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어둠의 조력자
‘수앵(秀櫻)’이라는 이름의 여종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한다.
예쁜 앵두나무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 여자는 드물 것이다.
그녀는 흑견의 거처인, 냄새 나는 나무집 안에 있었다.
당분간은 밖에 나갈 수 없다.
그녀의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 지금 밖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은령선자 님께 죄송해요. 제 얼굴이 더 예뻤더라면, 추한 면구를 쓰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수앵은 탁자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도명을 보며 말했다.
사도명은 대꾸가 없었다.
맑은 눈빛으로 조용히 앉아 이을 뿐이었다.
수앵은 물었다.
“저와 얘기하는 게 싫어요?”
사도명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조금 전에 품에서 천에 싸인 무엇인가를 꺼냈다.
천의 속에는 낡을 대로 낡아, 붉은 녹이 잔뜩 슨, 작은 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사도명은 검을 손에 쥐더니 혼자 짧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수앵은 다시 물었다.
“아까, 어딘가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하시던데, 혹시 공자님의 고향이 여기에서 먼가요?”
사도명은 여전히 한 마디의 대꾸조차 없었다.
수앵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공자님은 절 무시하시는군요. 제가 비록 여종의 신분을 위장하고 있지만, 출신까지 미천한 것은 아니에요.”
“…….”
“무림맹에는 세 명의 특별순찰이 있고, 그 중 두 명의 정체는 비밀이란 걸 아시나요?”
“…….”
“나는 단순한 여종이 아니라 비밀 특별순찰 중의 한 명인 흑견 님의 수하예요. 우리들의 임무는 비밀리에… 으음!”
수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사도명이 녹슨 검을 쥔 모습 그대로, 미동조차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비밀리에 맹주를 외부와 이어주는 일을 하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공자는 왜….”
수앵이 다가가서 사도명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처럼 침묵만… 아!”
수앵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손이 허공만 가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앵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지, 이건?”
그 바람에 공기가 흔들렸고, 허공에 만들어져 있던 환영이 신기루로 변해 사라졌다.
바닥에는 녹슨 칼을 쌌던 낡은 천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 내공으로 허공에 환영을 남겼다는 건가? 이와 비슷한 사술이 세상에 있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대, 대낮임에도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수법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수앵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왜 그러고 있느냐?”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흑견이 당황스러워하는 수앵에게 물었다.
“사, 사라졌습니다.”
수앵은 낡은 천만 남아 있는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여기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죠. 그랬는데 어느 순간 없습니다.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언제 사라진 것인지 알 방법도 없습니다.”
흑견은 미간을 찡그렸다.
사도명의 신분은 아직 증빙되지 않았다.
내력을 모르는 자가 함부로 맹을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었다.
“흑영의 명을 발동한다.”
수앵이 놀라서 물었다.
“검은 그림자를? 하지만 그리되면 우리들, 어둠의 조력자들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드러날 때도 되었다. 언제까지 어둠 속에서만 숨어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아!”
“동심결이라는 조직이 맹 내에서 자라났음에도, 어둠의 조력자는 흔적을 잡지 못했다.”
“저 역시 맹주의 거처에 출입하면서도 맹주의 중독을 몰랐습니다. 그저, 연무실 안에 계시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흑견의 눈이 푸르스름한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은 허드렛일만 담당하는 잡부가 아니었다.
“사도명의 행방을 찾아라. 그리고 맹 전체에게 현재의 상황을 알려라.”
“현재의 상황, 이라함은?”
“은령선자가 본성으로 들어왔음을 모두가 알게 하란 의미다.”
“그 말씀은, 동심결에 속하는 자들이 알게 만들라, 라는 거지요?”
“사도명이 누구인지 모르나 그가 은령선자를 도와 동심결과 싸우는 것은 확실하다. 사도명을 발견하면, 그냥 지켜보라.”
“지켜보기만, 입니까?”
“사도명을 인지하면 동심결이 움직이리라. 우리는 사도명을 노리는 동심결을 지켜봄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다.”
“부맹주 법허 선사의 주변을 특히 살펴야 할 듯합니다. 현재로서는 동심결의 결주로 가장 의심되는 사람이 그입니다.”
“나의 생각도 같다. 맹주가 사라져서 가장 이득이 되는 사람이, 분명 맹주를 중독시켰을 것이기에! 움직여라.”
“존명.”
한 차례 고개를 숙인 후, 수앵은 흑견의 집 바닥의 한 부분을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두드린 동작이 특이했는데, 그냥 나무로 보이던 바닥의 일부가 잠시 흔들리더니, 동그란 구멍이 그곳에 나타났다.
수앵은 그 속에 손을 넣고, 안에 있는 밧줄을 잡아 당겼다.
무림맹 몇몇 곳에서 몇 개의 종, 혹은 방울이 흔들릴 것이다.
그 흔들림을 본 사람들 중의 몇 명은 정해진 장소로 가서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구멍을 만들고 밧줄을 당기면, 그 행동은 파장처럼 무림맹 전체로 퍼져나가, ‘어둠의 조력자’들을 움직일 것이다.
“식사를 나르고, 차를 나르고, 쓰레기를 버리면서 상세한 명령의 내용이 전달될 것입니다. 사도명이 어디에 있건, 그 위치는 금방 파악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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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앵의 예상과는 달리 사도명의 위치는 쉽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분명 무림맹의 어딘가에 있었으나,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사도명이 숨어서 움직이거나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도명은 큰길을 걸었고,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걸었다.
식사를 들고, 차를 들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는 흑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어둠의 조력자’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걸어가는 사도명을 주목하지 않았다.
창천사해의 마지막인 제 사해, 전(轉)이 펼쳐 쳤기 때문이었다.
전이란 옮겨내는 것이다.
창천사해 중의 네 번째인 전을 이용하면 사물의 형상과 사람의 기운, 모두를 옮길 수 있다.
전은 앞의 세 가지 와, 출, 역과는 달리 싸우거나 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창천사해란 꾸준히 흘러가는 시간, 무구한 세월에 대한 깨달음이며 때로는 세월과 맞서고 때론 순응하는 법도에 대한 것이었다.
전은 순응하는 법도를 가장 극대화시킨 수법이었다.
사람은 빛을 이용해서 주변의 사물을 본다.
등 뒤로 다가오는 빛을 자신의 앞으로 옮기면, 앞의 사람은 그 사람을 보지 못하고 뒤의 광경만 보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전을 이용하면 다른 사람이 보는 광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황천법문에도 ‘전’과 비슷한 수법이 있다지? 하지만 사람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사술일 뿐, 정말로 보이는 광경 자체를 바꾸는 수법은 아니다.”
사도명은 걸어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퍼지지 않도록 내공으로 막아두고 있기 때문에, 소리가 퍼져나갈 염려는 없었다.
“6년 전 검몽의 신분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때도 나는 전의 깨달음을 사용했다. 물론 지금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여, 기척이 들킬 위험이 많았지만.”
사도명은 무림맹 아홉 성 중의 중심인 십자대성의 안을 자신의 집처럼 걸었다.
비록 6년이 지났지만, 성내의 구조에 대해서는 익숙했다.
무림태자로 오를 뻔했던 그때에 비해, 성내의 구조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사도명이 향하는 곳은, 십자대성 안에서도 중심부인 통천로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3개의 가장 중요한 건물 중의 하나인 불심각은 무림맹의 부맹주에게 할당된 장소였다.
19성좌 중에서도 소림사는 남다른 지위를 점하고 있다.
백여 년 전 무림맹을 처음 결성할 때, 소림사는 자신들은 영원히 맹주의 지위에는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림사가 속세를 떠난 불문의 성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머지 18개의 성좌들은 소림사의 선언을 환영했다.
그러한 환영과 맹주 불출마의 선언을 대신하여, 소림사는 영구적으로 부맹주를 배출한다는 조건을 받아냈다.
소림사의 당대 주지가, 부맹주의 자리에 앉은 소림사 제자를 지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대의 부맹주는 소림사 주지의 사숙인 법허 대선사였다.
현재의 나이가 이미 일백을 넘어가는 그는, 과거 적마교의 혈겁이 일어났을 때 남다르게 뛰어난 활약을 보였었다.
10구의 혈강시 중 2구가 그의 손에 부서졌다.
뿐만 아니라 적마교의 마군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가 그의 손아래에 사라졌다.
혈겁이 끝난 후, 법허는 살생의 죄를 씻겠다며 면벽에 들었다.
일 갑자가 넘는 면벽 끝에 그는, 새롭게 소림사의 주지 위에 오른 사질 광덕의 부탁을 받고 무림맹의 부맹주의 직을 맡았다.
누구나 이름의 앞에 대선사라는 호칭을 붙이기를 망설이지 않는 무림의 큰 어른, 법허.
그는 또한 무림삼성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사도명이 향하는 불심각은, 바로 그러한 법허 대선사가 머무르는 장소였다.
멀리, 불심각의 모습이 보였다.
사모관을 쓰고, 코밑에 팔(八)자의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중년 사내가 불심각에서 걸어 나왔다.
불심각을 지키던 경비 무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인사했다.
사도명은 그를 알고 있다.
삼수서생 종심기.
무림맹의 기찰령주이기도 한 종심기는, 6년 전 사도명이 화운악을 이기고 검몽이 될 때 승패를 가려 준 심사관 세 명 중의 한 명이었다.
“외모는 여전하구려.”
사도명은 몸을 돌려서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조금 걸어간 후에,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종심기가 모퉁이를 돌아서 걸어오자, 사도명은 그의 옆을 스쳐 걸으며 중얼거렸다.
“죄송하오. 잠시 빌리겠소.”
모퉁이를 다시 도는 사도명의 몸과 얼굴이 흔들렸다.
‘전’을 이용해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했던 사도명이, 어느새 종심기의 모습으로 변해 불심각으로 걸어갔다.
떠났던 종심기가 곧바로 다시 오자, 경비 무사들은 놀랐다.
얼굴에 사마귀를 지닌 자가 종심기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어이해 다시 오십니까, 기찰령주님?”
“철추자를 깜빡했구나.”
추자는 호두를 뜻한다.
철로 만든 호두인 철추자는 종심기가 삼수서생이라 불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세 가지가 빼어나다는 삼수(三秀)의 의미 속에, 철호두를 사용하는 무공인 철추자공(鐵楸子功)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비 무사가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셨군요. 얼른 다녀오십시오, 기찰령주님.”
사도명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후, 불심각 안으로 들어갔다.
사도명은 종심기의 모습을 한 채로 복도를 걸었다.
그는 불심각의 구조를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략적인 전각의 모양과 업무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부맹주의 집무실이 있어야 할 위치 정도는 분석할 수 있었다.
노란색 무복을 걸친 무사 하나가 사도명을 보더니 포권했다.
무복의 재질이 비단이라, 단순한 신분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령주님. 어이해 다시 오셨습니까?”
“철추자를 부맹주님의 처소에 두고 온 것 같다.”
“예? 하지만 아까 오셨을 때는 대선사의 처소엔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헉!”
사도명의 손이 기이하게 움직이며 무사의 멱살을 잡았다.
“왜 이러십니까, 령주님?”
“너는 누구냐?”
“저, 저를 모르신단 말입니까?”
무사가 신음했다.
“조금 전, 나가시기 전까지 저와 계속 불심전의 경계망을 둘러보시지 않았습니까?”
“부맹주님의 명에 의해 펼쳐진 일급 경계령. 그럼에도 맹의 중심으로 숨어 들어온 적이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오늘 받았다.”
사도명의 눈이 이글거렸다.
“놈들은 매우 정교한 면구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얼굴은 모방할 수 있지만 머릿속의 기억까지는 모방하지 못할 터. 너의 이름은? 맡은 임무는?”
“청성파 출신의 양시호입니다. 불심각의 경계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에 대한 의심을 푸시겠습니까?”
사도명이 멱살을 놓았다.
양시호가 아픈 목을 매만지며 웃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추천 주셨던 기찰령주님께서 설마 저를 의심하실 줄… 아!”
중얼거리다가 다른 가능성을 떠올린 양시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허리의 검을 재빨리 뽑으며 소리쳤다.
“만약 아니라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확인해야겠습니다.”
양시호의 검이 사도명의 목을 겨눴다.
“령주께서 제게 경계의 강화를 명하시면서 특별이 덧붙이신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사도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당연히 사도명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몰래 덧붙였다면, 당연히 매우 중요한 내용이겠군.”
양시호의 안색이 변했다.
단지 겨누기만 했던 검을 힘껏 앞으로 밀어내며 그가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검을 피하느라 사도명의 제 사해 ‘전’이 깨어졌다.
본래의 모습으로 양시호가 내쏜 검을 피한 사도명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그의 뒤로 돌아갔다.
“짧게 겪었을 뿐이지만, 종심기는 공평무사한 사람이었다.”
사실이었다.
6년 전의 천하비무대회에서 사도명에게 보여준 종심기의 모습은, 적어도 그랬었다.
사도명이 화운악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건만, 승패를 논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화운악의 손을 들어주려는 이가 많았다.
그때 그 모든 시도와 압력을 무시하고, 승패를 공정히 논했던 이가 바로 종심기였다.
사도명은 자신의 너무 빠른 대응에 놀라는 양시호의 혈도 두 군데를 거의 동시에 짚었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