의 군세를 천하 곳곳에 배치하되, 하나의 흐름이 다른 흐름을 도와 상승효과가 나도록 해야 하오. 원로원주, 원로들과 무사들의 역할을 나누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해 주시오.”
“명령을 받듭니다.”
“지금 장막의 수호자 흑영을 지휘하는 자는 누구인가?”
흑운이 앞으로 나서서, 법허를 향해 포권했다.
“흑견 령주와 부령주가 죽고, 제가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 숨어 지내야 하는 너희의 운명을, 무림맹주 대행의 자격으로 해제한다.”
“감사합니다.”
“흑영을 흑영단으로 승격하고, 너를 단장으로 임명한다.”
“존명!”
법허는 흑영들을 훑어보았다.
“어둠은 어둠으로 상대하는 법. 너희는 흑귀를 조종하는 흑문의 사제들을 찾아내 제거하라.”
“명을 받듭니다.”
“파천도제께서는 개개조화의 방법을 세상에 이미 남겨 놓았다고 말하셨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며… 아!”
빠르게 말을 이어가던 법허가 어느새 깨어나 자신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고 탄성을 밭았다.
“깨어났는가, 은령선자?”
“…지금요.”
“혼혈은 어찌 풀었나?”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도명이 알려 주었어요.”
“아!”
“…그 외에도 아주 많은 것을 알려 주었죠. 달리는 법. 검을 쓰는 법. 심지어 아버지를 대하는 법까지도요.”
법허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교교는 오늘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내를 동시에 잃었다.
소빙유가 다가왔다.
“울고 싶다면 울거라.”
“울고 싶어요. 하지만 울지 않겠어요. 사도명이 알려준 대로,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을 테니까.”
은교교는 무너져서 무덤처럼 변한 무림맹 중앙을 보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가져와야 할 게 있어요.”
은교교는 몸을 날려 이미 무너진 무림맹 중앙으로 갔다.
그리고 허리의 방울을 뗐다.
바람이 불자, 방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은교교는 이미 무너진 지하를 향해 자신의 방울을 던졌다.
따라-라라랑!
방울은 혼자서 울며, 깊어서 끝이 없어 보이는 아래로 굴러갔다.
“도명. 당신은 검을 남겼지? 나는 노래를 남길게.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노래가 당신에게 들릴 거야.”
돌아올 때, 은교교는 폐허를 뒤져 자수정 편액을 가져왔다.
“파천도제가 뭔가를 남겼다면 이것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법허는 편액의 앞뒤를 뒤졌다.
그리고 뒤편에 이중으로 되어 있는 천을 발견하고는 얼른 접힌 곳을 당겨서 폈다.
그곳에 하나의 구결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천중무원심공의 구결이다. 파천도제가 개개조화를 세상에 남겼다는 의미는 이것이구나.”
자수정 편액은 파천도제가 직접 글을 쓴 물건이다.
무림맹이 무너지기 전, 그 뒤편을 뜯어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개조화. 천중무원심공을 세상에 퍼뜨리자. 심공을 깨치는 이는 누구나 조화인이 된다.”
법허는 양손을 합장하며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무림맹은 무너졌으나 조화인의 정신은 살아 있다. 아수라혈교의 침습이 아무리 강퍅해도, 우리는 반드시 길을 찾아낼 것이다.”
**
‘여기는 어디지?’
눈을 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고 빛이 전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사도명은 자신이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
돌과 흙더미와 지하의 습기가 전하는 매캐한 냄새.
내공이 사라졌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본래 한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사도명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소빙유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오자, 사도명은 마지막 수단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천지일명은 하나의 죽음으로 다른 죽음을 끌어들이는 수법이었다.
말하자면 동귀어진, 스스로 죽으며 함께 죽는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죽지 않았다고?’
사도명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내공을 잃어 어둠을 뚫어볼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사도명은 파천삼로를 생각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창천사해로부터 파천삼로를 만들어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성이 남긴 우주오검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창천문도 검성이 남긴 무공의 흐름을 잇던 문파였다. 나도 처음부터 검성의 후예였던 거다.’
결국 사도명은 창천문의 무공 안에 남겨져 있던 우주오검의 흔적을 찾아낸 셈이었다.
파천삼로는 사도명이 만든 게 아니라,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진정으로 스스로 깨우친 것은 천지일명뿐이다. 그래서 나는 수라겁황의 무공에 나를 동조시켜서 함께 죽고자 했었는데 …’
그런데도 사도명은 살아남았다.
‘누가 날 도운 건가? 어떤 사람이 나를 살아남도록… 아!’
사도명은 누가 자신을 살려주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을 살려준 사람은, 자신이 그토록 도와주기를 바랐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파천도제 호불군. 수라겁황의 속에 남아 있던 조화인!’
사도명은 양심이야말로 사람 마음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양심의 강함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고, 함께 소멸하려던 마지막 순간에 수라겁황 속에 깃들어 있던 호불군이 눈을 떴던 것이다.
결국 호불군은 사도명을 살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혹시 여기는 그곳인가? 역대의 맹주들이 잠든 장소. 파천도제가 오랫동안 아수라전생의 대법에 잠겨 있었던 지하.’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손과 발, 어느 곳도 움직여주지 않았다.
‘근육이 끊어졌나? 뼈도 부러진 모양. 멀쩡한 곳이 없는 것도 당연한가? 설마 나는 이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
‘이대로 죽게 되나?’
먼 곳에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였다.
‘교교.’
은교교를 떠올리자 사도명은 가슴 한쪽이 시려왔다.
일어나서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단순히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모진 고통이 온몸에 밀려왔다.
‘으으!’
졸음이 몰려왔다.
고통과 피곤 속에서 사도명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어둠 속, 사도명이 보지 못하는 공간에는 모두 네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세 개의 관은 차 있고, 한 개의 관은 비어 있었다.
호불군의 관이었다.
수라겁황으로 각성한 호불군이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빈 관이 남겨지게 된 것이다.
다른 세 개의 관에는 모두 주인이 있었다.
일대 맹주 천무제 좌능후.
삼대 맹주 금강도객 곽혁신.
사대 맹주 삼안창 서문광.
모두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사도명이 의식을 잃은 순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시체가 움직인 것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천무제 좌능후의 시신이었다.
사도명이 혼절하자, 놀랍게도 천무제 좌능후의 시신이 조금씩 움직여 사도명을 향했다.
끼기긱!
끼기기기기-기긱!
움직임은 느렸다.
하지만 꾸준해서, 한 시진 가량이 흐르자 천무제 좌능휘의 시신은 일어나 앉아서 사도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뒤이어, 삼대 맹주인 금강도객의 시신도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사대 맹주인 삼안신창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세 구의 시체는 모두 일어나 앉아서 사도명을 보고 있었다.
- 희생입니까? 이는 낙수의 맹세에 가장 걸맞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 비로소 우리가 찾고 찾았던 진정한 조화인을 얻었습니다.
흐릿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세 구의 시체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모든 기운이 모이며, 한 곳으로 흘러갔다.
사도명!
- 우리의 죄업을 그가 씻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다만 도울 뿐. 모든 운명은 자신만의 것이다. 스스로 이끌어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법.
아지랑이가 들어가는 사도명의 몸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는 낮과 밤이 없다.
보낸 세월과 오는 세월이 구분되지 않기에, 시간은 오히려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
딸랑! 딸랑딸랑!
지하 깊은 곳.
어딘가 뚫린 구멍을 타고 바람이 불어오면, 멀리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딸랑!
또다시 들려온 방울 소리에 사도명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번쩍!
휘황한 빛이 그의 눈에서 일어나, 낮게 내려앉은 천장을 밝히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
사도명은 무엇인가에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이 움직인다. 끊어졌던 뼈와 근육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
한없이 어둡던 지하 공간이 밝게 느껴졌다.
사도명의 눈은 어둠을 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내공이 돌아온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이 무너져 내린 지하에, 네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관 속에는 단 한구의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
“비어 있는 관을 대체 왜 여기에 놓아둔 거지?”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사도명으로서는 그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
사도명은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는 이곳이 무림맹의 지하, 자령비고 아래에 있던 전대 맹주들의 묘소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호불군 맹주 외의 시체는 있어야 하는데… 설마….”
사도명은 몸을 세웠다.
“천장이 무너졌다는 건, 무림맹 자체가 함몰했다는 뜻인가? 나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어둠 속을 걸었다.
빛이 한 올도 없었지만, 사도명의 눈에는 모든 것이 훤했다.
“분명히 방울 소리를 들었다. 우선은 교교의 방울을 찾자.”
걸어가면서 배를 만졌다.
정신을 잃은 사이 계속 굶은 탓인지, 배가 무척 고팠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몸의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래 혼절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내공을 잃고 근골이 끊겼던 자신이, 지금은 온몸에 알 수 없는 활력이 넘치고 있으니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아수라혈교는 수라겁황과 오대노사를 잃었다. 하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사도명은 연자강과 무릉촌을 생각했다.
“우선 자강을 찾아가자.”
무릉촌은 검성이 남긴 장소다.
세상이 대겁난에 휩쓸릴 때를 대비해서, 검성은 무릉촌을 안배했고 연자강은 그런 무릉촌을 이끌고 있었다.
“그 전에 교교를 만나야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사서 먹고….”
사도명은 전낭 속에 든 은자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설청산의 생각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미미한 바람이 앞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사도명은 서둘러 달려갔고, 그곳에서 빛을 보았다.
빛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사도명은 빛이 비치는 땅 위에 놓인, 작은 방울을 집어 들었다.
“교교.”
은교교의 은방울이 사도명의 손에서 흔들리며 노래처럼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