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열 번째 용
금강왕을 비롯한 오행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수라혈교 산하의 오대마문을 이끌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수라겁황을 길러내기 위해, 문파를 물려주고 중원으로 왔다.
그들의 삶은 모조리 아수라혈교에 바쳐졌다.
설청산은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공동의 제자였다.
하지만 과거 호불군이 그랬던 것처럼 설청산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아니, 오대마문이 무림에 침투시킨 모든 첩자들의 마음에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모두의 마음에 존재하는 선!
천중무극신공이란 그 부분을 자극하여 조화인을 만들어내는 심법이었기 때문이다.
“설청산! 네놈도 결국….”
금강왕이 이를 갈았다.
“천무제. 그 교활한 놈의 잔꾀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벌써 몇십 년 전에 아수라전생을 완성했을 터.”
목령왕 목인괴가 외쳤다.
“배신자는 용서 않는다. 무림맹을 박살낸 후에 너를 찢어 죽이겠다, 설청산!”
그의 손에서 꿈틀거리는 진녹색의 안개가 일어나더니, 삼절서생 종심기의 주변을 덮쳤다.
“앙천독강이다. 모두 중독에 대비하라, 아미타불.”
법허가 종심기의 앞으로 몸을 날려 목인괴의 손을 막았다.
이미 독인을 넘어 독성의 경지에 오른, 독혈당주 목인괴!
그의 손은 닿기만 해도 물건을 녹여내는 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법허의 금불신공은 독에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환술에만 당하지 않으면!”
설청산이 소리쳤다.
“오대노사는 부맹주가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결코 아니오.”
무황 설청산.
자신의 의지로 아수라혈교를 버리고 무림맹을 택한 그의 외침은, 모든 원로들에게 힘을 주었다.
“힘을 합하라. 둘은 하나보다 강하고 셋은 더욱 강하다.”
구양걸이 소리를 높여 외치며, 권풍을 쏟아냈다.
“카카캇. 너는 어떠냐?”
화염왕이 거대한 불길을 구양걸을 향해 쏟아냈다.
화르르르르-!
“설청산은 너희를 돕지 못한다! 그의 내공은 이미 사라졌다.”
화염왕의 고함은 사실이었다.
백옥유액은 마공을 극제하는 힘을 지녔기에 설청산이 지녔던 마공은 완전히 녹고 없었다.
“조심해. 보통 불이 아냐. 파멸혈강의 불길이다.”
구양걸이 연달아 일곱 번의 주먹을 쳐내, 파멸화염을 막았다.
퍼퍼퍼-퍼퍼퍼펑!
그러나 끝내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하고, 세 걸음이나 물러난 후 답답한 신음을 토해냈다.
“크윽! 이, 이 정도라니….”
“크하핫. 모조리 태워주마.”
화염왕이 세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양손에 화염을 뿜어내, 구양걸과 뒤에 서 있는 열 두 명의 무사를 한꺼번에 노렸다.
“뜨겁군. 하지만 아무리 뜨거워도, 양심만큼 뜨겁지는 않다.”
설청산의 담담한 음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꾸워어-어엉!
어디선가 아홉 마리의 용이 홀연 나타나 장내를 휘저었다.
금강왕이 놀라 외쳤다.
“곤륜의 운룡대구식?”
황금빛으로 빛나는 용은 화염왕의 화염을 흩고, 목령왕이 뿜어낸 독 기운마저 으스러뜨린 후에 몸통을 좌우로 흔들었다.
설청산이 오른손을 뻗고 있었다.
“내가 지옥마정에서 처음 세상으로 올라왔을 때, 당신들이 서 있었지. 나의 사부면서 동시에 내 운명을 조종하려 했던 원수.”
설청산이 운룡대구식의 구룡강림을 전개해 화염왕과 목령왕을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사도명의 말이 옳아. 나쁜 것이 오면 좋은 것도 온다. 마공이 사라지자, 곤륜의 힘이 나타났다. 이제야 나는 제대로 곤륜의 제자다.”
금강왕이 소리쳤다.
“구룡강림은 운룡대구식의 완성 형태다. 혼자서는 당해내지 못해. 힘을 합하라!”
금강왕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마리의 용을 막으며 수왕과 토왕을 향해서도 소리쳤다.
그들의 몸에서도 각각 매서운 마기가 발산되어 설청산이 뿜어낸 용을 막아갔다.
쿠콰콰콰-쾅!
설청산은 오대노사의 반격을 받고 한 차례 물러난 아홉 마리 용을 다시 선회시켰다.
“오행합일. 오대 마공이 하나로 합하여지면….”
금강왕이 오대노사의 마공을 하나로 만들며 설청산을 노렸다.
“그 위력은 수라강림한 겁황의 수라영겁수에 못지않다. 네가 가장 잘 알지 않느냐?”
콰콰콰콰-콰콰콰쾅
가공할 마기에 부딪친 아홉 마리의 용이 울부짖었지만, 설청산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앞으로 나서면서 이를 악다물었다.
“알고 있소. 알기에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오.”
설청산의 얼굴이 핏기를 잃었다.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흰색으로 탈색되었다.
“아미타불. 맹주. 서, 설마 진원진력을 쓰시는 게요?”
진원진력은 생명력의 보존을 위해 남겨져야만 하는 힘이다.
그 힘을 모조리 사용하면, 심지가 다한 초처럼 생명이 사라진다.
“아버지-! 안돼요.”
은교교가 결국 노래를 멈추고 소리를 질렀다.
설청산이 빙그레 웃었다.
“이 애비는 언제나 네 엄마에게 자랑을 했더랬다. 나는 언젠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겠노라고….”
은교교는 달려갔다.
법허가 달려가는 은교교를 중간에서 붙잡으며 외쳤다.
“아니 되오. 저 강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소.”
“살아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구나. 사랑하는 딸과 그 후손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남기는 것.”
아홉 마리의 용과 다섯 명 오대노사의 합일한 힘이 서로 뒤엉킨 장내!
웅장한 용음이 주변을 흔들었다.
꾸우워어어-어엉!
말라가는 설청산의 정수리에서 또 다른 용이 솟구쳐 올랐다.
“운룡대구식의 마지막인 구룡강림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생각했었지. 아홉 마리의 용은 왜 굳이 땅으로 내려와 앉는 것일까?”
캬아오오오!
그의 정수리에서 솟은 용은 입을 주억거리더니 몸뚱이를 크게 한 바탕 틀며 다시 울었다.
“예의를 표하는 듯한 그 동작은 혹시 최후의 용. 가장 위대한 천룡을 맞이하려는 준비가 아닐까?”
명멸하는 빛!
설청산은 그 속에서 은교교를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보겠느냐, 딸아? 애비가 찾아낸 최후 최강의 용, 천룡천하다.”
꾸워어어어-어어어엉!
가장 크고, 가장 빛나는 용이 마침내 허공을 갈랐다.
아홉 마리의 용과 대치하던 다섯 노사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 안 돼-!”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구양걸과 법허마저 폭발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은교교가 울부짖었다.
“아버지이-!”
높아지면, 결국 가라앉는다.
폭풍은 사라졌고, 용의 울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대노사가 뿜어내던 다섯 색채의 마공도 빛을 잃고, 뿌연 흙먼지만이 어둠 속을 흘렀다.
수천 관의 화약이 폭발한 듯 갈라지고 무너진 땅!
여섯 사람이 그 위에 서 있었다.
오대노사 중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강왕은 왼쪽 팔을 잃었다.
나머지 오행왕들은 상태가 훨씬 심하여, 호흡도 심장의 박동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나만, 나만 살아 남았다고?”
금강왕은 자신의 앞쪽에 서 있는 설청산을 보았다.
그는 백골처럼 깡말랐고,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해 푸석거렸다.
“너는…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랐다. 네가 언젠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를 것 같다고… 목령왕은… 너를… 몇 번이나 죽이려 했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구해 주셨죠.”
“내, 내가 왜 널 구했을까?”
금강왕이 부들부들 떨면서 남아 있는 오른손을 앞으로 들었다.
“우, 운룡대구식이 끝이 아닐 줄은 몰랐다. 아홉을 넘는 곳에 있는 또 다른 용을 네가 불러낼 줄을, 정말 몰랐어. 지, 지금이라도 나는 너를… 너를 죽여야만….”
설청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솔직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내공과 진원진력까지 모조리 쏟아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일조차, 지금의 설청산에게는 불가능했다.
“죽어라-!”
금강왕이 땅을 박차고 날아, 하오른손으로 설청산을 노렸다.
퍼어-!
피는 금강왕의 가슴에서 튀었다.
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서 흔들렸다.
금강왕의 손보다 더 빨리 움직인 것은 한 자루 차가운 검이었다.
은교교의 청상검이 허공을 날아 금강왕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나는… 나, 나는….”
금강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을 베고 돌아갔던 청상검이 다시 돌아와 그의 목까지 벴다.
청상검을 회수한 은교교는 몸을 뒤로 돌려, 옆으로 쓰러지고 있는 설청산을 부축했다.
“아버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
진원진력을 소모한 설청산의 오감은 빠르게 소실되고 있었다.
“…그래도 냄새는… 맡을 수 있다. 네 엄마의 냄새와 같구나. 아아, 그립다. 그 밤.”
“아버지.”
“소리도… 들리지가 않아.”
“미안해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오해를 해서 죄송했어요.”
“교교하던 그 달빛, 요진, 미안하오. 당신을… 울게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나를, 안아 주겠소?”
은교교는 설청산을 더욱 힘껏 안았다.
뺨을 타고 흐른 그녀의 눈물이, 설청산의 얼굴을 온통 적셨다.
“마중 나와 준 거요? 아직도 울고 있소?… 이렇게 나만 당신을 만나면 안 되는데. 우리의 교교가, 우리의 딸이… 사랑하는 사내를 만났는데. 그 녀석을…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호흡 또한 잦아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설청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은교교는 계속 울었다.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미타불! 부디 극락왕생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법허도 눈물을 흘리면서 불호를 연신 읊었다.
“영웅으로 살았고, 영웅으로 죽었소. 맹주의 마지막은 무림의 역사를 기억하는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오.”
멀리서 설청산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소빙유.
그녀는 얼마 전부터 깨어나 있었다.
그리고 설청산의 싸움과 죽음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소빙유는 자신을 부축해주고 있는 탁호천의 손을 뿌리쳤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어서, 소빙유의 설청산의 옆으로 걸어왔다.
소빙유는 은교교의 옆에 앉았다.
은교교는 계속 울다가, 소빙유가 오자 그녀를 끌어 안았다.
“사부! 흑흑흑, 사부!”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소빙유는 은교교를 안지 않았다.
“네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에서, 나 소빙유가 너의 엄마를 끝내 이겼다는 생각을 했었다.”
소빙유는 울지 않았다.
은교교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소빙유가 말을 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나는 졌어.”
“사랑하는 일에는 이기고 지고가 없다고 생각해요, 사부.”
“나를… 다시 사부라고 불러줄 생각이냐?”
“저를 키워주셨잖아요.”
“그랬었지.”
소빙유는 눈을 뜬 채로 숨이 끊어진 설청산을 보며 물었다.
“네 아버지의 눈을, 내가 감겨 주어도 되겠느냐?”
은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청산을 눈을 쓸어내리면서, 소빙유가 말했다.
“이제야 은요진을 만났나요? 나보다 훨씬 더 당신을 믿어 준, 끝까지 당신이 위대한 일을 할 것이라 믿었던 그녀를.”
“사부!”
“당신의 마지막 우려를 들었어요. 당신의 딸이 사랑하게 된 사내. 내 제자가 사랑한 사내.”
소빙유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할게요. 나의 제자가 나처럼 슬프지 않게 돕죠.”
소빙유가 땅을 박찼다.
그녀의 몸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도명과 수라겁황의 사이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은교교가 놀라서 소리쳤다.
“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