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7화 (17/168)

017화. 동심결주의 등장

사도명은 쓰러지는 양시호를 부축했다.

그를 구석자리에 앉히면서 사도명이 말했다.

“그런 종심기가 귀하를 추천했다면, 일단 당신은 동심결이 아니라고 믿어 보겠소.”

사도명이 짚은 것은 양시호의 아혈과 마혈이었다.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했지만, 보고 듣는 일은 가능했다.

사도명은 양시호의 눈빛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눈빛이 매우 좋군. 이것으로 나는 귀하가 동심결에 속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됐소.”

“…….”

“그러므로 나는 이 모습으로 법허 대선사를 만나려 하오. 귀하가 성실하다면, 법허 대선사는 귀하를 신뢰하겠지.”

양시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바로 앞에서, 사도명의 모습이 자신과 똑같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고 경악했다.

“나쁜 일은 없을 거라는 점, 믿어도 좋소. 나는 무림맹을 위해서 왔지, 해치기 위해 오지 않았소.”

사도명이 오른손을 들어 양시호의 몸 주변 이곳저곳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명멸하는 빛이 일어나며, 자신의 몸 주변을 감싼다고 양시호는 느꼈다.

“잠시만 쉬시오.”

사도명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쪽의 복도를 걸어, 부맹주의 집무실 앞에 섰다.

사도명은 한 차례 양시호 쪽을 돌아보더니, 이윽고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양시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은 채로, 그 문 안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 부 맹주님! 긴히 보고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두 명의 사람이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 여기다. 나를 구해라.’

목을 돌릴 수 없어, 양시호는 마음 속으로만 외쳤다.

조금 지난 후에, 양시호는 그들이 누군지를 볼 수 있었다.

산에서 나를 해와 군불을 떼고 물을 덥히는 아석과 앞마당의 전원을 가꾸고 거름을 주는 아광이었다.

‘여기다. 나를 구하라고.’

양시호는 마음속으로 소리쳤지만, 뜻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가주지 않았다.

‘여기다. 여기 있단 말이다.’

그들은 양시호를 보지 못했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음에도, 두 사람은 양시호의 옆을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갔다.

양시호의 몸 주변에 펼쳐진 제 사해 ‘전’의 효과 때문이었다.

아석과 아광은 어둠의 조력자에 속했다.

흑영의 명에 의해, 지금 그들은 신분이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도명을 찾아낼 방법은 없었다.

전을 전개하는 사도명은 그야말로 투명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사도명이 보여주고자 하는 환영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지나간 복도에서도, 아석과 아광이 본 것은 양시호가 아니라 한 개의 커다란 화분이었다.

아석과 아광은 양시호를 구해주지 못했다.

양시호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가는 아석과 아광을, 마혈이 짚여 깜빡이지도 못하는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침상은 두 개였다.

그 위에 누워 있던 사람은 무림맹주 설청산과 현재의 무림태자 화운악이었다.

은교교가 소빙유를 몰아붙이고 있을 때, 갑자기 설청산이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그 대답은 내가 하지.”

그리고 은교교를 향해 한 줄기 권풍을 내쏘았다.

“악!”

소빙유 쪽만을 경계하던 은교교는 갑자기 날아든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녀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은교교는 허리를 얻어맞아 고통에 신음할 뿐, 일어나지 못했다.

설청산이 권풍을 내쏠 때, 소빙유 역시 지풍을 날려 은교교의 마혈을 짚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은교교는 고통의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설청산을 보았다.

설청산이 침상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는 말없이 은교의 품을 뒤져,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고 천라옥벽을 살피더니, 설청산은 소빙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웃었다.

“정말로 천라옥벽이군. 아주 괜찮은 제자를 두시었소, 화왕.”

소빙유가 고개를 숙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결주.”

“아!”

은교교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설청산이 자신을 다짜고짜 공격할 리가 없었다.

침상에 있던 설청산은 처음부터 설청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는, 너는 누구냐?”

은교교가 묻자, 설청산이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

은교교가 놀라 탄성을 뱉었다.

설청산의 눈과 코가 단번에 사라지고 입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눈과 코가 사라진 몽면(蒙面) 위에는, 빨간 동그라미 다섯 개가 그려져 있었다.

본 얼굴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사술을 사용해 얼굴은 숨겼지만, 그럼에도 그의 신분은 분명하게 드러냈다.

“도, 동심의 원! 네가 동심결의 결주냐?”

“다섯 번째를 맡고 있지.”

동심결주가 자신의 얼굴에 있는 다섯 개 원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하하.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천라옥벽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 저희의 공훈을 잊으면 아니 되십니다.

석실을 다른 쪽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조금 전 말했던 사람은 그중 앞장서서 들어온 사람, 오른쪽 손목이 없는 탁호강이었다.

은교교는 탁호강을 보지 않고, 그를 뒤따라 들어온 탁호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쌍둥이답게 두 사람의 외모는 매우 닮았다.

하지만 그 성정이 많이 다름을, 은교교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왕님. 선배님마저 동심결에 속해, 낙수의 맹세를 버렸나요?”

은교교는 탁호천을 향해 말했지만, 대꾸한 사람은 앞에 서 있던 탁호강이었다.

“크하하. 너의 사부도 우리처럼 낙수의 맹세를 버렸잖느냐.”

“닥쳐요!”

소빙유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탁호강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소. 말하지 말라면 말하지 않겠소. 내가 잘못했소.”

“그런 말도 하지 말아요.”

탁호강은 소빙유의 눈치만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이런 모습은, 두 사람을 다정한 친구라 생각했던 은교교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겉으로 친해 보였던 두 사람에게 숨은 사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은교교는 다시 한 번 시선을 탁호천에게로 돌렸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탁호천은 눈을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알고 있다. 나 또한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러운 것을 안다. 하지만 이미 선택했다. 후회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탁호천의 전음이 은교교의 귓속에서 울렸다.

탁호천의 시선은 이제 소빙유를 향하고 있었다.

탁호강의 시선도 같았다.

고정된 그 시선 속에 이해하지 못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숨어 있었다.

은교교가 소빙유를 보며 물었다.

“사부께서는 아직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부맹주 법허 대선사도 동심결에 속해 있나요?”

소빙유의 시선은 동심결주를 향하고 있었다.

동심결주가 웃었다.

“그 대답은 내가 직접 주겠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눈과 코가 없이 입만 있는 얼굴이 웃자,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동심결의 결주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다. 우리들 다섯 명은 각각 한 문파의 무공을 잇고 있으며, 거기에 중원의 잡졸이 끼어들 틈은 없다.”

탁호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탁호강도 헛기침을 했지만 소빙유를 향하고 있는 시선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은교교는 다섯 명, 다섯 문파라는 말에 주목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그녀는 외쳤다.

“다섯 문파? 천외의 오대마문! 혹시 관련이 있는 거냐?”

새외에 있는 다섯 개의 마문과 중원에 위치하는 세 개의 마문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 바로 세외팔천이다.

세외팔천은 무림맹의 숙적이며, 중원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자들의 통칭이었다.

은교교의 고함에 동심결주가 다시 한 번 기괴하게 웃었다.

“내게 묻지 않고, 너의 사부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은령선자?”

소빙유는 은교교에게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동심결주만을 보고 있었다.

“약속대로 설청산의 목숨 처리는 내 손에 넘겨주는 거겠지요, 결주?”

“하하하.”

동심결주가 껄껄 웃었다.

“중원은 재미있는 곳이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충의를 버리고 약속을 짓밟는 여자. 그런 여자가 팔왕이라는 호칭을 달고 있고, 여협이라 칭송 받으며 살아가는 곳이지. 하하하”

은교교에게 소빙유는 자신을 키워준 사부였다. 비록 예상치 못한 일을 당했지만, 소빙유를 비웃는 동심결주에게는 화가 났다.

당장 땅을 박차고 동심결주를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혈이 짚힌 몸이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와의 도리! 흐름 속의 새로운 흐름. 이것을 이용하면 막힌 혈도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은교교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집중할 때, 소빙유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설청산의 처리를 내게 맡긴다는 약속! 지킬 건지를 물었어요!”

“나는 중원의 것들과는 달리 약속을 제대로 지킨다.”

동심결주가 품에서 자색이 감도는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십자대성 지하에는 맹주만이 갈 수 있는 자령비고(紫靈秘庫)가 있지. 이 자부금시는 자령비고를 열 수 있는 열쇠.”

“아!”

동심결주는 자부금시를 소빙유에게로 던졌다.

“거기에 설청산을 두었다. 네 마음대로 해 보려무나.”

자부금시가 허공을 날았다.

열쇠를 받기 위해 소빙유가 손을 내밀 때, 한 소리 강렬한 호통이 석실 안을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열쇠는 내가 가져야겠소, 화왕.”

수왕 탁호천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자부금시를 낚아챘다.

**

실내는 무척 어두워서, 앞으로 내민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았다.

무림맹 부맹주의 처소가 이토록 어둡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사도명은 그 어둠 속을 훑었다.

빛이 없었지만, 사도명의 눈은 사물을 대충 구분할 수 있었다.

한쪽 구석의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왜소한 체구의 승려가 보였다.

“부맹주님. 긴히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법허 대선사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보이느냐?”

“그저 방향만을 짐작했을 뿐입니다, 부맹주님.”

“나는 나를 선사라 불러주는 호칭이 늘 고맙다고 이미 너에게 여러 번 말했었거늘.”

“하, 하지만 맹의 급한 일을 알려드리고자 하니, 부맹주라 칭함이 적절하다 판단했습니다.”

“틀렸다. 나는 한 번도 양시호에게 그리 말한 적이 없다.”

“네?”

“늘 대선사라 호칭하니 부담스럽다 말한 적은 많지. 하하.”

법허가 다시 한 번 웃었다.

“보지 못하니 잘 듣는다. 양시호를 해치지 않고도 제압하더구나.”

사도명은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제사해 전을 이용해 모습을 바꾸는 일이 법허 대선사에게는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제가 괜스러운 짓을 하며 무례를 범했군요.”

사도명은 기운을 돌려, 몸에 두르고 있던 ‘전’을 풀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양시호에서 다시 사도명으로 변했다.

하지만, 법허 대선사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법허는 암흑 속에서의 오래 면벽하며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세상의 인과는 실로 공평하여, 하나를 가져가면 반드시 하나를 주기 마련이었다.

법허 대선사는 시력 대신 마음으로 보는 법을 익혔고, 그 새로운 눈은 그에게 거짓 속에 숨은 진실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오랜만이구나. 6년 전에 몰래 떠난 후 처음이지?”

법허 대선사가 물었다.

사도명은 그가 이미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알고 웃었다.

“그때, 못 본 척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떠나지 못했을 겁니다.”

6년 전 사도명은 무림태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무림맹을 떠났다.

그때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전의 수법을 사용했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수많은 무림맹 사람들이 사도명을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했으나, 한 사람은 달랐다.

법허 대선사였다.

그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사도명의 앞에 앉더니, 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말로 떠나고 싶으냐?”

사도명은 크게 놀랐다.

“제가 보이십니까?”

“보이진 않지만 들린다. 호흡이, 심장의 고동이, 무엇보다 너라는 존재가 들리는구나.”

사도명은 놀라서 내공으로 소리의 흐름을 차단했다.

그래도 법허는 여전히 웃었다.

“이번엔 느껴진다. 사람마다 뿜는 기가 달라. 너라는 사람의 기가 외치는구나. 나 여기 있소, 라고.”

사도명은 힘없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돌아가야 합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법허가 설레설레 고개 저었다.

“아무도 남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 그럼 돌아가지 않아도 좋습니까?”

“원한다면 떠나려무나. 못 몬 척 해주마.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준다면 말이다.”

“어, 어떤 부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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