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아수라혈교 등장
흑영에 속한 이들이 품은 화약이 모두 터지면, 무림맹이 세워진 지반이 무너진다.
파천도제 호불군이 곳곳에 써 붙인 자수정 편액.
거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마지막 순간 편액들이 터질 것이며, 결국 지하의 자령비고 역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무림맹 안에서 수라겁황이 탄생한다면, 무림맹은 스스로 무너져 무림을 지켜야 한다.>
흑영은 파천도제 호불군이 남긴 유서를 직접 실천하는 자랑스러운 집단이었다.
흑견은 눈을 감았다.
‘삼매 진화를 일으키면 화약은 폭발을 시작한다.’
내공을 일으키려는 순간에, 가슴에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다시 눈을 뜨자, 믿기지 않는 상황이 시야로 들어왔다.
수앵의 검이 흑견의 가슴을 깊이 찌르고 있었다.
“수앵. 다, 당신이 왜?”
수앵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가 만약 편안한 삶을 살면서 당신을 만났더라면, 틀림없이 당신에게 청혼했을 거예요.”
“아!”
흑견은 고통스런 와중에도 기뻐서 웃었다.
자신과 똑같은 생각.
소앵과 자신의 생각이 통했다는 사실이, 흑견은 더 없이 기뻤다.
“그, 그런데도 왜 나를 …찌른 거요?”
“나는 무림인으로 살지 않았어요. 하찮은 하녀로 업신여김 받으며 살아온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세상을 위해 희생하지요?”
“아!”
“우리 동료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의 희생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흑견은 수앵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아주 오랫동안 비슷한 생각을 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대체 누구를 위한… 희생일까?”
“약속을 받았어요. 세상이 아수라혈교의 것이 된다 해도, 우리 동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하겠다는.”
“아!”
흑견은 마지막 기력을 다해, 주변에 있는 어둠의 그림자 동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는 웃었다.
“그거 좋군. 나는… 임무를 다하고자 했지만, 동료들이 행복하다면 그것도 또한… 좋소.”
“ …미안해요.”
흑견은 고개를 다시 한번 더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웃으며, 꼭 하고 싶은 말을 끝냈다.
“…사랑하오.”
“아!”
흑견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호흡은 끊어졌고, 심장도 더 이상은 뛰지 않았다.
흑견은 죽었다.
이제 흑영이 최후의 수단으로 몸속에 심어 놓은 화탄이 폭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림맹은 무너지지 않고, 대신 무림이 무너질 것이다.
그래도 아무 상관없다고 수앵은 생각했다.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이 더 없이 가슴 아팠다.
“동료들을 잃지 않으려고 당신을 해쳤어요.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해친 여자를….”
수앵은 흑견을 찔렀던 검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나는 용서할 수 없네요.”
수앵은 입으로 피를 토했다.
고통을 참아내면서, 수앵은 힘겹게 흑견을 향해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우리는 왜 평범하게 태어나지 못했을까요? 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었을까요?”
흑견은 대답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수앵도 더 이상은 묻지 못했다.
그녀도 이미 죽어,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이제 아득하게 먼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는 묻거나 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로를 마주보며 달콤하게 웃으면 될 일이었다.
설청산은 법허를 보고, 은교교를 보더니, 이윽고 사도명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흑견과 수앵의 죽음은 무림에서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설청산과 사도명은 그들의 죽음에 숨은 속사정을 충분히 짐작해낼 수 있었다.
“이제 알겠지? 왜 내가 왜 천라대제가 살아서 와도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말했는지.”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대로 싸움은 당장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니군요. 수백 년에 걸친 준비는 파천도제 호불군의 안배마저 녹이 슬고 빛바래도록 만들었군요.”
“은교교를 데리고 떠난다면, 너희 둘의 살 수 있는 길만은 내가 열어주마. 마지막 배려다.”
사도명이 은교교를 보았다.
“들었소?”
“네. 들었으니 즉시 대답할게요. 나는 두려운 일을 앞에 두고 달아나는 남자에게 반하지 않았어요.”
“하하하.”
사도명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고백하는 거군. 적당한 상황은 아니지만, 하하하 직접 들으니 기분이 좋긴 하군.”
설청산이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죽겠단 거냐?”
“교교에게 약속했소. 오늘밤, 동심결의 뿌리를 뽑겠노라고."
설청산은 소빙유의 뒤에 서 있는 서른 명을 향해 명령했다.
“사도명을 죽여라.”
칠마 중의 우두머리 격인 검마가 놀라서 외쳤다.
“무령마와 풍마가 단 일초에 죽었습니다. 우리들 중, 사도명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청산은 자신의 명령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움직여라. 사도명을 죽이지 못하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검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청산이 무엇을 원하는지,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치-잉!
검마가 검은 마기가 감도는 검을 뽑아 한 차례 휘둘렀다.
그는 몸을 날리기 전, 소빙유를 한 차례 보았다.
“겁황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도 알아들었을 거요. 화염왕. 결국 당신 역시 언젠가는… 큭!”
검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머리가 설청산의 오른손에 잡혔고, 잡힌다 싶은 순간에 소리도 없이 두개골이 박살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검마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비명은 오히려 소빙유의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대체 뭘 하는 거죠? 이용가치가 끝났으니 죽여 없애겠단 건가요?”
“나는 다만, 움직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명령을 내렸지.”
“으아아아아-!”
스물아홉 명이 모두 땅을 박차고 사도명을 덮쳤다.
사도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의 양손에 마음에서 우러난 검기가 떠올랐고, 그 검기는 빛살보다 빠르게 허공을 감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물아홉 명은 허공에 뜬 채로 즉사했다.
스물아홉 시체가 뿜어내는 피는 비처럼 하늘을 가득 덮으며 무림맹 장내로 떨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참상을 만들어 낸 이는 한 명이었다.
“아아! 아아아.”
소빙유가 몸을 떨더니, 이윽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그녀는 비명과 더불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거대한 핏빛의 꽃이 소빙유의 몸 전체를 덮으며 피어났다.
소빙유가 지니고 있는 최후이자 최고의 무공, 저주혈화공.
그 꽃이 노리는 대상은 놀랍게도 설청산이었다.
“이제야 알겠어. 첨부터 이랬어야 해. 당신은 악마가 아니라 영웅으로 세상에 기억되어야만 해.”
설청산의 두 팔뚝에 하얀 빛이 일어났다.
“그것이 네 선택이냐?”
수라영겁수의 강력한 기운이 저주혈화를 부수었다.
꽈드등!
화염왕 소빙유는 가슴에 설청산의 일수를 얻어맞고, 피를 토하며 뒤로 날려갔다.
“화염왕!”
탁호천이 몸을 날려, 날아오는 그녀를 두 손으로 받았다.
피를 토하는 소빙유의 혈도를 짚어 지혈하고, 등에 내공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괜찮소? 괜찮은 거요?”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요? 나는… 나는 왜 이렇게 계속 잘못된 선택만을 했을까요?”
탁호천은 소빙유가 잘못된 선택을 했던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소빙유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옳은 선택을 했다.
설청산이 사도명을 보았다.
“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마지막 질문을 했던 이유는 이것이냐? 마지막 순간에 사람의 본마음이 드러나길 바랐더냐?”
사도명은 부인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니까.”
전서구들의 모두 내려앉았다.
삼수선생 종심기가 달려가서 각 전서구들의 발에 매달린 서찰을 빼내 읽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오대마문의 침공. 문파 내부의 배신자가 존재. 모두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갈들입니다.”
종심기는 서찰을 바꾸어 계속 읽어 나갔다.
“해남검파가 독혈당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독인은 단 한 명이 왔으나, 해남검파 이백예순세 명의 검수들이 당해내지 못하고….”
“청성파가 자중지란에 휩싸였습니다. 흑귀문이 심은 흑귀로 조종당하는 문하 제자들이 동료를 해치고 있어서… 아!”
줄곧 좋지 않은 소식만을 읽어 내리던 종심기가 반색했다.
“이건 낭보입니다. 그간 은거해 있던 팔왕 중의 다섯 명, 오행왕들이 천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출도했다 합니다.”
종심기는 한 장의 서찰을 들고 법허에게 달려가서 전달했다.
법허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내용을 모두에게 알렸다.
“다행이오. 오행왕들이 무림맹으로 향하고 있다 하오. 천하가 겁난에 휩싸였지만, 세상을 도울 은거지사들이 속속 나타날 테니 결코 의기소침하지 맙시다.”
“와아아아아-!”
원로들과 무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설청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세상이 그리 쉬워 보이나?”
사도명은 먼 하늘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갈래의 강한 기운을 느끼고 먼 하늘을 보았다.
“팔왕 중의 오행왕?”
은교교가 사도명의 손을 붙잡으며 활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오행왕은 강해요. 적마교의 겁난이 일어났을 때, 적마교 본단을 다섯 분이 무너뜨렸을 정도로 강해요.”
“그런가? 이미 구십 년 전에, 적마교를 물리쳤단 말이오?”
사도명은 설청산을 보았다.
설청산의 안색은 어두워서, 세상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수라겁황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그는 계속 땅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안이하게 판단했소.”
“그게 무슨 말이죠?”
“달아나야 하오. 무조건 멀리. 천라대제만 되살아나면 상황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안이했던 것 같소.”
“오행왕은 강해요. 같은 팔왕이지만 전대의 고수들이에요.”
은교교가 미소를 지었다.
“그들과 힘을 합하면 … 수라겁황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요.”
“틀렸소. 사실은… 이런, 이렇게 빠르다니. 이미 늦었나?”
사도명이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 하늘로부터 다섯 갈래의 강력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콰콰콰- 콰쾅!
날벼락이 내려앉는 듯, 땅이 파였고, 주변에는 먼지가 일어났다.
도합 다섯 군데.
쿠우우우우-!
그 먼지가 가라앉는 다섯 군데에, 각각 다른 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다섯 명이 나타났다.
금강왕, 토왕, 목령왕, 화염왕, 수왕이라 불리는 오행왕이었다.
[교교를 데리고 가라, 사도명.]
사도명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설청산의 전음을 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러고 싶은데….”
법허가 나타난 오행왕을 향해 합장했다.
“아미타불. 법허가 오행왕 선배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법허 대선사는 삼성(三聖) 중의 한 명인 불성(佛聖)이었다.
팔왕에 속하는 오행왕보다는 무림의 분류에서는 앞섰으나, 배분까지 따지면 전혀 다르다.
오행왕들은 적신교의 난이 일어났던 구십 년 전에 이미 일백의 나이를 넘긴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이백을 살 수 있을까?
강력한 내공과 무공을 지니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오행왕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오행왕은 제2대 무림맹주인 파천도제 호불군과도 어울렸던 신분이기에,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독보적이었다.
금빛으로 휘황하게 빛나는 금강왕이 법허를 보며 말했다.
“법허! 기억이 나는군. 아마도 적신교와의 일전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맞나?”
“아미타불. 맞습니다. 그때 저와 무당파의 장무정이 함께 싸울 때 많이 도와 주셨지요.”
“시간이 제법 지났구나.”
반노환동의 경지를 지나, 사십 대로 보일 뿐인 금강왕은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시선을 설청산에게서 멈추었다.
“아수라혈교가 마침내 등장하였다기에 은거를 깨고 나왔다.”
“아미타불.”
법허가 불호를 읊었다.
“경악스럽게도 무림맹주인 설청산이 수라겁황으로 밝혀졌습니다.”
금강왕이 한 차례 피식 웃더니, 다시 말했다.
“그러게. 수라겁황이 나타났으니 아수라혈교도 마침내 등장해야지.”
설청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아수라혈교가 등장해야지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던 탁호천은 사도명의 전음을 들었다.
[아직 동물을 부릴 수 있지요? 은교교를 데리고 달아나세요.]
탁호천은 무슨 뜻인지를 물어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제자 설청산이 삼가 혈교의 오대노사를 뵙습니다.”
설청산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오행왕의 몸에서 피어나는 다섯 갈래의 빛이, 하늘로 올라가며 서로 뒤엉켰다.
그 모습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탁호천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오대마공.
설청산의 몸에서 하나로 섞이기 전의 오대마공이 뿜어내던 빛!
지금 오행왕이 뿜어내는 빛이 그때 설청산의 빛과 정확하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