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9화 (19/168)

019화. 사랑과 어둠

소빙유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젊어서 매우 아름다웠고, 나이가 든 지금도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빛을 발했다.

매우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애정을 표현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인 남자는 두 명이었다.

두 사람은 형제였다.

탁호강과 탁호천.

두 사람은 모두 소빙유를 사랑했고,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명 중에 보다 남자다운 사람은 동생인 탁호천이었다.

천하에 남자가 단 두 명뿐이어서, 둘 중에 한 명을 골라야만 한다면 소빙유는 당연히 탁호천을 택했을 터였다.

아니, 천하에 설청산이라는 남자만 없었더라도 소빙유는 탁호천을 택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빙유의 앞에 설청산이 나타났다.

아무리 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고백해도 소빙유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소빙유가 아무리 애정을 호소해도 설청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빙유가 설청산에 대한 마음을 얘기했을 때, 탁호천은 자신의 마음을 접고 떠나려고 했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줄 수는 있지만, 다른 남자를 보는 걸 참을 자신은 없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같군.”

하지만 탁호강은 달랐다.

그는 떠나려고 하는 탁호천을 붙잡으면서까지, 소빙유의 주변에 머물러 있으려 했다.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도, 계속하면 화왕의 마음도 흔들릴 걸세, 아우. 그때 화왕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택하지 않을까?”

심지어 탁호강은 소빙유를 따라 동심결에 들었다.

결국 탁호천 역시 동심결에 들었으나, 그 이유는 탁호강이나 소빙유와는 달랐다.

탁호천이 자신을 공격하자, 소빙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 나를, 나를 공격한 건가요, 탁호천?”

“분명 그렇게 했소.”

“내가 누군지를 잊었어요? 난, 소빙유예요. 화왕 소빙유.”

“설청산 맹주가 당신을 돌아봐 주지 않을 때, 난 처음에는 의아했었소. 왜 사랑하지 않을까? 나는 이토록 가슴 아린 상대인데, 설청산은 어이하여 다를까?”

탁호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에 와서야 알 것 같군. 설청산은 이미 알았던 거요.”

“알았다니! 뭘 말인가요?”

탁호천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했다.

“당신은, 휴우… 당신은 결코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소.”

“아우야!”

소빙유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르며 발작하듯 몸을 날린 사람은 탁호강이었다.

“네가 지금 감히 누구를 모욕하는 것이냐?”

탁호강은 오른 손목이 잘리고 없었다.

왼손만 움직이는 그의 공격은 단조로워서 피하기가 수월했다.

탁호천은 몇 차례 탁호강을 공격을 피한 후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공력을 돋아서 그의 가슴에 일장을 쏘았다.

“정신 차리시오, 형님!”

쩌-엉!

장력에 얻어맞은 탁호강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커헉!”

피를 뿜으며 날려간 탁호강은 공교롭게도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소빙유의 발아래에 떨어졌다.

“미, 미안하오. 아우가 화가 나서 한 말이니 괘념치 마시오.”

소빙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를 토한 탁호강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탁호천을 노려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자부금시를 내 놔, 당장!”

“보이시오, 형님?”

탁호천이 탁호강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을 돕다 다쳤건만, 저 여자는 관심이 없소. 천외 오대마문의 제자들이 맹에 들어와 동심결을 만들었건만, 싸워야 하는 저 여자는 그들에게 협조하고 있소.”

“열쇠를 내 놔, 탁호천!”

“그 모두가 빌어먹을 사랑 때문이라는군. 자신이 너무나 설청산 맹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그를 직접 죽여야 하기 때문이라 말하는군!”

“내놓으라 했다, 탁호천!”

소빙유가 다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저주혈화공을 시전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손으로 천화난무를 시전했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탁호천이 느끼는 압력은 유래가 없이 높았다.

탁호천이 양손을 들었다.

“이런 힘으로!”

들어 올린 양손이 오묘한 곡선으로 얽혀들면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을 한꺼번에 일으켰다.

“이와 같이 강한 힘으로, 천하를 지켜야 할 사람이 오히려 세상을 파괴한다면!”

탁호천이 자랑하는 취령산수(鷲靈散手)의 기운이 한편으로는 천화난무를 방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틈을 노려 파고들면서 석실 안을 내공의 파편으로 가득 채웠다.

콰르르르릉!

“크윽!”

우열이 판가름 났다.

탁호천은 신음을 흘리며 두 걸음 뒤로 물렀다.

하지만 비명조차 없이 뒤로 날려가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소빙유였다.

“빙유!”

탁호강이 다시 한 번 달려왔다.

“치워!”

소빙유는 손을 흔들어, 자신을 부축하려는 탁호강을 물리쳤다.

“아아. 나, 나는….”

탁호천은 몸의 자세를 바로 세운 후 자신의 말을 맺음했다.

“그럼 세상이 어찌 되겠소? 내가 부맹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소.”

“하하하.”

지금까지 말없이 서 있던 동심결주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법허의 부탁을 받고 거짓으로 동심결에 들었단 건가? 설청산이 어디에 갇혔는지를 알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탁호천은 자신의 품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자령비고를 열 수 있는 자부금시가 품속에 고이 들어있었다.

“형님. 형제의 정리를 빌어 마지막 부탁을 하오. 나는 이제 설 맹주를 구출하러 갈 거요. 동심결주가 날 쫓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오. 그것으로 무림맹에 지은 죄를 속죄합시다.”

탁호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우! 나, 나는….”

“탁호천을 죽여!”

소빙유가 소리쳤다.

“동생을 죽여요. 그럼 약속하지요. 당신 여자가 되어줄게요.”

“나는… 나, 나는….”

탁호강은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탁호천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이 멍청아-!”

탁호천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호형권 중의 최고 절초인 노호천지를 토해냈다.

쿠르-릉!

화난 호랑이의 포효 같은 굉음이 주먹 끝에서 일어나며, 탁호강의 복부를 깊이 파고들었다.

“끄으-!”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탁호강은 날아갔다.

그는 다시 한번 소빙유의 발 아래에 떨어졌지만, 소빙유는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모르겠소, 형님? 저 여자의 마음속에는 오직 설청산 하나뿐이오.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지 않고 죽이고 싶다는 여자를, 어이해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거요?”

탁호강은 쓰러진 채로 소빙유를 올려다보았다.

젊었을 때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눈매는 이제 비록 주름이 지긴 했으나 여전히 고왔다.

“괘, 괜찮소, 빙유? 내가 자부금시를 다, 당신에게 가져오겠소.”

소빙유는 탁호강의 말은 듣지 않고 동심결주를 보았다.

“뭐하고 있죠? 우리는 약속을 했잖아요. 무림맹은 당신이 갖고 설청산은 내가 갖기로! 어서 자부금시를 빼앗아 내게 줘요.”

“그렇게 하지.”

동심결주가 오른손을 들었다.

붉은 구름 같은 기운이 그의 장심에서 뭉클뭉클 흘러나와 손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파멸혈강!”

동심결주의 무공을 알아본 탁호천이 신음했다.

다섯 명의 동심결주는 오대마문에 의해서 길러진 자들이었다.

다섯 개의 동심원을 지닌 눈앞의 제5결주는 그중의 혈운곡 출신임이 분명했다.

혈운곡이 자랑하는 파멸혈강은 피속의 기운을 장심을 통해 뿜어내어, 부딪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무공이었다.

“알아보는 건가?”

제5동심결주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렇다면 그 위력도 알 터.”

퍼퍼퍼퍼퍼퍼-펑!

허공을 날아오는 파멸혈강의 기운은, 작은 번개라도 머금은 듯 곳곳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탁호천은 그것이 파멸혈강이 극성이 이르렀을 때 벌어지는 현상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호형권!”

“천룡음!”

“취령산수!”

세 명의 신령스러운 짐승인 용호취의 동작과 힘을 본뜬, 탁호천의 무공 세 줄기가 하나로 합해지면서 파멸혈강에 대항했다.

콰콰콰콰-콰콰쾅!

“크으윽!”

탁호천은 신음을 뱉으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은 후에야 겨우 멈추고 나서, 탁호천은 제5동심결주의 발아래를 살폈다.

그는 단 한걸음만을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내, 내가 모든 힘을 쏟았음에도! 팔왕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내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제5의 동심결주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팔왕? 하하하. 이 얼마나 헛된 이름들이냐? 실력은 쌓지 않고 거짓 명예놀이만 하고 있으니.”

동심결주는 다시 한번 파멸혈강을 오른손에 끌어올렸다.

“무림맹을 만들어 안주했던 너희의 끝이다. 우리들 다섯 문파가 세상으로 오는 날, 너희 중원은 갈가리 찢기고 불탈 것이다.”

“뭘 하고 있죠? 자부금시를 어서 빼앗아 달라 하잖아요.”

소빙유가 또다시 소리쳤다.

제5동심결주는 오른손에 끌어올렸던 파멸혈강을 흩어버렸다.

“시끄럽군, 정말.”

그리고 왼손의 검지를 폈다.

파멸혈강과 비슷한 붉은 기운이, 그 손가락의 끝에 모였다.

혈운곡의 자랑인 혈운진기는 팔에 모이면 파멸혈강을 만들고, 손끝에 모이면 혈염지를 이룬다.

한 번 발사되면 무조건 상대의 피로 세상이 물든다는 뜻.

혈염지는, 단숨에 심장을 관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제5 동심결주의 의도를 눈치 챈 탁호천이 소빙유를 향해서 고함을 질렀다.

“피해. 위험하다!”

“하하하. 피할 수 있다면 혈염지가 아니지.”

동심결주의 손끝에서 핏빛 지풍이 날아갔다.

아니, 이미 지풍이 아니라 강기의 단계에 들어선 기운이었다.

동심결주의 지강은 악독하도록 정확하게 소빙유의 심장 부위를 노리며 날아왔다.

“위험해!”

피를 토한 후 누워 있던 탁호강이 벌떡 일어섰다.

피가 튀었다.

혈염지는 이름 그대로 심장을 뚫었다.

튀어나온 피로 허공이 물들었다.

소빙유의 피는 아니었다.

소빙유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탁호강을 보았다.

혈염지가 꿰뚫은 탁호강의 심장에서 뒤로 튄 핏물은 소빙유의 얼굴과 몸을 흥건하게 적셨다.

“괘, 괜찮소?”

고개를 돌려 힘겹게 묻는 탁호강의 눈에서 생명이 빛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소빙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탁호강은 이미 쓰러지기 시작했다.

“다, 당신이 괜찮다면 나, 나는 … 나는 괜찮….”

심장이 꿰뚫려 산산조각이 난 사람은 홀로 서 있지 못한다.

탁호강의 숨은 그대로 끊어졌다.

소빙유는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으아아아아!”

탁호천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제5 동심결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심결주는 탁호천의 공격을 머리카락 한 오라기의 차이로 피해낸 후에 그의 등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장력을 뿜어내 그의 가슴을 쳤다.

퍼퍼퍼퍼펑!

밀려나지 못하도록 등을 잡은 만큼, 탁호천이 받는 다섯 번의 충격은 강력한 것이었다.

탁호천이 피를 토할 때, 동심결주는 소빙유를 보았다.

잡고 있던 왼손을 놓자, 탁호천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피와 내장을 함께 게워냈다.

“끄웨엑!”

소빙유는 부들부들 떨면서 동심결주를 보았다.

“우, 우리가 했던 약속… 하나의 마음으로 결의한다는 동심결이란 이름… 자부금시를 줘. 내 거야.”

“너는 낙수의 맹세를 지켰나? 날더러 약속을 지키라고?”

동심결주가 소빙유의 멱살을 쥔 채, 탁호강의 시체를 가리켰다.

“탁호강은 어쨌거나 사랑을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던지는 사랑. 너는 어떠냐, 소빙유?”

“나는… 나, 나는….”

동심결주가 왼손을 들었다.

검지에 다시 혈염지의 기운을 끌어올려 소빙유의 이마에 댔다.

“어떻게 생겼을까?”

눈과 코가 없는 동심결주의 얼굴이 입만 크게 벌리고 웃었다.

“하하하. 사랑한다는 상대를 죽이려고 모든 것을 버리는 여자의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을지, 하하하 찬찬히 잘라보고 싶은데.”

“그 손을 떼고 물러나.”

차가운 목소리는 들려올 리가 없는 방향에서 들려왔다.

침착하고 또렷했다.

동심결주가 고개를 돌려 상대가 누군지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은교교였다.

“하하. 네가 어떻게 점혈을 풀었는지는 모르겠다만… 헉!”

그는 이미 한 차례 권풍을 날려 은교교를 쓰러뜨려보았었다.

때문에 은교교가 자신을 향해 지풍을 내쏘듯 손가락을 퉁기는 모습을 보고도 웃었던 것이다.

하지만 웃음은 곧바로 사라졌다.

은교교가 내쏜 것은 분명 지풍 같았건만 지풍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쏟아진다 싶더니, 곧바로 공간을 건너뛰어 동심결주의 손목에 나타났다.

재빨리 헛바람을 삼키며 소빙유의 멱살을 쥔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동심결주의 손목은 분명히 잘리고 말았을 것이다.

“검이 없는 검기? 공간을 뛰어넘는다고? 이, 이런 무공을 안다. 분명히 본 적이 있다.”

은교교는 동심결주에게 대꾸하지 않고 소빙유를 보았다.

“하도 혈도를 단단히 짚어놓으셔서 이제야 겨우 모두 풀었네요. 덕분에 너무 많은 걸 봤어요.”

“…교교야!”

“분노를 보고, 슬픔을 보고, 사랑도 보게 됐어요.”

“…….”

“그리고 몰랐으면 정말 좋았을 사부의 어둠까지.”

은교교는 뭐라고 말하려 드는 소빙유의 말을 끊으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내 뒤로 와요. 저 사람과 오래 싸울 자신 없어. 중간에 싸우다가 사부 같은 사람 지키기 싫어져서 도망칠지 몰라. 그러니까, 당장 내 뒤에 서서 내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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