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28화 (28/168)

028화. 설청산

설청산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중독이 된 상태로 정신을 잃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때의 무력함은 이제 그의 몸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의 몸을 떠받치는 무공은 무림맹의 맹주에게만 전해지는 천중무원의 공력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공이기에 신공이라 불리고, 마음의 무공이기에 심공이라고도 불린다.

천중무원신공의 창안자는 1대의 무림맹주인 천무제 좌능후!

좌능후가 제안한 개념을 2대 맹주인 파천도제 호불군이 완벽한 심법으로 완성시켰다.

그 후, 천중무원신공의 핵심 구결은 자령비고에 보관되어 왔다.

천중무원의 구결은 무림태자라 해도 보지 못한다.

맹주가 된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구결을 볼 수 있다.

천중무원신공은 음과 양, 유와 강을 포괄하도록 만들어졌다.

때문에 무림맹주에 오른 사람은 기존의 무공을 버리지 않고도, 새로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

설청산은 제5대의 무림맹주!

그는 천중무원신공을 불과 1년 만에 12성 대성했다.

원로회는 최고의 자질이라며 그를 극찬했고 무황이라는 별호를 그에게 선물해 주었다.

무황은 무림의 십자(十字) 영웅들 중에서도 으뜸인 일황(一皇)을 일컫는 이름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설청산을 보는 법허의 이마에, 식은땀이 멈출 줄을 몰랐다.

“아, 아미타불. 무림의 황제가 저, 정말로 적의 간세라니!”

법허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은 눈앞에서 엄연했다.

구양걸이 외쳤다.

“대체 무엇이 맹주를 그렇게 만든 거요? 낙수의 맹세를 어이하여 배신했단 말이오?”

“왜 배신했다고 생각합니까? 설청산의 행동은 애초부터 올곧은 충성일지도 모릅니다.”

사도명의 온몸이 황금빛으로 휩싸였다.

빛은 오른손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빛을 앞으로 쏘아내며, 사도명이 외쳤다.

“처음부터 오대 마문에 의해 길러진 사람이었다면요-!”

파천삼로 중의 첫 번째이며, 가장 빠른 길, 무영섬!

빠름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다.

사도명은 화운악을 단 일초에 물리쳤던 무영섬을 다짜고짜 설청산을 향해 날린 것이다.

“그, 그러지 말….”

은교교는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다가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사도명이 설청산을 해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 사도명을 만류하는 일 또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사도명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동심결주를 공격하는 것이다.

소빙유가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저 정도의 힘에 당할 사람이 결코 아니야.”

폭음은 없었다.

사도명의 무영섬은 설청산의 가슴에 정확하게 명중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운악과 싸울 때, 무영섬은 단 일초에 그의 어깨에 구멍을 냈다.

하지만 설청산은 가슴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사도명은 자신이 내쏜 힘이, 마른 모래에 스며든 빗물처럼 사라짐을 느끼고 신음했다.

“흡정북명. 모든 내공을 흡수하는 지옥마정의 수법.”

북명(北溟)은 아득히 넓고 깊은 북쪽의 바다를 뜻한다.

들어오는 모든 것을 삼킨다는 전설의 바다처럼, 흡정북명은 상대의 공력을 삼킬 수 있다.

흡정북명은 오대 마문 중 하나인 지옥마정(地獄魔井)이 자랑하는 세 가지 대법 중의 하나였다.

설청산이 오른손을 폈다.

일단 흡수한 사도명의 공력을 그 손바닥 위로 올려서, 허공에 넘실대도록 만들었다.

“고금구천강의 무공을 꽤나 오래 연구했지.”

설청산은 사도명의 내공을 이리저리 살피며 웃었다.

“이건 무척 강한데도, 그중의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구나. 어떤 이름이냐?”

“파천삼로 중의 무영섬.”

“무영? 좋은 이름이다. 나를 향해 날아올 때, 기척만을 느꼈을 뿐 보이지는 않았어. 직접 창안한 것이냐?”

“이것저것 모은 다음에 오래 고민을 했지. 만약 굳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방어하여 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을까?”

사도명이 설청산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자신의 내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고민의 해답으로 무엇이든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파천의 세 가지 길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말투가… 고약하구나. 네가 무림태자가 되면, 너는 율법상 나의 제자가 됨을 모르느냐?”

사도명은 한 차례 쓰게 웃은 후, 법허를 보았다.

“관련된 율법이 존재합니까?”

법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 해악을 끼쳤으나, 고의가 아니었던 자는 징계하되 사정을 감안한다. 허나 알면서도 해악을 끼친 자는 엄벌한다.”

“어떻게 엄벌합니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자격을 박탈하며, 무림맹의 모든 힘을 모아 체포, 문죄한다.”

법허가 설청산을 보며 외쳤다.

“설청산! 율법상 제자 운운한 것의 답은 이것으로 된 것 같지?. 맹의 배신자는 아무런 명예도 갖지 못하는 것이 율법.”

설청산은 고개를 저었다.

“법허 부맹주. 배신이라니? 나는 살아오며 단 한 번의 배신도 한 적이 없소. 믿어주겠소?”

법허가 미간을 찡그렸다.

설청산이 사도명을 보았다.

“너의 판단이 옳다. 나는 처음부터 오대 마문에서 키워졌어. 그리고 평생을 올곧게 내 충성을 오대 마문에 바쳐왔다.”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원로들 중에는 절망감에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구양걸의 무거운 탄식이었다.

“아아. 낙수의 맹세가, 무림맹의 백 년 위업이 여기에서 끝이 나는가?”

“끝이 날지 아닐지가 궁금하다면, 어디 한 번….”

설청산이 오른손을 저었다.

“증명해 줄까?”

사도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피하세요!”

법허와 구양걸은 온 몸을 압박해오는 기운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양손을 들었다.

콰콰콰콰-콰콰쾅!

단 일초의 충돌.

그럼에도 무수한 폭약이 터지듯 끊임없이 폭발음이 이어졌다.

무영섬은 일초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초식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구양걸과 법허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열 걸음 넘게 물러난 후에야, 겨우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런 후, 법허는 결국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피가래를 토했다.

“우엑!”

절대독고의 중독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내공의 상태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구양걸은 설청산과 사도명을 번갈아 보면서 몸을 떨었다.

“이, 일초가 이 정도의….”

설청산은 사도명의 무영섬을 흡수했다가 되돌려 줬을 뿐이다.

법허와 구양걸은 힘을 합하고도 단 일초를 당해내지 못했다.

“이제 증명이 됐을까?”

설청산은 빙그레 웃으며 원로들을 보았다.

“낙수의 맹세건 백 년 무림맹의 위업이건 힘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사도명은 마지막으로 시선을 설청산에게 고정시켰다.

“무림맹의 붕괴는, 설령 천라대제가 되살아와도 돌이킬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나?”

사도명은 석벽에서 손잡이가 묻힐 정도로 깊이 박힌 청옥소검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 나는 천라대제가 아니거든.”

“그 말은….?”

사도명은 몇 번의 노력 끝에 청옥소검을 돌로부터 빼냈다.

설청산이 내공을 풀고 허공에 띄웠던 몸을 바닥으로 내렸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무림맹은 모르겠지만, 동심결의 붕괴는 오늘 내가 반드시 이뤄야만 하는 사정이 좀 있어서.”

“검의 힘을 빌면 나를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멸망 후, 아수라혈교는 꾸준히 부활의 노력을 벌였지.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전엔 수라겁황의 부활이 거의 이루어질 뻔 했었다.”

설청산의 눈이 빛났다.

“그 일까지 아느냐?”

사도명은 시선을 설청산에게서 원로들 쪽으로 옮겼다.

“아까 말씀드렸던 검성께서 세우신 마을! 그 마을 주민들은 크게 놀라 즉시 최고의 전사를 뽑아 무림으로 내보냅니다, 원로분들.”

사도명은 그 전사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삼백 년 전이라는 시기만 듣고도, 전사가 누군지를 짐작해냈다.

“그 사람이 혹시…?”

“네! 천라대제입니다.”

천라성을 세웠던, 당대의 천하제일인이며, 고금구천강 중의 한 명인 대영웅.

“아아. 천라대제가 검성의 우예였다니. 성검문은 무림을 위해 실로 많은 노력을 하였구나.”

법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명이 말을 이었다.

“천라대제는 천라성을 세우고, 오대 마교가 부활시키려 했던 수라겁황을 제거합니다.”

설청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까지 아는 게냐?”

“그로써 아수라혈교의 재건이 한 차례 저지되었던 것까지 안다. 무림은 숨은 영웅에 의해 지켜지고, 필요한 시대에는 필요한 영웅이 출현하는 것도 알고.”

“겁황의 부활이 비록 저지되었으나, 우리의 계획이 모두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알아. 오대 마문이 꾸민 또 다른 계획. 내부로부터의 붕괴.”

사도명의 말을 듣는 모두의 시선이, 설청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중원 무림의 내부로 들어가, 중원 무림의 힘으로 중원 무림을 붕괴시키려는 계획!”

설청산이 한숨을 쉬었다.

“넌 너무나 많이 아는구나.”

“천기를 짚어 본 천라대제는 검성과 똑같은 절망을 느끼지.”

사도명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원로들의 귀에는 천둥이었다.

“멸망의 씨앗은 결국 미래에 싹트고 말 것이라는 신탁. 그 시기는 ….”

사도명이 설청산을 보았다.

“검성이 보셨던 것과 똑같은 시기, 바로 지금.”

자신의 심장 박동마저 또렷이 들릴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새로운 수라겁황!

다섯으로 흩어진 오대 마문을 하나로 모아, 또 다른 아수라혈교를 완성할 사람.

누가 있겠는가?

법허가 깊이 신음하며 설청산에게 물었다.

“말하시오, 맹주. 아니, 말하라. 설청산. 다섯의 동심결주 중, 그대가 하나라면 나머지 넷은 대체 누구인가?”

“하하하.”

설청산이 갑자기 웃었다. 웃으며 사도명에게 물었다.

“너는 나머지 네 명이 누군지도 알고 있느냐?”

사도명은 고개를 저었다.

“네 명은 없어. 다섯이 아니라 본래 한 명이니까.”

“아미타불. 무슨 뜻인가?”

“아수라혈교를 탄생시키려는 오대 마문이 자신들의 무공을 굳이 다섯 명에게 나누어 전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맹주님.”

“하하하하하.”

설청산이 크게 웃었다.

“실로 통쾌하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아는 이를 만났어.”

두 사람의 대화가 내포한 뜻은 실로 놀라워, 지금까지 눈만 부릅뜨고 있던 화운악이 소리쳤다.

“그, 그렇지만 내가 만난 사부는 분명히 다섯….”

“네놈의 사부는 오직 나인데, 어찌 다른 사부가 있단 말이냐?”

설청산이 고함을 질렀다.

화운악은 반박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사, 사부! 저는….”

“너는 이미 태자가 아닌데 어찌 감히 나를 사부라 부를 수 있단 말이냐?”

“하, 하지만 사부도 또한 동심결주이니 저는… 헉!”

설청산이 갑자기 화운악을 향해 일장을 날렷다.

그의 오른손에 떠올랐던 천중무극의 우윳빛 서광이 화운악의 온몸을 순식간에 압박했다.

놀란 화운악이 왼손을 들어 설청산의 일장을 막았다.

혈운곡의 파멸혈강!

“왜 이러십니까, 사부?”

단숨에 일합이 부딪치며, 화운악은 정신없이 물러났다.

콰-앙!

물러나서 겨우 정지한 후, 그는 시꺼먼 피를 바닥에 토했다.

“크웨엑!”

설청산은 허리를 굽힌 화운악의 앞에 꼿꼿한 자세로 선 채, 다시 한번 소리쳤다.

“천중무극의 공격을 일초도 받아내지 못하는 놈에게 동심결주 제자의 자격이 있다고?”

“하, 하지만 저는 줄곧 사, 사부님만을….”

“사부가 중독된 틈을 노려, 적과 결탁하는 자를 제자로 두면 영원히 뒤통수가 두려울 것이다!”

설청산의 말에 화운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강해지고 싶어 했다.

강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선택했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 나는….”

화운악은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미간을 찡그렸다.

“본래 너의 사부였던 매희구 장문인은 이미 두 눈을 잃었다.”

화운악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울고 싶었지만, 이제는 울 기력조차 없었다.

힘을 가져 세상의 모든 것을 하고자 살았지만, 화운악에게 남은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왼손을 들었다.

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려고 힘껏 내려쳤다.

한 줄기 지풍이 날아들어, 그런 화운악의 왼손을 막았다.

“왜? 도대체 왜?”

화운악은 자신의 자결을 막은 사도명을 보며 소리쳤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매희구 장문인의 눈 때문이라고 하자.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산골 마을에 아직 살아 계시다는 너희 부모님 때문이라고 하든지.”

화운악은 눈을 부릅떴다.

참으려 노력했지만, 끝내 참아지지 않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봇물인 양 멈추어주지 않았다.

“으헝! 으허어어엉!”

그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설청산이 오른손을 들어 한 줄기 지풍을 날렸다.

날아간 지풍이 중간에서 갈라지더니, 은교교가 잡고 있는 의자 위 소빙유의 온몸을 눌렀다.

짚혔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소빙유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설청산의 옆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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