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8화 (18/168)

018화. 법허 대선사

“어, 어떤 부탁입니까?”

법허의 눈은 보는 능력을 상실했지만 인자한 빛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법허의 눈이 사도명을 향했다.

“내게 제자가 있다. 그 녀석이, 너와 똑같구나.”

“같다고 하심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건만, 하고 싶지 않아 한다.”

“아!”

“나는 녀석에게 싫은 일을 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다. 녀석을 데려가 줄 수 있느냐?”

“데려가 달라 하심은?”

“무림맹을 떠날 수 있도록 해다오. 부탁하마.”

법허는 빙그레 웃었다.

“속세를 떠나 내 밑에서만 자라서 세상의 일을 하나도 모른다. 세상도 가르쳐 주거라.”

“제가 가르칠 것이 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눈이 보지 못하기에 비로소 마음을 보게 되었다. 네 마음속에 깃든 슬픔, 아픔, 증오와 애정, 떠나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다 생각하는 고통이 보이는구나.”

“아!”

“너를 보지 못한 척 해주마. 허허. 애초 나는 앞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니. 대신 나의 제자에게 알게 해다오.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인지를.”

시간이 흘렀다.

사람이 변했고, 세상이 변했으며, 각자의 사정 또한 변했다.

법허의 제자를 데리고 무림맹을 떠났던 사도명은 드디어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사정이 생기고 만 것이다.

법허의 외모는 여전히 인자해 보였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매우 늙고 앙상했으며, 보기만 해도 기력이 쇠잔했음이 느껴졌다.

“이상하군요.”

사도명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법허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후, 놀라서 물었다.

“독혈당의 절대독고가 왜 선사의 몸에 있습니까?”

“알아보느냐? 너는 세상으로부터 떠나 있었던 것이 아니구나.”

“중독이 된 것은 설청산과 화운악 아니었습니까?”

“그랬었다. 두 명이 동시에 중독되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화운악의 중독은, 그 상태가 매우 심각했었지.”

사도명은 듣지 않고도 대충의 사정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절대독고의 해독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 천라대제가 남긴 천라옥벽 속의 백옥유액이 지닌, 만독을 풀어내는 효능만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절대독고에 감염되고도 죽지 않는 방법은 존재한다.

독고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사도명은 법허 대선사가 화운악의 독고를 자신의 몸으로 이동시켰음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어리석습니다.”

“왜 그리 말하느냐?”

“독고가 이동할 때의 고통은, 감염의 고통보다도 오히려 더 크다고 알고 있습니다. 휴우.”

사도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선사께서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희생하십니까?”

“화운악은… 무림태자는 무림맹의 미래니까.”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면서 미래를 지키신다? 도대체 왜요?”

“모든 권리는 의무와 함께 다니기 때문이란다.”

법허 선사가 웃었다.

옅은 웃음의 뒤에, 얼마나 큰 고통과 인내가 들어있는지 사도명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절대독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들어 있는 몸을 갉아 먹는다.

일단 중독이 되면, 죽는 날까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절대독고였다.

“소림은 영구히 무림맹의 부맹주 자리를 가져오면서, 그에 따른 의무도 함께 가져왔어.”

법허는 염주를 잡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독고가 몸을 파먹는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초기부터 안배한 세 명의 특별순찰. 그중의 마지막 한 명을 길러내는 것이 바로 소림이 맡게 된 의무였지.”

사도명은 그 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소림에서 파견된 부맹주는 속가 제자를 키워 무림맹의 세 번째 특별순찰로 만들어야 한다.

세 번째 특별순찰의 임무는 차대 무림맹주, 바로 무림태자를 인근에서 호위하는 것이었다.

그 호위에는 비상의 경우에 대한 각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무림태자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는 것 말이다.

법허는 연자강이라는 고아 소년을 속가제자로 삼고, 그에게 세 번째 특별순찰의 임무를 주었다.

어느 날 연자강이 법허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묻기 전까지는!

“제가 왜 이러한 일을 해야 합니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을 위해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요?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법허는 소림 속가제자로서의 의무와 무림맹을 만든 낙수의 맹세에 대해 설명했으나, 결국 제자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왜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그 희생을 받습니까? 희생하는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희생은 살인과 무엇이 그리 다릅니까?”

연자강의 말은 결국 늙은 승려의 입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구나. 너의 말이 옳다. 누구도 남에게 원하지 않은 일을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졌다.

원로회가 즉시 소집되었고, 세 번째 특별순찰에 대한 처리가 논의되었다.

그들 중의 누구도 연자강에 대해 몰랐다.

얼굴을 몰랐고, 심지어 이름 또한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세 번째 특별순찰이 법허의 속가제자이나, 특별순찰로서의 의무를 거부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미타불. 제자의 생각이 그러하니 난 강요할 수 없소.”

법허의 말에, 무림맹 원로회는 몇 가지의 큰 결정을 내렸다.

<하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세 번째 특별순찰은 파문한다.

둘, 무림맹과 소림에서 물려준 무공은 반드시 돌려받는다.

셋,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는 의미에서, 부맹주의 권한을 대폭 사대호법과 원로회에 양도한다.>

원로회의 회주인 권제(拳帝) 구양걸은, 무림에서 사제(四帝) 중의 한 명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성격이 불과 같았고, 지닌 무공도 삼성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법허는 원로회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 제자의 단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폐했다.

법허는 알고 있었다.

무공이 폐기된 연자강을 뒤에서 노릴 사람들이 무림맹에 많다는 사실을!

소림이 연자강에게 전한 내공은 단전을 부숨으로써 폐기되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소림 무공에 대한 지식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무림맹의 적은 연자강의 머릿속을 노릴 것이다.

무림맹은 연자강을 죽여 비밀을 누설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허가 사도명에게 연자강을 부탁했던 이유였다.

사도명은 연자강을 남모르게 세상으로 데리고 나왔고, 결국 그와는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되었다.

“자강이 있었더라면 화운악이 그렇게 쉽게 중독되었을까? 나는 나의 제자가 다하지 못한 의무를 대신 맡을 수밖에 없다.”

“아!”

법허의 말에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은 의무를 잊는다.

하지만 법허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제자가 다하지 못한 의무를 여전히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었다.

“자강은 세상으로 나가서 잘 지내고 있느냐?”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을 했습니다. 제가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지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정말 보고 싶구나.”

법허는 진심으로 웃었다.

“자강은 법문에 어울리는 아이가 아니었지. 예쁜 사랑을 만나 오손도손 살아야 행복할 아이였어. 아이는 가졌느냐?”

“딸이 있습니다. 무척 귀엽고 영리합니다.”

“건강은 나쁘지 아니하냐?”

“선사 덕분이지요. 그때 단전을 부수는 척하며 선사의 손에 스스로 피를 내셨음을,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랬더냐? 자강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구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허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옅은 습기가 비치는 것을 사도명은 보았다.

“잘 되었구나. 만족스럽다. 나는 나의 의무를 다하였고, 내 제자는 건강하며 행복하구나.”

사도명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물끄러미 법허를 보았다.

이윽고 법허가 감았던 눈을 뜨고 사도명을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포기하마. 전해 달라 한 것을 돌려다오.”

사도명이 품에서 녹슨 칼 한 자루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내공을 주입하자, 칼이 빛을 발하더니 자신의 몸에 붙은 녹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투두둑!

녹을 떨군 작은 검은 은은한 흰 빛을 뿜어냈다.

“백옥소검은 청옥소검과 쌍을 이룬다. 청옥소검을 지닌 자를 보호하는 것이 백옥소검의 임무.”

일곱 달 전, 서생 한 명이 사도명을 찾아와 녹슨 칼 한 자루와 서찰 하나를 건넸다.

“선생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누가요?”

“법허의 전갈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법허는 산속에서 죽은 나무꾼의 시체가 사도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를 어찌 찾았습니까?”

“그냥, 선사께서 가보라고 한 곳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사도명은 법허가 자신을 찾아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녹슨 칼과 서찰이 연자강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법허가 만만치 않은 위험에 처해 있음도 알았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무림인이 아닌 사람을 택해 서찰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명은 녹슨 칼을 연자강에게 건넸다.

하지만 서찰은 건네지 않았다.

이미 그 내용을 읽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엇인가?”

“잠시 맡아 있게. 갖고 있다가, 나중에 내가 달라고 하면 줘.”

서찰의 내용은 심각했다.

무림맹이 무너질 위기이므로, 도움을 청하는 편지였다.

사도명은 품에서 여러 번 접은 서찰 한 장을 꺼내 법허의 앞으로 밀었다.

“제가 먼저 읽고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법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욕심을 부렸다. 무림맹이 무너질 듯하여 도움을 청했어.”

그는 염주를 굴리며 진심으로 웃었다.

“ 제자의 행복을 깨뜨릴 수 있음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전하지 않아서 잘 되었다.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사도명이 백옥소검을 쥐었다.

하지만 서찰과는 달리, 이번에는 법허에게 내밀지 않았다.

“저도 대선사와 똑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가?”

“선사님 덕분에 제 친구가 행복해 하고 있으니, 고맙더군요.”

사도명은 백옥소검을 건네지 않고 품에 넣었다.

“생각했습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 아닐까?”

그는 법허 선사를 보며,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무림맹의 세 번째 특별순찰의 직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 임시입니다.”

“그, 그렇게 해 줄 거냐? 검몽이자, 본래의 무림태자였을 네가 백옥소검을 지니고 세 번째의 특별순찰이 되어도 사, 상관이 없겠느냐?”

“제 친구를 돕고자 무림맹의 일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돕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겼지요.”

법허는 그 한 명 더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사도명이 빠르게 덧붙였다.

“게다가 저는 선사에게 갚아야 할 빚도 있으니까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인연의 실타래는 실로 복잡하여 어디로 연결되어 흐르는지를 알 수가 없구먼. 고맙다. 자네가 도와준다면 실로 천군만마가 될 것이야.”

법허는 빠른 속도로 무림맹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해들은 상황은 사도명이 밖에서 파악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해서, 나는 오직 한 명만 믿을 수밖에 없었네. 공의를 위한 부탁이라는 핑계로, 아미타불, 그에게 너무나 많은 희생을 요구했지. 미안하구먼, 탁호천.”

**

소빙유에게 가던 자부금시를 수왕 탁호천이 중간에서 낚아챘다.

“무슨 짓이에요?”

소빙유가 고함을 지르며, 오른손을 거세게 저었다.

몽롱한 향기가 소매 속에서 일어나며 탁호천을 휘감았다.

탁호천은 자부금시를 품에 갈무리하는 한편, 왼손을 마구 휘둘러 소빙유가 쏟은 향기를 흩었다.

향기는 강력한 미혼향이었다.

절정화의 꽃가루를 모아서 말린 것으로, 냄새를 맡기만 해도 쓰러지게 만드는 위력을 지녔다.

탁호천은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코를 막고 재빨리 물러섰다.

그런 탁호천을 향해 탁호강이 왼손가락을 꼿꼿이 세우면서 달려들었다.

“무슨 짓인가, 아우?”

탁호천은 오른손을 들어 탁호강이 왼손으로 전개한 응조공을 정면에서 막았다.

“형님이야말로 언제까지 이러실 거요?”

꽈-광!

폭음이 일며, 탁호강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탁호천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오른 주먹을 뻗었다.

크르렁!

포효 같은 폭음이 일며, 탁호천의 오른 주먹에서 강력한 기운이 쏟아져 탁호강을 노렸다.

“네가 이제는 드디어 이 형의 목숨을 노리는구나!”

탁호강이 고함을 질렀고, 탁호천은 주먹을 왼쪽으로 틀었다.

콰콰쾅!

호형권의 강력한 힘이 벽을 두드려 울게 만들 때,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덩굴과 꽃은 바닥에서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와 탁호천의 온몸을 감았다.

“호호호. 왜 갑자기 열쇠를 뺏아 가나요? 내가 설청산의 생사를 맡는다고 하니 질투라도 나는 건가요, 탁호천?”

“닥쳐!”

탁호천이 고함을 질렀다.

탁호천의 입을 뚫고 웅장한 호통이 울려 퍼졌다.

용의 울음을 흉내 냈기에 천룡음이라 불리는 음공이었다.

“악!”

탁호천의 몸을 감았던 덩굴이 조각조각 끊어졌다. 소빙유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려갔다.

“빙유!”

탁호강이 몸을 날려서 소빙유를 부축했다.

소빙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탁호천을 보았다.

“다, 당신이 나를… 나를….”

그 와중에, 은교교는 마침내 와의 깨달음을 이용하여 막힌 혈도를 뚫어내는 일에 성공했다.

막혀 답답했던 그녀의 내공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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