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천라대제 재림
곤륜.
천년 도교의 성지에, 지금 구대마정이 일으킨 피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러지 말게.”
운학자가 소리쳤지만, 운송자는 높이 들었던 오른손을 끝내 아래로 내려쳤다.
운진자는 혈섬독에 저항하느라 운송자의 오른손을 피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콰앙!
폭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피는 튀지 않았다. 대신 돌가루만 크게 사방으로 튀었을 뿐이었다.
“아아. 걱정을 했네. 무, 무량수불. 자네가 곤륜을 배신 않을 거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운학자가 도호를 읊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우려를 했다네. 운송 사제.”
운송자의 표정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 그 자신조차 자신이 운진자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듣다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장문 사형?”
“조화인이 말하더군. 자네가 제자들을 해치지 않고 마혈만 짚으면, 이미 마음이 흔들린 것이니 적대시하지 말라고.”
운송자는 자신이 마혈을 짚여 주저앉힌 좌인득을 보았다.
운기조식을 마친 운진자가 마침내 눈을 뜨고 운송자를 보았다.
“고맙네, 운송 사제.”
운송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요. 나는 배신자입니다. 자는 지옥마정의 제자로 길러졌던 몸이란 말입니다.”
운송자는 구대마령과 곤륜파 전대고수들의 싸움을 둘러보았다.
“이길 쪽을 배신하고, 지는 것이 뻔한 곤륜을 택한 멍청이고요.”
운학자가 고개를 저었다.
“곤륜이 이긴다 들었네.”
“그것도 조화인의 말입니까?”
“그러하네. 조화인의 말은 언제나 믿을 수 있지.”
“조화인이란 대체 누굽니까? 누구기에, 지옥마정의 등장을 예견하고, 내 마음까지 읽어냅니까?”
“조화인을 세상에 남긴 분은 천무제님일세.”
“천무제 좌능후? 1대의 무림맹주 말입니까?”
“그러하네.”
“아무리 천무제가 남긴 사람이라 해도 무립니다.”
운송자는 구대마령과 곤륜 전대 고수들의 싸움을 다시 보았다.
지옥마정은 오랜 시간 증오로 축적된 힘을 지녔다.
그에 맞서 싸우는 곤륜파 고수들의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운송자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이미 안다.
“수라라겁황이 재림합니다. 그를 막을 능력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무량수불. 그 점도 전갈 받았네. 오직 조화인만이 막을 수 있고, 조화인이 막아낼 거라더군.”
“결과는 조화인의 예측과 다를 겁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오대마문이 곤륜파에 심어둔 사람은 운송, 자네만이 아니기 때문에?”
운학자의 말에 운송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알고 계신 겁니까?”
“조화인이 말하더군. 아득한 예전부터, 오대마문은 자신의 제자를 무림 각파에 침투시켰다고.”
“그럼 저기의 고수들 중에도 간세가 있음을 알겠군요.”
운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조화인이 말했다네. 그들도 운송, 자네와 같을 거라고!”
“!”
운송자는 눈을 부릅뜬 채로 다시 한번 주변을 보았다.
마령과 싸우는 전대의 고수들!
그들 중에는 분명히 자신처럼, 지옥마정에서 파견된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이 손을 되돌려 지옥마정의 편을 들어 곤륜을 배신해야만 할 터였다.
그러나 곤륜파의 무사 누구도 싸우는 손길을 돌리지 않았다.
“아!”
운송자는 탄식했다.
“모두들 나와 같다고? 조화인은 그걸 안다고? 운학 사형. 조화인은 대체 어떠한 사람이란 말이오?”
“그는 숫제 사람이 아닐세.”
“사람이 아니면 신선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는 대체 어디에 있소?”
“모든 곳에 있네.”
운학자가 운송자를 가리켰다.
“심지어 조화인은 자네에게도 깃들어 있다네.”
“그게 대체 무슨 뜻… 아!”
운송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탄식했다.
그가 보는 북동쪽의 하늘 위로, 다섯 줄기의 선명한 빛무리가 엉키어 오르고 있었다.
“오, 오대노사가 마침내….”
운송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혈교의 재등장이다. 대세는 돌이킬 수 없다. 천라대제가 다시 나타나도 이제 상황은… 응?”
운송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스스로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천라대제가 다시 나타나도? 나는 자주 이 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말은 힘을 지닌다.
그 힘은 언령(言靈)이라 칭하며, 말을 통해 퍼져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잠식한다.
북동쪽 하늘에 걸린 빛무리.
서로 다른 다섯 갈래의 마기는 다섯이면서 하나였다.
‘누군가 언령을 퍼뜨렸다. 대체 누가 무슨 용도로? 언제부터 이 말을 퍼뜨렸단 말인가?’
운송자는 양손에 운룡대구식의 힘을 가득 채웠다.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될 터.’
그는 이미 선택을 마쳤다.
“타핫!”
운송자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싸움판 속으로 달려들었다.
지금은 구대마령에 대항하여 곤륜의 하늘을 지키는 일이 급했다.
**
다섯이면서 하나!
푸른색, 붉은색, 검은색, 흰색, 그리고 노란색이 하나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빛은 성스러우면서도 섬뜩했다.
오행왕이라 알려진 다섯 명.
그들의 숨겨진 정체가 바로 오대마문을 이끄는 오대노사라는 사실은 모두를 경악시켰다.
법허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땅을 박차며 뒤로 날았다.
“이, 이게 무슨…?”
“놀랐는가, 법허?”
금강왕이 오른손을 뻗었다.
찬란한 금빛을 머금은 그의 팔이 길게 늘어나더니, 법허의 머리를 덮쳤다.
“앞으로는 아무도 놀랄 일이 없을 게야. 죽은 자들은 누구도 놀라지 못하니까.”
법허가 물러나는 속도는 빛살처럼 빨랐다. 하지만 금강왕이 팔을 뻗는 속도는 더욱 빨라, 커다랗게 부푼 그의 오른손은 끝내 법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말았다.
“너부터 시작하자.”
“크아악!”
법허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금강왕의 늘어난 팔에서 뿜어 나온 힘이 법허의 머리를 으스러뜨리려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포에 휩싸였다.
무림맹의 부맹주이자 삼성 중의 한 명인 법허가 금강왕의 일초를 당해내지 못하다니!
금강왕의 정체는 사망각주인 금맹맹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한 소리 차가운 음성이 법허의 비명을 덮었다.
“그래. 나도 결정 내렸다. 너부터 시작하기로.”
번쩍!
빛이 일어났다.
사도명의 손에서 일어난 빛이 길게 뻗어 있는 금강왕의 팔뚝을 단숨에 잘라 버렸다.
“큭!”
금강왕이 팔을 거두었다.
잘려나간 그의 손과 팔뚝이 여전히 법허의 머리에서 꿈틀거렸다.
“금강왕이라 해도 일초에 부맹주를 제압할 수는 없지. 환상에 휩싸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도명은 법허의 머리를 붙잡은 손을 떼어내 손바닥 사이에서 짓이겼다.
“구천소혼심법을 이용한 사술 따위에만 당하지 않으면, 누구나 충분히 싸워볼만 합니다.”
금강왕의 팔뚝이 허공에서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돌아보는 사람들의 눈에, 여전히 멀쩡한 금강왕의 오른팔이 보였다.
사람의 팔은 본래 몇 장이나 늘어날 수가 없다.
늘어났던 금강왕의 팔은 처음부터 환영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힘을 갖춘 후에도 오래 웅크렸다. 중원에 숨겨진 힘. 과거 검성 설운경의 일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아니 되니 내부로 들어와서 샅샅이 조사했다.”
금강왕이 자신의 팔뚝을 한 차례 본 후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황인 무황이 우리들의 손에 든 이상, 위협은 없어 보였다. 이비(二秘)라 불리는 두 개의 은밀한 비밀 중, 천무제 좌능후가 남겼다는 조화인만이 우리에겐 유일한 위협요소라는 판단을 내렸다.”
금강왕이 사도명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네 녀석이 바로 조화인이냐?”
사도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만 생각해 보고.”
정말로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사도명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소.”
금강왕의 몸을 감싼 노란 기운이 세차게 맴을 돌았다.
“나를 놀리는 것이냐?”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네놈은, 대체 누구냐? 누가 너와 같은 자를 길렀단 말이냐?”
“나는 말하자면….”
사도명은 다시 잠시 더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조화인의 제자. 그렇게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소.”
오행왕의 다섯 몸에서 일제히 다섯 색채의 기운이 요동쳤다.
화염왕이 붉은 기운을 눈에서 뿜어내며 소리쳤다.
“조화인이 정말로 실존하고 있단 소리냐? 그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들은 지난 이백 년간 강호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
“조화인은 어디에나 있소.”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또한 어디에도 없지.”
“크크크. 네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자르마. 목과 혀만 남겨 놓으면 제대로 대답할 참이냐?”
목령왕이 푸르스름한 기운을 연신 뿌리면서 웃었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목령왕. 아니, 독혈당주 목인괴. 당신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군.”
“나는 네놈과 만난 적이 없다. 어찌하여 내 웃음을 아는 듯이 말하는 것이냐?”
“나도 당신과 만난 적이 없소. 하지만 나의 사부인 조화인은 당신을 분명히 만났지.”
“정말로 조화인이 존재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느냐? 여기 무림맹의 종자들을 모조리 죽여야 나타날 생각이냐?”
“수라겁황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으니, 조화인 또한 모습을 드러내기 싫지 않겠소?”
금강왕이 설청산을 가리켰다.
“겁황은 여기에 이미 나타나 있지 않느냐?”
“하하하. 그 말을 믿으라고?”
사도명이 소리 내어 웃었다.
“수라겁황은 지존. 헌데 오대노사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도, 수라겁황임을 믿으라고?”
설청산이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설청산이 줄곧 보던 땅 아래를 가리키며 외쳤다.
“단지 다섯 마공을 백옥유액의 힘으로 혼합시키는 것만으로 수라겁황이 탄생한다면….”
사도명이 땅을 박찼다.
“왜 아수라혈교가 그 긴 세월을 숨어 지내야 했을까?”
“어디까지 아는 거냐?”
설청산이 오른손을 들었다.
수라영겁수의 흰 빛이 해일처럼 일어나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사도명을 덮쳤다.
콰아- 앙!
폭음이 크게 일었다.
이미 한 차례 부딪쳐서 설청산에게 패배했던 사도명은, 그러나 이번에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설청산을 밀어냈다.
“이, 이럴 수가….”
설청산은 몇 걸음 물러나고나서야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양손 손바닥에 무수히 나타난 검은 선을 보았다.
검은 선은 검흔이었다.
사도명이 일으킨 검기가 수라영겁수의 막을 뚫고 들어와 무수한 상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무영섬도, 천극멸도 아니었다.
“이건 무엇이냐?”
사도명의 양손에서 검기가 빛무리로 일어났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파천삼로의 세 번째. 궁극을 보는 길, 개벽의.”
“세 번째 초식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는 말이냐?”
뒤이어지는 금강왕의 말은 모두를 놀라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검성의 우주오검 중의 세 번째이기도 하군. 너는… 검성의 후예냐?”
“뭐, 그럴 수도 있고.”
사도명은 백옥유액을 잃고 바닥을 뒹구는 천라옥벽을 가리켰다.
옥벽이 어기섭물의 공력에 의해 사도명의 손바닥으로 들어갔다.
“천라대제는 이 천라옥벽에 세 가지의 비밀을 남겨 놓았소.”
“그중의 하나인 백옥유액은 설청산이 마셨소. 다른 두 가지 비밀이 또한 있단 말이오, 태자?”
법허가 말하자,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소.”
“있었다? 그 말은 더 이상은 없다는 뜻이오, 태자?”
“나는 파천삼로를 얻은 뒤 괴로웠소. 진전이 멈추었으니까. 그러다가 옥벽을 얻게 된 거요.”
사도명은 지금은 밋밋하게 비어 있는 천라옥벽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표면에 새겨진 검술. 천라대제께서 검성의 후예임을 이제는 모두 알 터. 대제께서 남기신 검이 우주오검이었소.”
설청산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사도명을 보았다.
“네가… 우주오검을… 얻은 자라고?”
금강왕이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 혈교의 뜻을 좌절시킨 검성의 후계자라고?”
“천라대제의 후계기도 하고. 설청산 맹주. 이제 대답해 보시오. 정말 대세를 돌이킬 방법이 없소?”
설청산은 사도명이 들고 있는 옥벽만을 줄곧 보았다.
“네가, 이미 천라옥벽의 비밀을 풀었다는 거냐?”
“그렇소.”
“그럼 백옥유액은…?”
“진짜요. 백옥유액에는 마공을 극제하는 힘이 있소.”
“마공을 극제… 한다고?”
“처음엔 마공을 높여주는 듯하나, 결국은 태워서 없애지.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소만.”
“태워서, 없앤다고?”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의중중(加衣重重)! 여러 겹의 옷은 일견 따뜻해 보이지만 매우 부자유스럽소. 설청산. 이제 마공의 붕괴가 시작될 거요.”
“큭!”
설청산이 가슴을 잡았다.
검은 핏물이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밖으로 흘렀다.
“오, 오히려 함정을…?”
“천라옥벽의 세 번째 비밀은 그건 아수라혈교와 수라겁황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었소.”
사도명은 한 자 한 자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적혀 있더군. 장차 무림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문파가 만들어진다면, 가장 먼저 의심하라. 그곳이 바로 아수라혈교일 것이며, 수라겁황을 키우는 도가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