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26화 (26/168)

026화. 속죄의 방법

화운악은 대꾸하지 않았다.

멍한 눈빛으로 사도명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어깨가 뚫린 고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이길 수 있는데… 나는 이겨야 마땅한데! 도대체 왜?”

“휴우.”

사도명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화운악의 혈도를 짚었다.

그대로 두면 과다한 출혈로 그의 숨이 끓어질 터였다.

화운악은 자신의 피를 멈추어준 사도명을 보며, 다시 물었다.

“대답해 줘. 그때도! 지금도! 나는 여전히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네가 이겼지? 왜 내가 졌느냐?”

“질문이 틀렸으니 대답 또한 어렵다. 질문을 바꿔 봐라.”

“무슨 말이야?”

“왜 졌는지 묻기 전에 왜 이기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너는 왜 이기고자 하나?”

화운악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기려 들까?

이기는 것이 좋으니까!

무엇이 좋지?

도대체 왜,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이기고 싶어 하나?

“승자에게서는 빛이 났다. 승자는, 패자보다 강하니까.”

“강해지고 싶은 이유는?”

“…강하다는 건, 힘이 있다는 것. 힘이 있으면, 많은 것을 할 수가 있다.”

화운악이 과거를 떠올리면서 눈을 감았다.

“산골에서 태어났다. 자랐던 곳은 척박한 마을이었다.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경우가 더 많았어.”

화운악은 기억력이 좋았다.

어릴 때 본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거칠고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자신은 운이 좋아, 여섯 살 때 화산파에 들어왔다.

“강자는, 약자들이 굶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동료를 배신하는 강자가 남은 돕는단 말인가?”

사도명의 말에, 화운악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건….”

“약자를 돕기 위해 이기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바뀐 거지? 너는 지금까지 이기기 위해 약자를 해쳐 왔잖아.”

화운악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사도명을 보았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과 끝이 뒤바뀐 것일까?

목적을 위해 수단을 찾았었는데, 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단을 위해 목적을 버렸을까?

화운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왜 이기고 싶었는지를 잊고, 그저 이기기 위해 목적마저 버렸구나, 나는.”

그는 구멍이 뚫려 있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보았다.

“사망각이 지닌 구천소혼의 심법은 모든 고통을 없애준다. 고통스럽지 않게 싸울 수 있도록.”

화운악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처음의 애절함 또한 잊는다. 나는 고통을 잊으며, 아아, 처음의 마음조차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어.”

사도명이 다시 물었다.

“이제야 왜 내가 이기고, 네가 졌는지를 알았나?”

화운악은 결국 고개를 숙이면서 인정했다.

“그래. 나는, 처음부터 너를 영원히 이길 수가 없었구나.”

한 사람은 이기고 싶은 이유를 잊고서 이기려 한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은 이기고 싶은 이유를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예상 못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영원한 건 없다. 승리도, 배신도 모두 마찬가지. 한 번 배신했다고 영원히 배신자일 필요는 없다.”

사도명이 원로들을 둘러보면서 외쳤다.

“당신들은 동심결에 속았소.”

사도명은 청옥소검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청옥소검의 계승자로서, 말합니다. 고백하세요.”

원로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사도명의 말이 이어졌다.

“약속합니다. 모두가 고백해 준다면, 저는 흑귀의 금제가 발동하기 전에 시전자를 죽여, 당신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 그 약속을 어찌 믿소?”

원로들 속의 누군가가 외쳤다.

사도명은 더 크게 소리쳤다.

“철대평은 무엇을 믿기에, 저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철대평을 보았다.

철대평은 이미 자신이 무림맹을 배신했음을 고백했다.

생존을 위한 약속의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건만, 그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탁호천의 운기조식을 옆에서 돕고 있었다.

“믿음도, 결심도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선택하세요.”

사도명의 말은, 모두에게 잊었던 단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의기!

무림맹의 사람들은, 오직 그 하나의 단어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평생을 무림 수호에 바쳐왔다.

“…나는 …배신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이 뒤를 따랐다.

“나도 배신했소.”

“낙수의 맹세를 저버렸소. 처음에는 속았소. 금제에 당하고 난 후에 진실을 알았으나, 죽음이 두려워 빠져나올 수 없었소.”

한 명 두 명 나서자, 원로들은 모두 놀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신을 고백하며 나섰다.

그리고 그중에는 도저히 배신을 했을 것이라 믿을 수조차 없는 인격자도 있었다.

특히 냉심무적 장무정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법허마저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 자네마저?”

냉심무적 장무정은 무당파의 속가 장문인이었다.

무림맹의 서열 3위로, 과거 적마교의 혈겁이 있었을 때 법허와 함께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태극칠해의 마지막 구결이 끝내 풀리지 않았네. 한 사람이 내게 그 고비를 넘기게 해주겠노라 제안했고, 나는 고비를 넘기면 상대의 뜻에 따르겠다 했었지.”

냉심무적의 목소리는 별호만큼이나 차가왔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약한 부분이 존재한다.

약한 부분은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과 통한다.

무공에 모든 것을 걸었던 무당파의 냉심무적은, 자신의 무공 마지막 난제를 풀기 위해서 무림맹을 배신하게 된 것이다.

장무정이 사도명을 바라보았다.

“검몽. 너와 화운악의 대화를 듣고 느낀 바가 많다.”

“그렇습니까?”

“나는 과거 적마교와의 싸움에서 많은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아팠습니까?”

“원망스러웠다, 나 자신이. 내가 더 강했더라면 동료를 눈물로 보내는 비극은 없었을 텐데.”

“더욱 더 강해지고 싶으셨군요? 무림맹을 지키기 위해.”

“그랬었다.”

장무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강해지려고 무림맹을 버리고 말았구나.”

장무정이 땅을 박차고 후르르 날아갔다.

무당 특유의 제운종 신법으로 허공을 밟고 날아가더니, 법허의 바로 옆에 내려섰다.

그리고 오른손을 아래로 뻗어 법허의 머리를 노렸다.

“뭐하는 거요, 냉심무적?”

구양걸이 달려가려 했으나, 어느새 사도명이 그의 앞을 막았다.

“걱정마세요. 절대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장무정은 오른손을 활짝 펼쳐서 법허의 정수리에 올렸다.

하얀 서광이 장무정의 온몸에서 일어났다.

그 서광은 이내 법허의 몸도 함께 덮었다.

“지, 지금 뭘 하는 겐가?”

장무정의 의도를 깨달은 법허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중독으로 내공을 쓸 수 없는 그에게는, 장무정을 밀어낼 방법이 없었다.

“적마교와의 싸움 이후,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친우로 지내왔었지, 법허?”

장무정의 내공이 법허의 몸 구석구석에 침투했다.

그리고 미세한 경맥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 이러지 말게, 무정.”

무림맹의 서열 2위와 3위가 아니라 친우로서, 법허는 장무정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장무정은 자신이 시작한 일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세월이 참으로 빨라. 벌써 구십 년이 훌쩍 넘었군.”

장무정이 빙그레 웃었다.

그에 비해 법허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표정이었다.

“제, 제발.”

그제야 모든 사람들은 장무정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장무정은 법허가 화운악에게 했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내공을 미끼로 삼아 절대독고를 자신의 몸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동심결주의 도움으로 태극칠해의 마지막 고비를 풀어낸 나는, 무당 역사상 세 번째로 태극양의심공을 완성할 수 있었네.”

마음을 둘로 나누는 수법.

무당이 창안한 최고의 심법이며, 천하 삼대 심법의 하나!

“하하하. 이렇게 절대독고를 끌어들이면서도 말할 수 있는 것도 태극양의심공이 가지고 있는 분심(分心)의 묘용 때문이라네.”

장무정의 얼굴이 빠르게 핏기를 잃어갔다.

그에 반비례하면서, 법허의 얼굴은 점차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절대독고는 내공이 흐르는 경맥 자체에 똬리를 틀고 산다.

내공 고수들의 내공을 먹이 삼아, 중독된 자에게 극도의 고통을 선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제발! 제발 멈추게, 무정.”

법허는 이미 절대독고의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경험했다.

숫제 감아버린 그의 눈에서,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장무정은 고통스런 와중에도 오히려 웃었다.

“하하하. 화산의 매희구는 제자의 배신을 스스로의 눈으로 사죄했어. 무당의 장무정이, 자신의 배신에 책임지지 않는다면….”

장무정은 입에서 피를 뿜었다.

마지막 한 마리의 절대독고까지 모조리 흡수한 장무정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 세상 사람들이 무당의 잘못을 어찌 용서할… 끄으!”

“무정!”

법허가 장무정을 부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날려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어느새 달려온 은교교가 그의 앞을 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맹주님! 안 됩니다.”

“비키게, 은령선자. 나를 위해 희생한 친우네. 내가 돕지도 못한단 말인가?”

법허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손상당한 경맥이 아직은 완전하지 않아, 끌어올릴 수 있는 내공이 별로 없었다.

은교교는 비켜서지 않았다.

“냉심무적님은 스스로의 잘못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죄하신 겁니다. 도우려 들면, 오히려 그 뜻을 훼손하시게 될 겁니다.”

장무정이 껄껄 웃었다.

“허허허. 은령선자가 나의 진의를 알아주니 정말 고맙구먼.”

장무정은 고통을 겨우 참아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어느새 화운악의 옆으로 가서 서 있었다.

“태자에게 부탁이 있네.”

태자라는 말에 반응하여 화운악의 몸이 움찔 움직였으나, 그는 결국 옆자리의 사도명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도명이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의 말이 옳네. 속임수에 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배신하고, 금제의 공포에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게. 땅은 비가 내린 뒤 오히려 굳어지는 법. 실수하였다고 쳐내면, 맹의 절반이 무너질 것이니.”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장무정이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운이 좋다. 떠났던 검몽이 때맞추어 돌아와 주지 않았더라면 무림맹은 어찌 됐을꼬?”

장무정의 말은 화운악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배신의 대가로 태극칠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장무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계를 넘어가서, 궁극을 마주보았지. 그 순간의 희열이란! 아아, 나는 배신을 후회한다. 하지만 또한 후회하지 않는다.”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장무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무공에 생을 바쳐, 한 갈래 길의 끝을 구하고 있는 무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화운악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의 후회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낮은 목소리라서, 사도명의 귀에만 겨우 들릴 중얼거림이었다.

장무정이 다시 말했다.

“궁극을 보고 깨달은 태극칠해의 마지막과 태극양의심공의 오의를 내가 지냈던 숭무전 기둥에 남겨 놓았으니… 친우여!”

그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의 법허를 보며 웃었다.

“그것을 무당의 제자들에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왜 그리 말하나, 무정? 본인이 직접 전하게, 직접!”

“아아! 너무나 고통스럽군. 자네는 대체 이 모진 고통을 어떻게 그리 오래 참아왔는가?”

법허가 눈을 부릅떴다.

장무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린 법허는 다시 한번 달려가려다가 은교교에게 또 막혔다.

장무정이 다시 웃었다.

“돌아보니 인생은 짧구먼.”

그는 원로들을 둘러보더니 화운악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화운악아. 동심결주의 제자여.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이니, 똑똑하게 듣거라.”

그는 한 자 한 자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라겁황은 악의 근원이다.”

“아!”

“오대 마문은 낙수의 맹세를 이은 자들이 반드시 없애야 할 궁극의… 끄으, 저, 적이다.”

장무정의 얼굴 한 가운에 검은 점이 나타났다.

법허가 부르짖었다.

“멈추게, 무정! 무림태자가 금제를 깨뜨릴 테니, 그 후에….”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바와 같다. 욕심을 쫓다보면, 오직 사망밖에는 손에 쥘 것이 없다. 수라겁황은, 그리고 오대 마문은, 진심으로 말하노니 모든 악의 근원이다.”

검은 점이 선으로 변해, 장무정의 온몸으로 퍼졌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웃으면서, 장무정은 마지막으로 법허를 보았다.

“육신의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마음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로구먼. 지금은, 편하네.”

“…아아, 무정!”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긴 세월. 그러나 따뜻하였다 싶군. 그 긴 세월을 같이 있어 주어서, 참으로… 참으로….”

퍼어-!

장무정의 얼굴이 마침내 산산조각 터졌다.

얼굴을 잃은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질 때, 마지막으로 남긴 장무정의 목소리는 허공을 메아리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참으로 고마웠네.”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허가 몸을 떨며 손을 모았다.

불문에 들어 감정의 흔들림을 초월한 법허이지만, 친우의 죽음 앞에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극락왕생을. 아아, 극락왕생을, 부디!”

화운악은 장무정의 마지막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철대평 또한 보았고, 배신한 원로들과 배신하지 않은 원로들이 모두 다 함께 보았다.

철대평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돌연 입을 열었다.

“수, 수라겁황은….”

“명령합니다. 멈추세요.”

사도명이 청옥소검을 높이 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제가 동심결주를 붙잡아 흑귀의 금제를 풀고 나면, 그때부터 말을 해주세요.”

화운악이 사도명을 보았다.

“나는 다섯 사부로부터 무공을 배웠지만, 사부의 숨겨진 신분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네가 사부가 누군지를 안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말했듯이 동심결주가 누구인지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사도명이 원로들을 한 명 한 명씩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동심결주를 나서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흑귀의 금제도 풀죠. 부맹주님! 그리고 원로회주님! 지금부터 제가 할 일에, 증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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