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37화 (37/168)

037화. 너의 노래

사도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겁황의 말이 옳아 보였고, 실제로도 옳았다.

“하지만 나는 방법이 없다고 포기할 정도로 세상을 쉽고 간단하게 살아오지는 못했으니까.”

사도명은 은교교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지금과 같은 상황에 웃을 수가 있지? 차라리 울어라.”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절망적일 때 웃지 못한다면, 세상엔 미소가 존재할 이유가 없지.”

수라겁황의 몸을 둘러싼 빛이 한 차례 요동을 쳤다.

“네놈은 천무제를 닮았구나.”

“대체 어떤 점이 닮았소?”

“천무제는 내게 덫을 던졌다. 천중무극의 함정 때문에 나는 수라겁황이면서 파천도제로 살았다. 그 자도 너와 같았다.”

수라겁황이 이를 갈았다.

“웃지 못 할 순간에도 웃었지.”

파천도제 호불군은 본래 아수라혈교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웅으로 살았다.

모두가 천무제가 남긴 조화인의 안배 때문이었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마침내 찾아냈군. 내가 귀하를 이길 수 있는 방법.”

“헛소리. 그런 방법 따위 없다.”

“귀하는 조화인으로 살았소. 어둠의 수호자까지 안배해 놓았고, 무림맹의 자폭까지 준비했소.”

수라겁황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겁황으로서의 운명이다. 겁황으로 탄생한 지금, 나는 매우 기쁘다.”

“대체 어떻게 이긴 거요?”

“뭐?”

“조화인은 천중무극신공이 탄생시킨 귀하의 마음! 스스로의 마음을 대체 어떻게 이겨낸 거요?”

“나는….”

수라겁황은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그는 금강왕을 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이겨냈지?”

“방법이 무어 중요합니까? 겁황께서는 오래 노력하셨습니다.”

금강왕이 고개를 숙였다.

“겁황은 시대를 종결짓는 존재. 중요한 것은 마침내 아수라전생을 이루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 나의 운명은 모든 것의 파멸. 우선은 너부터 죽이겠다, 검성의 후예.”

“그도 당신처럼 생각할까?”

“뭐?”

“당신 마음속 조화인 역시 나부터 죽이겠다는 생각을….”

“사도명이 한 마디만 더하면, 은교교부터 죽여라, 금강왕.”

수라겁황이 소리쳤다.

“은교교를 죽인 후에는, 네가 입을 다고 나와 싸울까? 아니면 그 입만 계속 움직일까?”

사도명의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설청산을 보았다.

“설득은 실패입니다. 이제 싸우는 것 외엔 방법이 없나 봅니다.”

설청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의 내공 대부분은 백옥유액에 녹아 버렸으니….”

“가의층층. 껴입었던 옷을 벗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무거웠던 몸이 자유로울 겁니다. 손해와 이득은 홀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설청산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다. 알 것 같다.”

“적을 나누죠. 제가 겁황을! 맹주님은 오대노사를!”

수라겁황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나와 싸우겠다고, 애송아? 나는 이미 우주오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사도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내게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니까.”

“설청산을 믿는 게냐? 그는 오대노사와 기껏해야….”

“대체 어찌해야 그 입을 다물고 나와 제대로 싸우겠소?”

겁황의 눈썹이 노기로 떨렸다.

“네 이 놈!”

사도명은 은교교를 보았다.

“부탁이 있소.”

“달아나란 부탁이라면 아예 하지 말아요. 거절이니까.”

“노래를 불러 주겠소?”

뜻밖의 말에, 은교교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노래… 라고요?”

“오래전에 노래를 들었소.”

사도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절망에 빠져 무림맹을 떠나려던 밤에 들었던 아름다운 노래. 장백산에서 봤을 때 나는 단숨에 알아보았는데, 당신은 아니었나? 그 날, 노래 부르던 당신의 앞에 울며 서 있던 나를 기억하지 못했어?”

**

사도명은 그 밤을 잊지 못했다.

교교한 밤의 달빛이 설청산에게 그러했듯,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가 사도명에게는 화인(火印)이었다.

무림태자에 오르기 전날의 밤!

사부와 부모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었던 그날에 사도명은 절망속으로 추락했다.

세상의 빛이 모두 사라졌다.

암흑 속에서 자신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싶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다.

어두운 나무 아래에서 사도명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때 노래가 들렸다.

눈물 같았고, 그리움 같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어서, 사도명은 울었다.

듣기만 했는데도 가슴 밑바닥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서, 사도명은 쉬지 않고 흐느꼈다.

울음 속에서 생각했다.

‘내게는 아직 흘릴 눈물이 있다. 눈물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살 자격이 있을 것이다.’

슬퍼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한다.

자신이 죽으면 먼저 간 부모가 다시 한번 슬퍼할 것이다.

스스로 죽은 스승은 영원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왜 노래를 불렀니?”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사도명은 노래 부르는 소녀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녀가 사도명을 보며 대답했다.

“슬퍼서!”

“노래를 부르면 슬픔이 사라져?”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지만, 다른 걸 꿈꿀 수는 있어져.”

“다른 것?”

소녀가 빙그레 웃었다.

“희망!”

밤은 깊고 어두웠다.

사도명은 소녀의 슬픔과 희망을 몰랐고, 소녀 또한 사도명의 슬픔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날 이후, 무림맹을 떠나 천하를 떠돌면서도 사도명은 가끔씩 그날의 노래를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 날의 노래처럼 희망을 꿈꿀 수 있을까?’

**

은방울 같은 노래가 들렸다.

은교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명은 수라겁황을 보았다.

“귀하에게도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소?”

수라겁황의 온몸을 감으며 강기의 회오리가 피어올랐다.

“아수라의 의지. 세상을 피로 멸망시키는 나의 운명.”

“주어진 것 말고! 귀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을 말하시오.”

“나는 수라겁황이다. 아수라의 의지가 모두 나의 의지다.”

사도명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휴우. 나는 무슨 수를 부려서라도, 이겨야만 하겠군. 나를 위해. 세상을 위해. 그녀를 위해. 또한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느냐?”

“솔직히, 아니오.”

사도명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도 싸울 수밖엔 없잖소.”

수라겁황이 사도명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너는, 정말로 천무제를 닮았다.”

“다른 사람과도 닮았을 거요.”

“누구 말이냐?”

“살았을 때의 귀하가 거울 속에서 계속 보았을 사람. 최고의 조화인. 파천제도 호불군!”

콰아아아아아-!

수라겁황의 온몸을 둘러싼 회오리가 더욱 강해졌다.

“닥쳐라.”

“생각해 본 적이 있소? 귀하가 아수라혈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닥치라고 말했다-!”

수라겁황이 오른손을 뻗었다.

수라영겁수의 강력한 기운이 사도명의 온몸을 덮쳤다.

사도명도 오른손을 들었다.

우주오검의 네 번째, 자청합일의 기운이 일어나 영겁수에 대항했다.

쿠르르르르-르릉!

“천무제의 조화인과, 지금 내게 깃든 조화인은, 그대로 파천도제 호불군, 당신의 조화인과 같소. 사람의 본성. 타인의 슬픔을 다독여주려는 마음속의 마음.”

일 초에 수천 번의 변화를 담아 공력이 서로를 향해 부딪쳤다.

수라겁황이 소리를 질렀다.

“천무제가 나를 속인 거였다.”

쿠콰콰콰-콰콰쾅!

“후회하시오? 아니면 혹시….”

사도명이 두 손을 번갈아 휘저으면서 소리쳤다.

“여전히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오, 파천도제 호불군?”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수라영겁수가 허공에 두 개의 검은 원을 그렸다.

사도명이 쏟아낸 자청합일의 기운이 검은 원 속에서 소멸했다.

겁황은 단호하게 외쳤다.

“세상에 더 이상 파천도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초의 주고받음이 끝났다.

폭풍우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사방으로 뻗어 나갔던 마기도, 수라겁황의 몸으로 다시 모여 잔잔하게 갈무리 되었다.

노래는 계속 들렸다.

은교교가 살아오며 겪었던 모든 슬픔과 그리움이, 높고 낮은 음정에 담겨 심금을 울렸다.

“저 여인은 두려워하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소. 나를 위해서! 내가 이기기를 바라니까.”

“절대 이길 수 없다.”

겁황의 몸을 감싸고 검은 구름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죽는다. 세상은 완전하게 사라질 것이다.”

쿠오오오오-!

사도명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자, 사도명의 몸 주변에 밝은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밝았으나 눈부시지는 않았다.

텅 비어있었지만, 가득찬 공간으로 느껴졌다.

“…우주홍몽!”

수라겁황은 사도명이 펼치는 무공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아수라전생을 통해 전달된 기억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어둡고 거칠어졌다.

“나는… 한 번 당한 무공에 다시 당하지 않는다. 우주오검은, 이미, 경험해 보았다.”

호불군의 몸속에 깃든 아수라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설청산의 전음이 사도명의 귓속에서 울렸다.

[수라겁황은 이미 우주홍몽에 익숙하다. 우주오검으로 쓰러뜨릴 방법이 없어.]

겁황이 양손을 들었다.

수라영겁수의 기운이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꿈틀거렸다.

“수라혈기는 한 번 경험한 무공을 잊지 않는다. 수백 년 세월, 나는 우주홍몽을 이겨내기 위하여 진화해왔다. 그래서….”

겁황의 몸이 점점 커졌다.

환상이었지만 또한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모든 이의 눈에 보이는 환상이란, 이미 실체인 법이다.

“수라영겁수에서 마혼영겁수로! 수백 년 고통의 세월을 크크크, 되갚아 주겠다, 검성.”

아수라혈마의 혼과 완전히 동화된 호불군이 울부짖었다.

사도명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나? 질 수밖에 없나?’

그러나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은교교의 노래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지면 세상은? 세상의 사람들은? 은교교는?’

친구 한 명을 떠올렸다.

무릉촌의 친구를 떠올리고 나서야, 사도명은 비로소 안도했다.

“나는 져도, 지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이 내 뒤를 이을 테니까.”

사도명은 다시 앞으로 걸었다.

‘자강! 뒤를 부탁하마.’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사도명은 자신의 몸에서 피어난 우주홍몽의 범위를 넓혔다.

겁황의 양손에 걸린 마혼영겁수의 기운도 살아 있는 두 마리 거대한 뱀으로 변해 흔들렸다.

사도명은 마혼영겁수가 변화를 보이기 전에 달려들었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자신은 상대를 모르기에,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캬캇. 내공을 겨루자고?”

두 마리의 뱀도 마혼룡으로 변해, 영역을 넓히는 사도명의 우주홍몽 속으로 돌입해 들어왔다.

“나는 아수라의 힘을 이었다. 네가 견뎌낼 수 있을까?”

은교교의 노래는 계속 흘렀다.

사도명이 소리쳤다.

“버텨 보겠소.”

“카카캇. 어차피 질 거라면 무엇을 위해 버틴단 말이냐?”

“나를 도울 사람이 있으니까. 버티면 나타날 테니까.”

사도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믿고 있소.”

**

설청산은 오행왕, 아수라혈교의 오대노사들 앞에 서 있었다.

노래는 그에게도 들렸다.

법허가 설청산의 뒤에 서면서 염주를 굴렸다.

“나의 힘이 얼마나 도움 될지는 모르나, 최선을 다하겠소.”

구양걸도 자리를 잡았다.

“맹주! 한때 당신의 진심을 의심한 죄를, 목숨을 다하여 갚도록 허락해 주시오.”

원로회의 원로들 태반이 설청산의 뒤로 와서 오대노사와 마주보면서 서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몸속의 흑귀금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백옥유액으로 인해 이미 녹았으니까.”

설청산의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사도명이 흑귀의 해제를 장담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미타불. 그는 믿었구나.”

오직 사도명만이 처음부터 믿었다. 설청산이 수라겁황으로서의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백옥유액을 먹을 것이라 예측했었다.

그에 비해 무림맹 맹도들의 행동은 어떠했었나?

그들은 설청산에게 맹주의 의무를 맡겼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

“아미타불.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모두 힘을 합하여 맹주를 도와야 한다.”

“푸하하. 인원이 많아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금강왕이 설청산과 법허, 그리고 구양걸을 둘러보며 웃었다.

“우리와 싸워볼 만한 것은 여기에서 너희 셋이 전부니까.”

설청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 다섯 명 정도와 싸우는 일이라면, 흥!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싶은데, 귀하의 생각은 다른 거요, 금강왕? 아니 사망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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