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36화 (36/168)

036화. 조화인의 정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 침묵 속에서 사도명만을 보았다.

정도의 영웅이었던 오행왕이 아수라혈교의 오대노사로 밝혀졌다.

거기에 더해, 천라대제의 후예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다시 묻겠소, 설청산.”

들어올린 사도명의 오른손에, 청옥소검이 저절러 와서 잡혔다.

“이렇게 천라대제의 후예가 나타났는데도 여전히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소?”

“…내 판단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 아버지의 말이 옳소.]

은교교는 귓속에서 울리는 사도명의 전음을 들었다.

[도망치시오, 탁호천에게 도와 달라고 이미 말했소.“

놀란 은교교가 고개를 돌리자, 탁호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음을 보냈다.

[내공을 꽤 잃었으나, 짐승을 부리는 능력은 여전하다. 옆으로 오거라, 은령선자. 도우마.]

[도대체 왜요?]

은령선자는 사도명을 향해 전음으로 물었다.

사도명은 은교교를 보지 않고 설청산만 계속 보았다.

“아수라혈교의 재건과 수라겁황의 재탄생을 막아낸 천라대제는 천기를 읽고 신음하였소.”

그가 들어 올리자, 빛을 잃었던 청옥소검이 천천히 본래의 푸른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막아낼수록 더욱 지독해지는 피의 예언 때문에. 수라겁황은 없애도 없애도 다시 돌아오니까. 그 에언을 천라옥벽에 남긴 거요.”

“무림맹은 이제 아수라혈교의 새로운 본거지다. 이제 수라겁황을 막을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설청산, 당신은 진짜 수라겁황이 아니잖소?”

금강왕이 냉소했다.

“흥. 어찌 확신하느냐? 천라옥벽에… 설마 진짜 수라겁황에 대한 예언도 남겨져 있더냐?”

사도명은 땅을 보았다.

그곳은 설청산이 틈이 생길 때마다 보곤 했던 방향이었다.

“수라겁황을 만드는 도가니. 무림맹의 가장 깊은 곳.”

땅의 아래에는 자령비고가 있다.

그리고 자령비고 아래에 거대한 광장이 존재한다.

드드드드드드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의 근원이 땅의 깊은 곳에 존재함을, 사도명은 느꼈다.

“적의 심장부에 똬리를 틀려는 독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흉계를 꾸밀까?”

땅의 흔들림이 커졌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자령비고 아래의 거대한 광장은 역대 무림맹주들의 무덤이었다.

“세상을 경악시키려면, 대체 누가 수라겁황이 되면 좋을까?”

“서,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오, 태자. 그럴 리가 없잖소?”

법허가 상황을 짐작하고는 비명처럼 외쳤다.

구양걸도 창백해진 안색으로 손을 떨었다.

드드드드- 쩌저저적!

땅이 갈라졌다.

“무림맹 낙수의 맹세 속에 또 다른 맹세가 숨어 있다면?”

진동하던 땅이 기어이 갈라지며 무언가가 솟구쳤다.

찬란한 빛에 휩싸인, 거대한 기운을 지닌 한 명의 사람이었다.

“아아. 아아아!”

설청산은 부들부들 떨었다.

솟구친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이미 아는 것이다.

설청산이 발작하듯 몸을 돌리며 은교교를 향해 외쳤다.

“달아나라, 교교야! 나는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수가 없다.”

순간 빛이 일어났다.

번쩌-억!

솟구쳐 오른 사람으로부터 뿜어나온 빛은 사도명의 이마를 정확하게 노렸다.

설청산이 두 손을 들어 자신을 향하는 빛을 막으며 외쳤다.

“당장 달아나, 교교야.”

콰아-앙!

빛을 막아낸 설청산의 몸이 허공에서 십여 장이나 밀려났다.

솟구쳐 오른 사람으로부터 두 번째의 빛이 일어났다.

번쩌-억!

“막지 못한다. 모든 마공은 겁황의 힘에 저항할 수 없느니!”

설청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힘에도 상대성이 존재한다.

지하로부터 솟구친 자의 힘은 설청산의 마공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설청산은 빛의 강렬함이 자신의 마공을 모두 녹여냄을 느끼고, 눈을 감고 말았다.

콰-아앙!

설청산의 바로 앞에서 폭음과 더불어 빛이 산란했다.

사도명이었다.

청색과 자색이 함께 솟구치는 청옥소검을 들고, 그가 설청산을 노리는 빛을 물리친 것이다.

“자청쌍검?”

지하로부터 솟구친 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수라겁황이 각성하면, 아수라전생을 통해 과거의 모든 기억을 공유한다지? 그 덕분에, 알아보는 것인가, 겁황?”

사도명의 양손은 자색과 청색의 검기가 뿜어내고 있었다.

청옥소검이 그 검기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밝게 빛났다.

“쌍검은 두 자루의 검이 아냐. 한 자루의 검에 담길 수 있는 두 가지의 내공을 뜻하는 단어지.”

우주오검 중의 네 번째!

자청합일은 개벽이 일어난 후, 새로운 세상의 탄생이 낡은 세상의 소멸과 함께하는 검이었다.

광채 덩어리에 어렸던 빛이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광채의 주인이 마침내 모두의 앞에 헌신했다.

“아, 아미타불.”

법허는 주저앉고 말았다.

구양걸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혈교의 선조들께서는 무척 고민을 많이 하셨지.”

금강왕이 둥실 몸을 띄웠다.

“중원의 혼을 영원히 말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대체 무엇일까? 누가 겁황이 되어야 할까?”

다른 네 명의 오행왕들도 금강왕의 옆에 서며, 광채의 주인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조아렸다.

“오대노사가 삼가 겁황의 존체를 배알하나이다.”

그들의 중앙에 서 있는 사람.

모두가 그를 안다.

무사라면, 그의 모습을 모를 방법이 없었다.

무림맹의 제2대 맹주!

파천도제 호불군이 마광을 온몸에 휘감은 채로, 무림맹의 하늘에 떠 있는 것이다.

사도명이 신음했다.

“파천도제. 그리고 수라겁황.”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 천무제 때는 실패했으나, 결국 이번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하하.”

금강왕이 큰소리로 웃었다.

“무림맹의 태자와 맹주가 모두 혈교의 인물이었나, 금강왕?”

금강왕이 사도명을 보며 웃었다.

“하하하. 실패는 너뿐이었어. 제거하려 했는데, 달아났더구나.”

겁황 재림을 꿈꾸던 자들!

사도명이 태자의 자리를 갑자기 벗어던지지 않았더라면, 오행왕은 이미 오래 전에 사도명의 제거를 시도했을 것이다.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겁황은 단순히 무공이 강해진다 하여 완성되지는 않아.”

파천도제 호불군.

영웅으로 죽어서 무덤 속에 안장되었던 그가, 수라겁황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옳다. 아수라전생. 전대 모든 수라겁황의 능력과 기억을 가지고 부활해야만 하지.”

“무림맹 역대 맹주의 무덤을, 아수라전생의 장소로 이용하다니?”

은교교의 귓속에 사도명의 전음이 다시 울렸다.

[지금 뿐이오. 아수라혈교를 막아낼 자신은 있었으나, 파천도제가 변한 수라겁황은 자신 없소.]

[싫어요.]

은교교는 사도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도명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수라전생은 겁황의 영혼이 겪었던 모든 기억을 후대에 전해주는 대법이오.]

사도명의 손에는 자청쌍검이 들려 있었다.

[수라겁황은 이미 우주오검을 한 차례 겪어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당하지 않을 거요.]

우주오검의 마지막은 우주홍몽.

태초의 꿈처럼 아득하며, 그렇기에 절대적인 검이었다.

그러나 수라겁황은 이미 우주홍몽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당했던 무공에 또다시 당할 자가 아니었다.

은교교는 사도명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설청산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라겁황에 설청산까지. 당신 혼자 싸우게 두긴 싫어요.]

[혼자가 아니오. 왜냐하면 설청산은….]

그때, 다른 사람의 전음이 은교교의 귓속에서 동시에 울렸다.

[달아나라, 교교야.]

은교교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지닌 마공은 수라겁황의 마공에 굴종한다. 어서 도망쳐.]

믿을 수 없게도, 전음의 주인은 설청산이었다.

은교교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모든 사람을 해치고자 하더니, 왜 갑자기 날더러 도망치라고 말하는 거죠?”

설청산은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이 상황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은교교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음이 아니라 행동을 보시오.”

“행동, 이라고요?”

“설청산 맹주는 천라옥벽을 핑계로 당신을 무림으로 도피시켰소. 화왕 소빙유의 마음이 돌아서도록 했소. 지금까지 죽은 이는 대부분 동심결의 마인들 뿐이잖소?”

은교교의 눈이 커졌다.

사도명의 말을 듣고 있던 법허와 구양걸도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사도명의 말은 사살이었다.

무림맹을 끝내 배신했던 서른두 명은 지금 모두 죽고 없었다.

하지만 동심결을 떠나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온 원로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법허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놀라서 외쳤다.

“설청산 맹주가 조화인이었던 거요? 적을 오랫동안 속였던 거요?”

“아닙니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조화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오?”

“천무제 좌능후 님은 무림맹주가 된 후에 경악합니다.”

사도명은 허공에 손으로 구결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무림맹이 실상은 아수라혈교를 탄생시키기 위한 조직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무림맹을 없애지 않고 혈교를 막을 방법을 궁리합니다.”

사도명이 보여주는 구결은 천중무극신공의 기수식이었다.

“그래서 이걸 만듭니다. 이미 완성된 천중무극신공의 완성을 제2대 호불군에게 부탁하지요.”

“천중무극신공이 조화인과 관련이 있단 말이오?”

“마음을 이끌어 내는 무공.”

사도명은 살아서는 파천도제라 불렸던 수라겁황을 보며 말했다.

“파천도제가 천중무극신공을 완성했을 때, 첫 번째 조화인이 세상에 탄생했던 겁니다.”

수라겁황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정말 교활한 수작이었지. 천중무극신공을 익히자, 무엇인가를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언령(言靈) 입니다.”

“맞다.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 배려. 자비심.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새 나는 혈교의 후예가 아니라 파천도제로서 살더구나.”

사도명이 설청산을 보았다.

“마찬가지셨지요?”

설청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궁금하구나. 내가 달빛 교교하던 그 밤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천중무극신공의 나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의 나 때문일까?”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조화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

천중무극신공이 일깨우는 사람의 진짜 마음이 조화인인 것이다.

양심, 혹은 인간성이라 부르는, 사람 마음 본연의 자비!

“무림맹은 지금까지 조화인의 싸움으로 지켜져 왔던 겁니다.”

설청산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네 질문에 진짜 답을 하마. 아수라혈교가 지배하는 세상에, 나의 딸과 그 후예들이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맹주님.”

“생각했지. 천하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운명을 바꾸자. 차라리 수라겁황이 된 후에 스스로 죽는다면… 세상은 어쩌면….”

“아아. 아버지.”

은교교가 소리치면서 설청산을 향해 달려갔다.

설청산은 양팔을 넓게 벌렸다.

오해는 이제 풀렸다.

설청산은 오랫동안 멀리 두었던 딸을 마침내 가까이 안은 채,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교교가 흐느꼈다.

“아아. 제가 틀렸네요. 어머니가 맞으셨어요.”

은요진은 설청산을 믿었다.

설청산이 세상에 위대한 일을 할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라대제의 이야기를 강호에 흘렸다. 언령을 통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그의 후예를 찾고자 했다.”

설청산은 사도명을 보았다.

“천라대제의 후예가 나를 찾아주어 기쁘다. 그때의 검몽이 천라대제의 후예일 줄은 몰랐다. 하늘의 안배란 참으로 놀랍구나.”

사도명은 서로를 안고 있는 아버지와 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진심은 아무리 오래 묻혀 있어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오래 감추어 온 진심일수록 사람을 감동시킨다.

사도명은 수라겁황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귀하구려. 고금 구천강 중의 한 사람이며 아수라전생의 기억을 지녀 우주오검을 속속들이 아는 당신을, 나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수라겁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럴 방법은 없다. 네가 이길 방법은 절대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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