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30화 (30/168)

030화. 아버지와 딸

검과 피로 만들어지는 무림!

다시 무림으로 돌아온 후, 사도명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싸웠다.

그 모든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는 설청산, 그는 평생 천하를 속이며 살았다.

무림맹의 맹주로 천하백도인의 존경까지 받아왔다.

“너는 이기지 못한다.”

설청산의 말에 담긴 확신은 사도명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기지 못 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사도명의 입을 뚫고 나간 목소리는 뜻밖의 것이었다.

“달빛이 좋소.”

설청산이 하늘을 보았다.

뚫린 지붕을 통해 중천한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교교했다.

“나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오. 동심결은 뿌리 뽑힐 거요. 그러니까, 교교. 당신은 안심하고 물러나.”

설청산을 보며 시작된 말은, 은교교를 향하면서 끝이 났다.

설청산과 사도명의 싸움은 흉하고도 험할 것이다.

힘과 힘이 충돌하는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알겠어요.”

은교교는 움직였다.

“…뭐하는 거요?”

놀란 사도명이 소리쳤다.

은교교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걸어와, 사도명과 설청산의 사이에 우뚝 섰다.

설청산도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하자는 게냐?”

은교교가 설청산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천라옥벽은 내 것이에요.”

그 말에 설청산은 소매 속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어 휘황하게 빛나는 옥벽을 보이면서 물었다.

“이것 말이냐?”

“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옥벽을 구했어요.”

설청산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 것임이 분명하지 않느냐?”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가라고. 가서 네 아버지를 도우라고. 그는 분명히 힘들어 하고 있을 거라고.”

“그랬느냐?”

“그래서 맹의 특별순찰을 맡게 되었을 때는 무척 기뻤어요.”

“나도 기뻤다. 생각했지. 이 아이는 언젠가 내게 도움이 될 일을 해 주겠구나!”

설청산은 천라옥벽을 내주지 않고, 다시 품속에 갈무리했다.

“유용하게 사용하마, 딸아.”

원로 대부분이 크게 놀랐다.

이미 상황을 짐작하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진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은교교가 설청산의 딸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알려진 것이다.

사도명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지어주겠다고 말한 이유는….”

“알아요. 내 선택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거였죠?”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나도 생각했어요. 모두에게 내 선택을 알리겠다고.”

은교교는 사도명의 옆에서 설청산을 보며 양팔을 넓게 폈다.

설청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그곳을 너의 자리로 선택했느냐?”

“사도명을 해치려면, 나도 함께 죽여야 할 겁니다.”

“그러지 못할 것 같으냐?”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았다.

“내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을 단 하룻밤의 추억과 맞바꿨어요.”

은교교는 힐끗 곁눈으로 설청산을 본 후, 말을 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으셨죠. 언제나 그날을 떠올리면, 미소 짓곤 하셨어요.”

“…인정하마. 은요진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설청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지.”

설청산의 옆에 서 있는 소빙유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은교교가 외쳤다.

“사랑했었다? 그럼 지금은요?”

“지옥마정은 깊은 땅이다. 위에 서면 바닥이 보이지 않고, 아래에서는 하늘을 볼 수가 없지.”

설청산은 은교교와 사도명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곳에서 자랐다.”

은교교가 고함을 질렀다.

“달빛 교교했던 그날을 이미 잊었는지를 묻고 있어요.”

“갓난아기 때부터, 나는 그곳에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였지.”

지옥마정은 아홉 개의 깊은 우물을 뜻한다.

아홉 개의 마정에 아홉 명의 마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수라겁황이 검성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지키지 못했던 아수라혈교의 구대호위!

그들은 스스로의 죄를 물어, 깊고 깊은 땅속에 칩거했다.

오대마문 중, 가장 어둡고 깊은 땅인 지옥마정.

“먹을 것이 드물었다. 살기 위한 방법이 별로 없었어.”

“듣기 싫어요.”

“어쩔 수 없이 흡혈북명의 대법을 익혀야만 했다. 동료의 정혈까지 흡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듣기 싫다고 말했어요.”

“살고자 하는 갈망! 그 갈망을 따라 익혔던 무공. 혈운곡의 혈강과 흑귀문의 암흑진기. 사망각의 구천소혼심법. 독혈당의 앙천녹강과 절대독고를 다루는 법까지 모든 익힌 후에야 비로소 지옥마정을 나설 수 있었다. 세상의 빛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지.”

설청산의 눈빛이 아련했다.

은교교가 소리쳤다.

“그런 운명에 만족해요?”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키워졌다는 뜻이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지를 묻잖아요.”

은교교가 시선을 소빙유를 향해서 돌렸다.

“사부는 겨우 저런 사람에게 빠져 제 어머니를 배신했나요?”

소빙유가 대답하지 않고 한숨만 길게 쉬자, 은교교는 다시 설청산을 보았다.

“이 순간, 내 어머니의 선택을 원망합니다.”

“감히! 입을 다물어라!”

“내 어머니는 왜 당신 정도의 남자를 사랑해서, 내 피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했을까요?”

“은요진은!”

설청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녀가 무림태자인 나를 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심결주인 나를 택하지는 않았어-!”

은교교의 눈이 커졌다.

설청산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나로부터 도망을 쳤지.”

“무슨 뜻이죠?”

은교교가 다시 소리를 높였다.

“어, 어머니가 당신의 진짜 정체를 아셨다고요?”

“나는 은요진을 사랑했다. 비밀 같은 건 만들지 않았어!”

은교교가 은요진이 죽은 후, 어머니에 대한 것을 전해 들었다. 혹은 글로 남겨진 것을 읽었다.

“자세히 말하세요.”

“말한 그대로다. 은요진은 마지막에는 나를 택하지 않았지.”

설청산이 고개를 돌려, 입술을 깨물며 서 있는 소빙유를 보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달랐다.”

설청산이 소빙유를 당겼다.

“무, 무슨…?”

설청산의 입술이 소빙유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아!”

소빙유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입술을 떼어낸 설청산은 은교교를 보면서 웃었다.

“이 여자는 나의 진짜 신분을 알고 나서도 나를 택했다. 심지어 내가 죽이려 할 때에도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는지 물었느냐? 이것으로 답이 됐겠지?”

은교교도 몸을 떨었다.

사도명은 은교교의 손을 더욱 힘껏 쥐었다.

몸을 떨고 있는 그녀가, 그대로 쓰러질까봐 염려했다.

은교교가 고개를 돌려 눈물 그렁한 눈으로 사도명을 보았다.

“당신, 이길 수 있죠?”

은교교가 무엇을 묻는지 알기에,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은교교는 사도명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의 이름이 부끄러워요. 내 어머니의 추억은 슬프게 사라졌네요. 반드시 이겨요. 죽어도 이겨 줘.”

“죽지 않고 이길 거야.”

은교교가 사도명의 뒤에 섰다.

설청산은 오랫동안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은교교를 보았다.

사도명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의 시선을 막았다.

“당신의 눈은 이제부터는 나를 향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그래. 그래야겠구나.”

소빙유도 설청산의 뒤에 섰다.

은교교가 사도명의 뒤에 선 것처럼, 소빙유 역시 설청산을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죽임 당하거나 크게 다칠 때 가장 위험한 위치!

하지만 가장 빠르게 달려가 도울 수 있는 위치기도 했다.

설청산의 몸도 천천히 다시 떠올랐다.

어둡고 소름끼치는 기운이 그의 눈으로부터 소용돌이치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운은 도합 다섯 갈래!

오대마문의 마기였다.

“내 존재의 이유는 어릴 때부터 항상 하나였다. 나는 무림맹을 없애기 위해 길러졌지.”

눈에서만 흐르던 빛이 온몸을 타고 번져나갔다.

사도명의 몸에서도 은은한 빛이 솟구쳤다.

설청산의 기운이 무섭게 타는 불이라면, 사도명의 기운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물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타인으로부터 찾아선 아니 되오.”

창천일원의 공력이 온 몸을 돌면서, 그의 몸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 아미타불.”

법허가 손을 저으며 외쳤다.

“모두 멀리, 더 멀리 물러나.”

구양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주먹을 쥐며 말했다.

“싸움에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보장 못한다. 물러나라!”

원로들의 마음에 깃든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모두 같았다.

무림맹과 동심결.

오늘 둘 중의 하나가 사라진다.

두 갈래 갈림길 중 어느 길이 운명이 될지는 사도명과 설청산에게 달려 있었다.

은교교는 두 손을 모았다.

‘꼭 이겨요. 반드시.’

**

청해성 곤륜산!

설산, 혹은 옥산이라 불리는 곤륜산은 높고 험하여 구름조차 산을 건너지 못하고 중턱에 걸리는 일마저 잦다는 장소였다.

당금의 무림맹주인 설청산을 배출하여 더욱 유명해진 방파, 곤륜파가 곤륜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휴는 곤륜파의 3대 제자로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지?”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장휴의 얼굴이 핏기를 잃었다.

“구름인가? 아, 아니다. 마기야.마기의 덩어리야.”

장휴는 적양심법을 익혔다.

내문(內門)에 들어 도명(道名)을 받지는 못했지만, 3대 제자들 중 발군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동정을 잃지 않아야 유지할 수 있는 적양심법은 마기와 사기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내전에 어서 알려라!”

비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3대 제자 여럿이 달려왔고, 문파의 경계를 총괄하는 2대 제자 좌인득도 나타났다.

“무슨 일이기에… 아!”

장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좌인득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검은 구름이 다가온다고 착각할 정도로 강력한 마의 기운!

“설마 지옥마정인가? 지옥마정의 구대마인들이 모, 모두 나서지 않고서야 저런 정도의 마기는….”

곤륜의 밤이 깨져나갔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곤륜파가 빠르게 깨어나고 있었다.

“무량수불. 무슨 일이냐?”

도호를 읊으며, 주황색 도복을 걸친 도사 한 명이 허공에서 표표히 내려왔다.

운룡대구식!

경공술과 장법이 하나로 혼합된 곤륜파 최고의 무공.

주황 도복의 도사가 허공을 계단처럼 밟으며 내려서는 수법은, 용이 하늘에서 꼬리를 뒤집는다는 천룡번미의 초식이었다.

모두가 그를 향해 포권했다.

“운송 사숙님!”

“운송 사숙조님!”

직계 제자인 좌인득이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지옥마정입니다, 사부.”

“뭐?”

“지옥마정이 금기를 깨고 침입해 오고 있습니다. 속히 무림맹에 알리고 우리 곤륜도 대처를… 아!”

좌인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운송자가 내쏜 지풍이 좌인득의 마혈을 짚었기 때문이다.

“사숙?”

“사숙조! 지금 왜…?”

2대 제자와 3대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곤륜을 배신한 겁니까?”

“무림마정의 바닥에는 본래 아흔아홉 명의 동료가 있었다.”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눈 곤륜파 무사들을 둘러보며, 운송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에는 겨우 두 명이 남았지. 나와 그 녀석!”

곤륜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운진자를 비롯해 도명을 받은 내전의 제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운송 사제. 어떻게 된 일인가? 무량수불. 해명하지 못한다면 단죄할 수밖에 없네.”

고함을 지르는 운진자를 향해, 운송자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단죄라? 하하. 할 수 있다면, 그리 해 보시구려.”

“무어라?”

“하하하. 화내지 마시오.”

운송자는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다가오는 마기의 구름!

“이미 지옥의 문이 열렸소. 누구도 되돌릴 방법이 없소. 천라대제가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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