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29화 (29/168)

029화. 한 번 더 선택을 하라

마혈이 풀린 소빙유는 곧장 설청산의 옆으로 갔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은교교는 소빙유를 막지 못했다.

“동심결의 6위. 언제나, 어떤 경우라도 나를 택했던 화왕.”

설청산이 원로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며 말했다.

“누워서 모두 들었다. 동심결에 충성을 맹세하고도, 금제를 없애준다니 단숨에 돌아서던 너희들! 오직 이 여자만 달랐다.”

소빙유의 입가에 미소와 한숨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설청산의 오른손이 사도명을 향해 들렸다.

천중무극의 내공이 그의 손바닥에 알알이 모여 들었다.

“너희에게 다시 선택의 기회를 주마. 그 전에….”

응축된 내공으로 설청산의 오른손 장심이 은은하게 빛났다.

사도명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설청산의 오른손을 지켜보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우선 보여주도록 하마!”

쿠와-앙!

장심으로 모여든 설청산의 내공이 마침내 터졌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힘이 사도명을 향해 날아갔다.

사도명의 옆을 스친 힘은 총의전 천장에 구멍을 냈다.

쿠르르-!

한쪽 벽에 강력한 힘에 반발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삼수서생 종심기는 무너지는 벽의 너머에 서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총의전의 내부 상황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아!”

오른손을 앞으로 곧장 내밀고 있는 한 사람!

종심기는 자신이 직접 보는 그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청산!

“맹주님. 무사하셨습니까? 중독에서 풀려나신 것입니까?”

달은 중천에 떴다.

그 빛이 교교했다.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갑자기 총의전 천장이 날아가며 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안에서 설청산을 발견한 종심기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그러다가 멈추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종심기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흔들고 있는 법허를 보았다.

바닥에 흩어진 시체.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는 화운악.

종심기는 매희구를 부축하고 나왔던 석금보를 만났었다.

그를 통해서 화운악이 동심결주에게 넘어간, 무림맹의 배신자임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장내의 상황은 그 이상으로 복잡해 보였다.

“도,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설청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 한 번 더 선택을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서, 선택요?”

“기찰령주. 너도 선택하라.”

“어떤 선택 말입니까?”

설청산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두 번 다시 배신하지 않을 충성을 이곳에 맹세하는 자는 화왕의 뒤에 선다.”

“!”

설청산의 말은 많은 원로들에게 땅이 갈라지는 충격이었다.

총의전 바깥을 포위하고 있던 기찰대와 모든 호위 무사들은 할 말을 잃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종심기는 도저히 자신이 들은 내용을 믿지 못하여 소리쳤다.

“맹주니-임!”

설청산의 말은 차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림맹을 택하겠다는 자들은 그냥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있어도 좋아.”

“맹주! 당신,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나누고 있다. 내 손으로 죽일 자와, 살려야 할 자를!”

종심기는 눈치가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법허가 직접 기찰령주로 추천할 정도로 총명했다.

대화 속에서, 종심기는 상황의 대부분을 알아차렸다.

다만 믿기 어려워 여러 번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종심기는 사도명이 들고 있는 청옥소검을 본 다음, 시선을 돌려 법허를 보았다.

“…비상의 상황입니까?”

“부맹주의 권한으로, 1급 경계령을 특급으로 바꾼다. 무림맹 전체에 초특급 비상 태세 선포! 아미타불. 일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종심기가 목소리를 돋아 주변을 향해 외쳤다.

“맹주가 맹주가 아니다-!”

경비대는 모두 그의 말이 뜻하는 바에 경악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몇몇의 사람들은 모르는 조직.

그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임무를 빠르게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그림자 조직.

평소에는 숨어서 지낸다.

맹에 위기가 닥쳐도, 특급으로 분류되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움직여서는 안 된다.

달빛 아래에서 목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맹주는 맹주가 아니다.”

“특급의 비상령이 발동되었다. 어둠의 그림자와 장막의 수호자들이 움직여야 한다. 무림맹은 즉시 특급의 비상사태로 들어간다.”

종심기의 외침에, 설청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법허를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나조차 몰랐던 것이 있소? 맹의 내부에 맹주조차 모르는 비밀 체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오?”

법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맹주의 자리를 줄곧 소림만이 맡는 이유외다.”

“또한 기찰령주의 자리를 반드시 부맹주가 추천하는 이유고?”

“아미타불. 2대 맹주께서 만드신 체계라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벌어졌을 때의 대비.”

“파천도제 호불군. 하하하. 실로 뛰어나셨군. 무림맹의 역대 맹주들 중 유일하게 고금구천강에 든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설청산의 얼굴이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또렷하던 그의 눈코입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래도 여기에 나보다 강한 자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눈코입이 사라진 설청산의 얼굴에 원이 나타났다.

“누구든 원하면 죽일 수 있고, 원한다면 살려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모두 다시 한번 선택을 해. 화왕의 뒤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냐?”

원은 하나가 둘로 변하고, 둘이 셋으로 늘더니, 다섯으로 변했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갔다.

원로들은 서로를 보았다.

이것으로 설청산이 한 명이면서 동시에 다섯 명인 동심결주가 되었던 방법이 명확해졌다.

다섯 가지의 표식과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무공.

무림맹주였으나, 본래는 오대 마문의 후계자인 설청산!

대부분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움직였다.

그리고 결국은 소빙유의 뒤로 가서 섰다.

구양걸이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또다시 배신인 거냐? 장무정 전주의 죽음이 너희에겐 도대체 무슨 의미였더냐?”

“나, 나는 죽기 싫소.”

화왕의 뒤에 선 사람들은 항변했다.

“강호에 들었으니 보다 강한 쪽에 붙는 일이 무슨 잘못이오?”

스무 명 가량의 사람이 화왕 소 빙유의 뒤에 섰을 때, 설청산은 철대평을 보았다.

“오지 않을 텐가?”

철대평은 이제는 운기조식을 거의 마쳐가는 탁호천을 보았다.

“친구의 운기조식을 도우면서 비로소 느꼈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의기. 우정. 욕심의 대가로 친우까지 잃을 바엔, 나 자신의 목숨만 버리는 편이 낫다는 걸 이제야 겨우 느끼니 부끄럽구려.”

“하하하. 세상은 넓구나.”

설청산이 껄껄 웃었다.

“사람은 많고 저마다 다르다.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도 굳이 선택하다니! 하하하. 이래서 살아가는 일이 즐겁다는 것인가?”

설청산이 화운악을 보았다.

“너는 어떠냐? 어느 줄에 서고 싶으냐?”

화운악은 허리를 폈다.

지금까지 흘렸던 눈물을 모두 닦은 뒤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사도명의 앞에 섰다.

뒤가 아니라 앞으로 선 화운악의 행동아, 모두가 놀랐다.

소빙유는 미간을 찡그렸다.

“너는 줄곧 배신만을 해 왔는데, 왜 지금은 그곳에 선단 말이냐? 굳이 죽고 싶은 거냐?”

화운악이 고개를 저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소.”

“그런데도 거기 선다고?”

“애초 강해지고 싶어 했던 것에는 목적이 있었소.”

화운악이 한숨을 쉬었다.

“고향 사람들을 돕고 싶었지. 본래의 목적을 겨우 기억해 냈는데, 또다시 잘못된 선택으로 그 목적을 잊는다면….”

화운악은 사도명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소. 내가 후회할 일을 저지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시겠소?”

사도명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든지.”

화운악은 활짝 웃었다.

“고맙소.”

대부분의 사람이 선택을 했다.

화왕 소빙유는 자신의 뒤로 온 사람이 서른 두 명임을 확인했다.

설청산이 웃었다.

“생각보다 너무 적군.”

“생각보다 충분히 많지.”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줄곧 고민했다. 나는 미리 이걸 보여줘야만 했을까? 이걸 보여주었더라면 선택이 달랐을까?”

사도명은 오른손을 들었다.

무영섬을 전개할 때는 황금의 빛이 그의 온몸을 덮었다가, 오른손에 모여서 발사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예비 동작 없이 금빛의 덩어리가 발생하더니, 곧장 뻗어나갔다.

“파천삼로 중의 두 번째 길, 무너지고 소멸하라. 천극멸!”

설청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도명이 내뿜은 황금빛의 찬란한 강기는, 미리 약속했던 것처럼 설청산을 해치지 않고 그의 왼쪽 공간을 스치고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설청산이 서 있는 뒤쪽의 천장과 벽을 무너뜨렸다.

모든 것이 똑같았다.

자신의 힘을 보여주려 총의전의 한쪽 벽을 무너뜨린 설청산!

지금의 사도명은 그와 완전하게 똑같은 행동으로 총의전 다른 쪽 벽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힘도 못지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걸 미리 보여주었더라면, 당신들의 선택은 달랐을까?”

사도명은 소빙유의 뒤에 선 서른 두 명의 원로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달라졌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기회가 오기만 하면 당신들은 또다시 변할 터인데.”

사도명은 배신자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비난할 대상은 잊고, 존경할 사람을 찾는 일이 훨씬 기쁘니까.

모든 선택은 끝이 났고, 이제 남은 사람은 한 명이었다.

사도명은 시선을 돌려 은교교를 보았다.

설청산도 은교교를 보았다.

은교교는 빈 의자의 뒤에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빙유가 외쳤다.

“너는 왜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느냐?”

은교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빙유가 다시 한번 외쳤다.

“이 사부는 이미 나 자신의 선택을 끝냈다. 그리고 나의 위치에 섰다. 너 또한 선택을 마치고 너의 위치에 서야할 것 아니냐?”

은교교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사도명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달빛 교교한 그 날 밤.

은교교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해 천라옥벽을 찾았다.

힘겹게 천라옥벽을 무림맹으로 가져왔으나, 흉수는 그녀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앞에 놓인 두 갈래의 길.

사도명은 비슷한 길을 겪었다.

두 갈래의 길과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모순!

부모를 해친 원수가 자신을 키워준 사부였던 것이다.

[결정하지 마시오.]

사도명은 전음으로 말하며, 설청산 앞으로 걸어갔다.

[운명에 맡기시오. 그 운명은, 내가 결정지어 줄 테니.]

화운악이 쓰러졌다.

사도명이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혈도를 짚었기 때문이었다.

쓰러지는 화운악을, 사도명의 또 다른 전음을 받고 달려온 구양걸이 부축했다.

[오른팔 치료가 급합니다. 진심으로 뉘우쳤으니, 구해주죠.]

구양걸은 화운악을 안은 채 사도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심기가 이끄는 포위망 사이로 사라졌다.

사도명이 설청산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화운악마저 진심으로 뉘우치자,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소.”

설청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

“나는 화왕의 뒤에 서지 않은 분들에게 흑귀의 금제를 해제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점을 다시 알려주고 있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금제의 시전자를 죽여야 한다.

설청산이 냉소했다.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싸울 수 없다 생각하시오?”

“나는 무황 설청산이다. 파천도제 호불군에 비견된다는, 원로원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나는 6년 전에 천하비무에서 우승을 하였소. 역사상 최연소!”

“그랬었지!”

“무림을 떠나 6년을 떠돌며 내가 알던 것을 정리했지. 그중의 한 가지를 조금 전 보여주었소.”

“그러니 자신이 있다?”

“굳이 해칠 필요 없이, 귀하가 마음만 돌린다면 흑귀의 금제는 풀리지 않겠소?”

“하하하. 지금 날더러 나를 키워준 오대 마문을 배신하라고 말하고 있느냐?”

“배신이 아니라 선택이오! 남이 던져준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따르라는 것.”

사도명은 하늘 중간까지 올라온 보름달을 보았다.

그리고 은교교를 보았다.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용기가 귀하에겐 없단 말이오?”

콰아아아-아!

설청산의 몸을 감싸고 한 줄기 회오리가 피어올랐다.

주변의 사람들은 공기를 타고 전해오는 기운에 온몸이 저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한두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오직 사도명과 은교교만 움직이지 않았다.

설청산이 외쳤다.

“은교교. 내 옆으로 오너라.”

“아!”

은교교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발이 앞으로 움직임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이, 이건 무슨 사술이에요?”

“오라고 말했다.”

“아, 이런!”

은교교는 그제야 설청산의 외침이 사술이 아니라 그저 압도적인 위압감임을 깨달았다.

말 속에 숨겨진 의지.

그 의지가 은교교의 무의식을, 압박하는 것이다.

“시, 싫어. 나는….”

발이 또다시 저절로 움직이려고 할 때, 팽팽한 긴장을 풀어주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 필요 없소.”

사도명이었다.

“이미 말했소. 운명에 맡기라고.”

사도명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내가 결정지어 줄 것이라고.”

미뤄오고 있던 마지막 싸움.

사도명은 마침내 설청산과 일전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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