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사랑과 증오
“이것이 이번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소.”
사도명의 말에 은교교는 미간을 더 깊이 찡그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맹주님이 위험합니다. 어서 가요.”
은교교는 사도명의 팔을 더욱 세게 당겼다.
“늦으면 위험해요.”
“위험할 것 없소.”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사부가 맹주님을 해치러 갔는데 어떻게 위험하지 않다 말해요?”
“화왕은 설청산 맹주를 증오하지만, 그 증오는 애초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오?”
사도명이 은교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화가 나서 사랑하는 사람의 뺨을 때릴 수는 있지. 하지만, 목숨까지 빼앗는다? 나는 못 믿겠소.”
**
자령비고는 십자대성의 지하에 위치한다.
자부금시는 자령비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다.
소빙유는 자령비고의 앞에 선 채로 불현듯 한숨을 쉬었다.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설청산을 사랑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기에 질투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설청산을 해쳤고, 자신마저 해치고 있는 것이다.
선조 때부터 지켜온 무림맹이 그녀 자신의 손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 소빙유는 사랑하는 제자마저 제5 동심결주의 손에 넘기고 왔다.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제자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 외쳤다.
“너무 늦었잖아. 이미 돌이킬 수없어. 앞으로 나갈 수밖에!”
자부금시를 받아들인 자령비고의 기관이 작동을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문이 열리자 찬란한 자색의 빛이 밖으로 쏟아졌다.
빛은 동굴 곳곳에서 자라는 자수정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자령비고는 지하에서 우연히 발견된 천연의 자수정 광산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소빙유는 자령비고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자령비고는 차대의 무림맹주인 무림태자를 위한 곳이다.
현재의 무림맹주는 수시로 자령비고에 들러 자신이 얻은 무공과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적어 놓거나 흔적으로 남겨야 한다.
만에 하나 무림맹주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더라도 무림맹의 모든 것이 무림태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안배였다.
“절대독고에 당한 그 순간에도 자령비고를 찾은 건가요?”
소빙유는 자수정이 좌우를 메운 복도를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무림맹을 위해서? 과연 자신의 삶을 모두 무림맹에 바친, 역대 최고의 무림맹주 설청산답네요.”
몇 번의 모퉁이를 돌자, 마침내 가장 중앙의 석실이 나타났다.
<자보궁紫寶宮>
편액의 선명한 글은 제2대의 무림맹주인 호불군이 직접 썼다.
호불군은 해검의 포고를 천하에 내려 무림맹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으로 내부를 정비했다.
맹의 곳곳에 자수정을 바탕으로 한 편액도 달았다.
설청산은 편액 바로 아래의 옥좌에 앉아 있었다.
옥좌는 서천 법화산에서 가져 온 보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보옥이 품고 있는 한기는 독을 밀어내는 효능을 갖고 있다.
설청산은 중독된 후 스스로 이곳을 찾아 왔을까?
아니면 동심결주가 직접 데려다 놓았을까?
동심결주는 아직 설청산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살려두는 편이 죽게 만드는 편보다 낫다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 있었군요.”
듣지 못할 것이 뻔한 설청산에게, 소빙유는 그가 듣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여기는 꽤 춥군요.”
설청산은 대답할 수 없다.
소빙유는 그에게는 호흡이 있긴 했지만 매우 느렸고, 심장 박동도 거의 뛰지 않음을 느꼈다.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소빙유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말하듯 속삭였다.
“교교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소빙유는 검지 끝으로 설청산의 코를 쓸어내렸다.
“동심결이 무림맹을 삼키려 한다고 생각하지, 이미 삼킨 후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죠.”
오똑한 콧날이었다.
쓸어내리던 검지가 콧날의 끝에 닿자, 소빙유는 길게 한숨 쉬었다.
“휴우. 천라옥벽을 구해 오기만 하면 당신이 중독에서 벗어나, 무림맹의 암운을 한 번에 걷어낼 수 있다고 믿어요. 어리석게도!”
소빙유는 설청산의 뺨을 만지고, 팔과 다리를 천천히 만졌다.
“이미 맹주와 태자가 우리 손에 제압되고, 원로회의 태반이 무림맹이 아닌 동심결에 충성을 맹세한 지가 오래인 것을 몰라요.”
부드러운 피부였다.
그럼에도 팔뚝과 다리의 근육은 넘치는 탄력으로 탱탱했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건데. 그 애와는 정말 싸우기 싫은데. 그래도 할 일은 결국 해야 하는 것이겠죠?”
소빙유는 품에서 칼을 뽑았다.
날카롭고 뾰족한 칼끝에서 차가운 빛이 사방으로 흘렀다.
“나는 동심결주에게 당신을 내 손으로 처리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니까, 하려고 했던 일을 하겠어요.”
소빙유는 칼을 설청산의 이마에 대더니,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동심결주는 차가운 사람이고, 용서가 없는 사람이에요. 교교는 이미 죽었겠지요?”
칼끝이 피부에 닿지는 않았다.
설청산의 몸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코와 턱과 목을 타고 내려온 칼은, 심장의 바로 앞에서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부로서, 솔직히 미안해요. 하지만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았죠. 어차피 곧 다시 만날 테니까. 잠시 후에 나는 교교가 가 있는 곳에 있을 테니까. 사과는 그때 하려고 해요.”
소빙유는 자신도 죽는다는 말을 매우 태연하게 했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눈은 보통 사람과 다르기 마련이다.
소빙유의 눈도 표현하기 힘든 빛으로 계속 번들거렸다.
“당신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갈 곳에 먼저 보내 줄게요. 당신에게 할 사과도, 그때 할게요.”
소빙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이 설청산의 옷을 뚫었다.
워낙 칼끝이 날카로워서, 살짝만 밀어 넣어도 심장까지 관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왜 그랬죠?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두고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만 보았나요?”
피가 뭉클 솟았다.
뭉친 핏물은 검 끝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더니, 주르르 아래로 흘러 내렸다.
“도대체 왜?”
소빙유는 눈을 감았다.
오랜 시간 가지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가지고 싶은 만큼의 증오를 키워온 사람이었다.
“끝내요, 이제.”
다시 한번 칼을 고쳐 쥐었다.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소빙유는 한숨처럼 말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그 망할 년이 아니라, 나를! 나만을 기다리도록 하세요.”
그러나 소빙유는 끝내 칼을 심장 속으로 밀어 넣지 못했다.
그렇게 힘을 주고도 검끝을 한 푼도 밀지 못했다.
소빙유는 부들부들 몸만 떨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
그녀는 몸을 떨다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왜?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대답을 바란 고함이 아니었으나, 뒤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아직은 사랑하는 마음이 남았기 때문 아니겠소?”
소빙유는 발작적으로 몸을 돌리며, 손에 든 칼을 앞으로 겨눴다.
어둠 속에서 사도명이 걸어왔다.
소빙유는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지? 이곳을 들어오는 방법은 자부금시로 여는 것뿐이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기관이 발동하게 되어 있는데.”
“사실 자령비고의 열쇠는 모두 세 가지가 존재하오.”
사도명이 손을 들어, 자신이 쥐고 있는 백옥소검을 보여주었다.
“맹주가 들어올 수 있는 자부금시. 무림태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는 청옥소검.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기의 순간에 끝까지 무림태자를 보호할 이 백옥소검.”
“아!”
소빙유가 물었다.
“사도명! 네가 세 번째의 특별순찰이었던 거냐?”
“본래는 아니었소. 친구가 신혼의 단꿈이라, 잠시 물려받아서 가져왔을 뿐이오.”
사도명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며 말했다.
“나오시오.”
소빙유는 사도명이 보는 곳에서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을 보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교교야.”
은교교의 표정은 차가왔다.
“아직도 제가 보이시나요? 죽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나요?”
“나, 나는….”
“절 키워주신 은혜, 조금 전 절 제압해 버려두고 가신 걸로 씻음하고자 합니다.”
소빙유가 몸을 떨었다.
“그, 그런….”
은교교가 앞으로 걸어 나와 소빙유의 앞에 섰다.
“배은망덕하다 싶으신가요?”
무방비 상태로 선 채, 은교교는 소빙유가 든 칼을 보았다.
“만약 그리 생각하시면 지금 들고 있는 칼로 절 찌르세요.”
소빙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다. 나는… 그리 생각 않는다. 너는… 너는 내게 은혜 따위 입지 않았으니까.”
“날 키워주셨잖아요.”
“…설청산이 처음 널 내게 맡겼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소빙유가 은교교와 설청산을 번갈아 보았다.
“교교. 네가 청산과 그 망할 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
“아!”
은교교는 눈을 감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의 출생 내력.
자신의 이름!
그 달빛 교교하던 밤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랑.
은교교의 어머니, 은요진은 은교교를 낳다가 죽었다.
그녀는 본래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은요진은 설청산을 처음 만나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은요진은 나와 함께 당시 무림이화로 불렸었다. 나와 매우 친했음에도, 그년은 나의 남자를, 내 남자를 빼앗아갔다.”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 어머니는 누구도 빼앗지 않으셨어요.”
“은요진은 칠음절백을 타고났었다. 절맥이 발작하면 20을 넘기기 전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지. 그래서 순음의 무공을 익혀 죽음을 늦추어 두고 있었어.”
소빙유가 은교교를 보는 눈빛이 이글거렸다.
“네가 남자를 가까이하면 아니 된다는 걸 알고 청산을 소개시켜 줬다. 네가 청산과 사귈 줄 알았다면 나, 나는….”
소빙유는 은교교가 은요진 본인이라도 되는 양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절대로 네가 설청산을 만나게 두지 않았을 거야!”
“어머니가 맹주를 사랑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은교교가 설청산을 보았다.
“맹주가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 일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듯 말이에요.”
사도명은 떨리고 있는 은교교의 손을 힘 있게 잡아주었다.
“사람의 감정은 조종할 수 없지. 당신은 왜 설청산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맹주라 부르시오?”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맹주는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인정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누군지는 변할 수가 없소.”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은교교의 입술은 피를 쏟을 것 같았다.
“달빛 교교하던 그날 밤. 어머니의 칠음절맥이 발작했어요.”
“아!”
“절맥을 막아주던 순음지기가 깨져 나갔기 때문이죠. 맹주와의 그 한 번의 사랑에,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겁니다.”
은교교의 뺨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좋으면서도 싫어요. 어머니가 모든 것을 바친 사랑을 뜻하는 이름이고, 동시에 설청산 맹주가 얼마나 무정한지 말해 주는 이름이니까.”
사도명은 은교교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야 했다.
조금만 힘을 뺀다면,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아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울음보다 더 거칠게 몸을 떨던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더니, 자신의 손을 뺐다.
그녀는 보옥 의자에 앉아 있는 설청산의 앞으로 가서 소리쳤다.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있죠?”
“…….”
“어머니의 사랑을 외면했으면서도, 그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잉태된 날 외면했으면서도!”
은교교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 모든 이유가 무림맹을, 세상을 지키겠다는 것이었으면서도!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냐고요? 한낱 독에 중독된 꼴이 뭔가요?”
설청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도저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소빙유가 한숨처럼 말했다.
“너는… 너는 이미 나와 은요진, 그리고 설청산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은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도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절 키웠군요.”
“너를 키우면서 행복했다. 넌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저도 사부의 제자여서 행복했어요. 사부는 좋은 스승이었고, 제겐 어머니 같았죠.”
소빙유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또한 너를 증오했다. 너는 은요진의 딸이니까.”
은교교 역시 소빙유와 똑같이 입술을 깨물더니 외쳤다.
“저도 이제부터 사부를 증오합니다. 특별순찰로서 무림맹을 망친 동심결의 서열 6위를 심판해야 하는 것이 제 임무예요.”
소빙유가 아래로 내렸던 날카로운 검을 들었다.
하지만 은교교가 오른손을 튕기는 동작이 더욱 빨랐다.
째-앵!
은교교가 손끝으로 내쏜 검기가 소빙유의 칼을 쳤다.
사도명의 손도 움직였다.
백옥소검이 허공으로 날아오른 소빙유의 칼을 반으로 쪼갰다.
“원로회의 소집이 공고되었소.”
“아!”
소빙유가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진 사도명이 어느새 소빙유가 움직여 가려는 방향을 막으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소집의 이유는 맹 내에 암약하고 있는 동심결의 축출.”
사도명이 소빙유의 혈도를 빠르게 짚었다.
“그리고 소집자는 무림맹의 부맹주인 법허 대선사.”
소빙유는 마혈이 짚여,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사도명은 은교교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은 보름이야. 당신이 자신의 이름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약속할게. 교교한 달빛 아래 동심결은 모두 사라지도록 만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