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세 번째의 특별순찰
탁호강은 죽었다.
탁호천은 내장이 섞인 피를 토한 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은교교는 소빙유에게 자신의 뒤에 서라고 외쳤다.
동심결주는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소빙유를 잡지 않았다.
그는 은교교의 손을 보며 계속 미간만 찡그리고 있었다.
“본 적이 있어. 그 무공! 나는, 어딘가에서 보았다.”
동심결주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 소빙유는 계속 걸었다.
그러나 은교교의 뒤로 가서 서지는 않았다.
그녀는 탁호천의 옆을 지나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의 품을 뒤졌다.
“…사, 사부.”
은교교는 단지 소빙유를 한 차례 힘없이 부를 뿐이었다.
차마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존경스럽던 사부가 아니었다.
소빙유는 더 이상 광명정대함에 빛나는 팔왕 중의 한 명일 수가 없었다.
소빙유가 탁호천의 품을 뒤졌다.
자부금시를 찾아 꺼내무 웃었다.
“호호. 내 것이다. 이건 내 거야. 설청산은 이제 내 손에 있다.”
웃고 있는 소빙유의 손목을, 탁호천의 손이 잡았다.
“이러지 마시오.”
“이것 놔. 탁호천!”
“한때 당신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부탁하오. 그게 있어야 맹주를 구할 수 있소. 맹주를 구해야, 천외의 오대마문이 만든 이 혈겁을 멈출 수 있소.”
“놓으랬잖아-!”
소빙유는 고함을 지르며 탁호천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오른손을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탱화산수 중에서도 위력이 가장 강력하다는 화만중중의 공력이 그녀의 왼손 장심에 차올랐다.
“그러지 말랬잖아요, 사부.”
고함이나 울음보다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을 담은 음성이 울렸다.
은교교는 동심결주와의 팽팽한 대치를 풀고 소빙유를 향해 날아갔다.
파-앙!
소빙유의 손바닥에서 화만중중의 공력이 솟구쳤다.
은교교는 그 힘을 ‘와’의 깨달음으로 흩어버렸다.
연달아 ‘출’을 이용하면서, 소빙유를 뒤로 밀었다.
낮은 신음과 함께 소빙유가 뒤로 날려갔다.
“크으. 네, 네가 감히 나를… 이 사부를…!”
소빙유가 잡고 있던 자부금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떨어지는 자부금시를 받으면서 은교교는 소빙유에게 말했다.
“다치게 만들진 않았습니다. 그냥 밀쳤을 뿐이에요.”
“당장 자부금시를 내게 가져오지 못할까?”
“제정신이 아닐 때의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사부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은 다음, 그때 다시 저의 죄를 용서 빌게요.”
은교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탁호천의 혈도 몇 군데를 짚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탁호천을 향해, 자부금시를 건네며 말했다.
“임시 치료일 뿐입니다. 나중에 꼭 다시 의원을 만나셔야 합니다, 노선배.”
“끄으으. 커허헉!”
탁호천은 피가래를 한 차례 크게 토했다.
그러더니 매우 편해진 표정으로, 일어나서 앉았다.
“어, 언제 이런 무공을 배웠단 말이냐? 이 무공은 혹시…?”
“드디어 생각이 났다-!”
동심결주가 고함을 질렀다.
놀란 은교교가 돌아보자, 동심결주가 고개를 들며 외치고 있었다.
“검몽으로 뽑혔던 녀석.”
눈이 있어야 할 부위에 위치한, 동심결주의 붉은 원!
그 원이 마치 눈빛인 양 무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도명이라는 이름이었어. 6년 전. 그 녀석이 사용했던 무공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말을 끝낸 동심결주의 양손에 파멸혈강의 기운이 피어났다.
은교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탁호천의 앞을 막았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요, 사부! 지금 내 뒤에 서지 않으면 영원히 서지 못할 겁니다.”
소빙유는 파르르 몸을 떨더니, 결국 은교교의 뒤에 섰다.
“하하하. 모여 있느냐? 그럼 한꺼번에 정리해 주마.”
동심결주의 파멸혈강이 은교교를 노리며 쏟아졌다.
은교교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며 생각했다.
‘와로 흩는다!’
그녀가 지닌 내공은 쏟아져 오는 파멸혈강의 위세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약했다.
하지만 와는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거스르는 흐름을 찾아내는 수법이었다.
동심결주는 자신이 내쏜 파멸혈강이 기묘한 반발에 막히며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또 어떤 사술이냐?”
“와는 되돌린다. 너의 힘을 되돌려서 다시 쏟아내 주지. 출!”
은교교가 앞으로 모았던 양손을 길게 뻗었다.
동심결주는 자신의 파멸혈강이 은교교의 힘에 더해져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사술이 아니라고?”
퍼퍼퍼퍼-펑!
동심결주는 연달아 다섯 번의 장력을 내치며 호통쳤다.
그는 두 걸음 물러서고서야 겨우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은교교도 마찬가지로 두 걸음을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녀는 사도명이 전수한 창천사해의 위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내가 동심결주와 동수를?’
현격한 내공 차이를 단지 구결과 깨달음으로 극복한 현실!
은교교는 스스로 무공을 시전하고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람은 동심결주의 놀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심결주의 숫제 식은땀을 흘렸고, 마음이 흔들리는 바람에 얼굴의 몽면술이 풀릴 뻔했다.
“너는 정말로 나와 맞서 볼 생각이냐?”
“본래는 도망칠 생각이었지. 그런데 한 수를 부딪쳐 보니 맞서도 될 것 같네.”
태연한 대꾸에 동심결주는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소빙유! 자부금시가 갖고 싶지 않은 거냐? 지금 갖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다.”
“지금 무슨… 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외치려던 은교교가 탄성을 뱉었다.
허리 부근이 뜨끔했다.
마혈이 짚인 은교교는 자신의 혈도를 누른 소빙유를 돌아보던 동작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사, 사부. 정녕 끝까지….”
“내 것이다.”
소빙유는 은교교의 품에서 자부금시를 꺼냈다.
자부금시를 들고 소빙유가 석실의 밖으로 달려갔다.
동심결주는 그녀를 막지 않고 오히려 길을 비켜주었다.
은교교는 사라지는 소빙유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볼 뿐이었다.
저러한 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혹시 자신의 욕심에 대한 집착이지 않을까?
소빙유는 혈도가 짚인 자신의 제자를 동심결주의 앞에 버리고 자령비고로 달려간 것이다.
은교교는 절망에 차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동심결주를 한 번은 막을 수 있을 거다.”
탁호천은 은교교의 앞으로 돌아와서 섰다.
“그 틈을 노려 아까처럼 혈도를 풀어 보거라. 그리고 도망쳐라. 가서, 부맹주에게 내가 일에 실패하여 죄송해하더라고 전해라.”
동심결주의 입이 몽면 속에서 저 혼자 활짝 웃었다.
“하하하. 정말로 막아낼 수 있을까? 단 일 초라도 가능하다고?”
동심결주는 두 손에 각각 파멸혈강과 혈염지를 끌어 올렸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내공 강기가 허공에서 웅웅 혼자 울었다.
은교교는 와를 이용해 다시 한번 점혈을 풀려고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한 번 해봤어. 그러니 처음보다는 분명히 빠를 거야.’
하지만 동심결주가 파멸혈강과 혈염지를 쏘는 시간보다 빠를 수가 있을까?
탁호천은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아낸 후에 양손을 들었다.
‘최선을 다해 본다.’
은교교는 초조했다.
초조한 마음이 기의 운행을 방해하여, 점혈을 푸는 시간은 오히려 길어졌다.
“이만 끝내자.”
동심결주가 마침내 파멸혈강과 혈염지를 쏘았다.
똑같이 붉은, 두 가지 다른 기운이 탁호천과 은교교의 가슴과 머리를 각각 노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아아!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한 줄기, 시리도록 하얀 빛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검이었다.
백옥의 빛을 발하는 작은 검이, 어디선가 날아오더니 동심결주의 혈염지를 베었다.
츠칵!
그리고 저 혼자서 회전하면서, 파멸혈강의 정면에서 막았다.
콰르릉!
폭음이 일었다.
동심결주는 백옥의 검이 일으킨 검기가 자신의 공격을 와해시키자, 놀라서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보여드리는 게 가장 빠를 듯 하네.”
사람이 나타났다.
허공에 떠 있는 백옥의 작은 검 바로 뒤에, 마치 처음부터 그 검을 쥐고 있었다는 듯 사도명이 나타난 것이다.
“도명!”
은교교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곤, 스스로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반갑소?”
동심결주가 사도명이 들고 있는 검을 보며 이를 갈았다.
“백옥소검?”
“하하하. 알아 보시네.”
사도명이 백옥소검을 흔들었다.
“이 검은 신분의 증명. 그러니까 나는 세 번째의 특별순찰… 에 임시로 취업한 사람, 이라고 해 둡시다.”
동심결주는 조금 전 은교교가 불렀던 이름을 떠올렸다.
“도명! 사도명?”
“하하 잘도 맞추는구려.”
“6년 전 검몽이었으나 남몰래 떠났던 그 사도명?”
“그 말, 재미가 있군.”
사도명의 눈이 빛났다.
“언제부터 무림맹에 암약했기에 6년 전의 일을 알지? 오랫동안 무림맹에 있었다면 위장한 신분이 있었을 텐데, 그 신분이 뭐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동심결주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사도명이 백옥소검을 던졌다.
“얼굴을 볼까?”
쐐액!
백옥소검이 허공을 날아 곧바로 동심결주의 얼굴을 노렸다.
“흥!”
동심결주가 냉소하며 오른손을 움직여 백옥소검을 쳐냈다.
까-앙!
경쾌한 소음과 함께 백옥소검이 튕겨 나갔지만, 동심결주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츠팟!
그의 뺨이 찢겨 나갔다.
피가 튀면서 몽면술이 풀렸고, 동심결주는 왼쪽 소매를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려야 했다.
“검기가 검과 따로! 오히려 검보다 먼저 왔다고?”
“창천사해의 두 번째 출! 집중한 마음이 만들어 낸 검을, 밖으로 쏟아내는 구결.”
사도명은 튕겨 오른 백옥소검을 허공섭물로 당겨 잡으면서, 동심결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매를 내려. 얼굴을 보자.”
“헛소리 마라!”
동심결주가 뒤로 물러나며 오른손을 이용해 천장과 바닥에 어지럽게 장력을 퍼부었다.
퍼퍼-퍼펑!
천장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도명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백옥소검을 갈무리한 다음, 왼손으로는 탁호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은교교를 잡았다.
몸 전체에 호신강기를 퍼뜨려 무너지는 천장 파편이 자신들을 다치게 만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안까지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이 기관은 비상의 경우 천장과 바닥을 무너뜨려 적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게 하는 거니까.”
은교교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내, 내려 주세요. 가까스로 혈도를 풀었어요.”
사도명은 은교교를 내려주었다.
탁호천도 내려준 다음, 오른손을 그의 등에 댔다.
“도움이 될 겁니다.”
탁호천은 자신의 등을 통해 시원한 기운이 들어옴을 느꼈다.
“고, 고맙소.”
탁호천이 자신에게 인사할 때, 사도명은 무너진 천장이 만든 거대한 흙더미를 보았다.
탁호강의 시신은 그 속에 이미 묻혀 버렸다.
탁호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형님으로선 커다란 무덤을 가진 셈이군. 휴우. 형님! 굳이 그런 선택을 하셨어야만 했소?”
“금왕의 손목을 자른 사람은 저입니다.”
사도명이 말했다.
“후회하거나 미안한 마음은 없습니다. 다시 그런 순간이 닥쳐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알고 있소. 모두 형님이 자초한 일임을 아오.”
탁호천은 다시 한 번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래도 형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켰소. 그에 비해 소빙유는….”
은교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건 아니다.”
탁호천은 침상을 보았다.
화운악이 누워 있는 침상은, 다행히 석실의 가장 안에 있었다.
천장의 무너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걱정스러운 건 설청산 맹주다. 맹주는 자령비고에 있고, 화왕이 자부금시를 갖고 갔어.”
탁호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독고에 중독된 맹주에게, 아아 화왕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두렵구나.”
“동심결주가 천라옥벽을 갖고 있어요.”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았다.
“지금은 세 번째의 특별순찰이라 하셨죠? 도와줘요.”
“당연히! 본래 도우러 왔소.”
“뒤쪽에 밖으로 나가는 또 다른 통로가 있어요. 당장 자령비고로 가야 해요. 맹주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아, 안 됩니다.”
사도명은 침상에 여전히 누워 있는 화운악을 보았다.
탁호천이 말했다.
“내가 여기서 지키리다. 무림태자의 절대독고는 부맹주님이 빼내 주셨소. 지금은 회복 중이라 정신을 못 차리는 것뿐이오.”
“그럼 수왕 노선배께 이곳을 맡기고 가겠습니다.”
은교교가 사도명의 팔을 끌었다.
“가요. 맹주님이 위험해요.”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누굴까?”
“뭐가 누구란 말이에요?”
“동심결주가 다섯 명이나 된다 하지 않았소?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대체 누구로 위장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숨었기에 지금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점이 매우 이상해. 다섯 명이나 되는 동심결주. 그들은 어떻게 신분을 숨기고 살았을까? 이것이 이번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