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5화 (15/168)

015화. 화왕 소빙유

은교교는 한참 동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기만 했다.

이곳에서 이 사람을 만날 줄을, 은교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꽃향기가 풍겨왔다.

이 사람이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건 상관없이 향기가 넘친다.

그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너는 사부를 보고도 인사하지 않을 참이냐?”

“…사부!”

은교교는 계속 화왕 소빙유를 보던 시선을 내리고, 양손을 모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소빙유는 은교교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맹주의 의자에 앉았다.

봉과 황이 수놓아진 의자는, 봉황상이라 불리며 오직 무림맹주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맹주는 어디 계신가요?”

“어디에 있을 것 같으냐?”

은교교의 물음에 되물음으로 답하며, 소빙유가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일어난 진기가 허공을 격하여 찻잔을 잡았다.

허공을 둥실둥실 날아온 차를 맨손으로 받아 마시면서, 소빙유는 빙그레 웃었다.

“용정은 언제나 좋다. 아침마다 이걸 받아 마시면서도 첫 모금을 머금을 때는 늘 행복해.”

은교교는 소빙유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 되셨나요?”

“조금 되었지.”

소빙유는 찻잔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 모두 비웠다.

찻잔을 다시 은교교가 든 쟁반 위로 놓으며, 그녀는 웃었다.

“널더러 천라옥벽을 찾아오라 말했던 그 명령서 말인데, 그것도 이 사부가 직접 수결했구나.”

은교교는 맹주의 친서를 받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친서에는 맹주 자신과 현 무림태자인 화운악이 중독되었으며, 중독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라옥벽 뿐이라고 쓰여 있었다.

삼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 천라대제가 남긴 기보.

환우구대기보 중의 하나인 천라옥벽을 찾아 강호로 나가 달라는 것이 친서의 주 내용이었다.

“맹주와 무림태자를 중독 시켰다는 절대독고. 순찰당고 집법당의 조사로는, 주방장이 흉수였다는데 그것도 거짓이었나요?”

“그건 사실이다. 이 사부가 직접 조사했거든.”

소빙유가 빙그레 웃었다.

“다만 거짓이 아니라 일부의 사실을 숨긴, 부실한 것이었을 뿐.”

“주방장에서 절대독고를 넣으라고 지시하고, 목적을 이루자 그 자를 죽인 사람 또한 사부였다는 … 그런 거예요?”

은교교는 설마 그럴까 하면서 힘겹게 물었다.

소빙유가 웃었다.

“뭐, 아주 많은 사연이 있지만, 지금 굳이 말해 뭐하겠느냐?”

“대체 왜 이런 짓을 하시는 건가요? 사부는 무림맹의 호법이세요.”

“동심결 서열이 6위지.”

소빙유는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섯 명의 공동 결주를 제외하면, 이 사부가 가장 높단다. 동심결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나의 손을 거쳐 허락된다.”

“이런 분이 아니셨잖아요?”

“호호호. 사람은 참으로 오만하단다. 한 치의 속도 모르면서 조금 친하면 상대방을 속속들이 아는 듯 행동하거든.”

소빙유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계속 웃었다.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었다.”

소빙유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는 여전했다.

화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으나, 은교교는 문득 그 화향 사이에 스며 있는 악취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말했다.

“제가 왜 천라옥벽을 찾아오란 명령을 내리신 거죠?”

“너를 오래 길렀다. 나는 네가 천라옥벽을 찾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은교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절 해치게 되는 일은 싫으셨군요, 사부?”

“널 멀리 떠나보내면,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천라옥벽이 진짜 나타날 줄이야. 공교롭게도 약초꾼의 마을에서 갑자기 발견될 줄이야.”

소빙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들이 어쩜 이토록 공교로울까?”

“하늘의 안배도 결국 사람의 최선이니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새로운 운명을 만들죠.”

은교교의 말에 소빙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냐?”

“제가 아는 사람이 해 준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이 하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라는 형태를 빌어 천하에 의로움을 구현한다는 뜻이라고 믿고 싶어요.”

소빙유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한참동안 은교교를 보았다.

“우리 동심결은 이미 무림맹의 상층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보다시피 여기에도 내가 있잖느냐?”

소빙유는 주변을 가리켰다.

은교교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도 중요하지만 몸은 더욱 중요해요.”

“그리 생각하느냐?”

“맹의 몸을 이루는 일반의 무사들까지 장악했다면, 동심결이 굳이 이런 수까지 사용하면서, 설청산 맹주가 아직 무사한 척 가장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영리하구나.”

“영리하게 키워주셨음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소빙유가 몸을 일으켰다.

“따라 오너라.”

“어디로 가시죠?”

“보여줄 사람이 있다.”

소빙유는 집무실의 뒤로 갔다.

그녀는 막혀 있는 벽의 이곳저곳을 빠른 속도로 짚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잘 키워주셨다 말했어요.”

그그그그-그그긍!

어디선가 낮은 기계음이 들리더니, 집무실 뒤쪽의 벽의 한쪽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림맹이나 설청산이 아닌 나에 대한 충신으로 키웠어야 했다, 라는 뜻이다. 교교야.”

“그런 거라면, 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은교교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랬더라면 지금 느끼는 갈등은 없었을 테니까.

대의와 충심을 알지 못하도록 키웠더라면, 은교교는 무림맹의 특별순찰이 아니라 동심맹 서열 6위의 제자로 여기에 있을지 몰랐다.

소빙유는 열린 벽으로 먼저 들어갔다.

은교교는 그 뒤를 따랐다.

벽속 통로는 길지 않았다.

은교교는 얼마 걷지 않아, 작은 석실에 도착했다.

소빙유의 앞쪽에서 침상 두 개를 보았다.

각각의 침상에 한 사람씩 누워 있었다.

검은 수염이 탐스런, 누워서 눈을 감고 있음에도 막강한 패기를 줄줄이 흘리는 사내.

그리고 깎은 듯이 준수한 얼굴에, 역시 누워 있음에도 강한 기세가 어려 있는 청년

은교교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설청산 맹주님! 화운악!”

“그래, 맹주와 무림태자가 모두 절대독고에 당했다는 소문은, 보다시피 결코 거짓이 아니야.”

소빙유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다가가서 설청산의 손을 잡았다.

은교교는 사부가 보여준 뜻밖의 행동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교교야. 동심결의 수석결주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왜 그의 제안을 선뜻 수락했을지, 짐작할 수 있겠느냐?”

은교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 소빙유의 손만 보았다.

혼절해 있는 설청산을 잡은 소빙유의 손이, 남모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은교교는 판단했다.

소빙유는 제자의 의중을 짐작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 사부는 젊었을 때 제법 아름다웠다. 나를 좋다하여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무척 많았어.”

“사부는 지금도 아름다우세요. 진심입니다.”

“고맙구나. 나 역시 너를 키우면서 늘 어여쁘다 생각했었지.”

“아!”

은교교는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하여 탄성을 뱉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달려가 소빙유의 품에 안길 뻔했다.

가까스로 충동을 참고 있는 은교교를 보면서, 소빙유가 말을 이었다.

“그중의 두 남자는 숫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날 좋아해줬단다. 하지만 이 사부의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차지 않았다.”

“그랬군요.”

“하지만 어느 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 명의 남자 때문에.”

소빙유의 눈빛이 오랜 추억으로 물들며 아련해졌다.

“나를 첫눈에 반하게 만든 사내. 하지만 그 사내의 눈빛이 향하는 곳은 내가 아니더구나.”

은교교의 눈빛도 흔들렸다.

소빙유가 소중하게 잡고 있는 손은, 그녀가 반했던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설청산 맹주에게,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던 다른 여인이 있었다는 뜻입니까?”

“그래. 있다. 하더구나. 설청산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 내게는 할 일이 많소.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들어본다면, 놀라서 혼이 나갈 사람이 세상에 많을 거요.

- 나는 그 모든 일들을 이 버릴 수도 있소. 아니, 솔직히 버리려 하오. 하지만 단 하나, 절대로 버릴 수 없는 화인(火印) 하나가 심장에 새겨져 있다오.

“짝사랑하던 사내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장이 어땠을지, 교교야. 짐작을 할 수 있겠느냐?”

“…아프셨을 거예요. 사부는, 더 없이 아프셨을 겁니다.”

“너무 아팠지. 하도 아파서,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이 남자를 없애겠노라 결심했다.”

소빙유가 힘없이 웃었다.

“한데 눈앞에 계속 보이는데 어찌 마음속의 남자만 먼저 없앨까? 사부는 어쩔 수 없이 결심을 했구나. 현실의 설청산도 죽여야 하는 거라고 결론 내렸지.”

깊은 사랑은 슬프다.

은교교의 모친도 깊은 사랑을 했고, 그래서 평생 슬퍼하면서 살았다. 은교교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내 운명에 아파하지 말거라. 세상에는 슬픈 사랑조차 응답받지 못하여, 스스로를 부수고 남을 부수려는 사람이 또한 많다.

“설청산 맹주 가슴의 화인, 사부를 외면하고 평생 사랑했다는 여인은… 누구인가요?”

“한 마디의 말을 들었다. 달빛 아래에서 비록 하룻밤이나 평생이 아깝지 않을 정을 쌓았다는 말을 듣고 말았지.”

“아!”

은교교가 탄식했다.

고개 숙인 소빙유의 뺨을 타고 뚝뚝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러니 내가 원망할 밖에. 죽이고 싶을 밖에. 나쁜 사람.”

은교교도 같이 울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막고, 슬프게 더 없이 아프도록 오래 울었다.

“흑흑. 흑흑흑.”

이윽고 눈물을 그친 은교교가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소빙유를 보았다.

“맹에는 대체 동심결의 사람이 얼마나 있는 겁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궁금한 게냐?”

“부맹주이신 법허 선사가 동심결의 결주인 것이 맞죠?”

소빙유가 은교교를 물끄러미 보더니, 결국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끝내 싸울 생각이구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동심결의 비밀을 염탐하는 이유는 그래서냐?”

“…저를 무림맹의 특별순찰이 되도록 만드신 분은 사부십니다.”

소빙유가 설청산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양손을 가슴 앞에서 하나로 합쳤다가 다시 열었다.

“자신 있느냐?”

“불의와 싸우려는 의지에 대해 묻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너의 모든 무공은 내가 가르친 것이다.”

“불의에 대항해 싸우려는 지금의 결의와 의기 또한 사부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감히!”

투둑! 투두두두둑!

사방의 벽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벽을 이루고 있는 돌의 틈 사이를 뚫고, 꿈틀거리는 식물의 줄기가 빠르게 자라나왔다.

덩쿨처럼 생겨 꿈틀거리는 줄기는 흡사 살아 있는 생명체 마냥 바닥을 이동했다.

은교교가 신음했다.

“…저주혈화공!”

요사스런 무공의 이름처럼, 줄기의 마디마다 붉은 핏빛의 꽃송이가 맺혔다.

“이 사부의 무공! 이름을 아는 만큼 그 위력도 알 터. 내 손으로 길렀던 너의 삶이었으니, 이 사부가 친히 거두마.”

붉은 꽃송이가 은교교의 사방에서 그녀를 덮쳐왔다.

무섭게 자라난 덩굴과 꽃이 없는 곳은 오직 한 곳, 소빙유의 뒤쪽 두 개의 침상 위뿐이었다.

은교교는 무림삼미 중의 하나로, 소빙유로부터 푸른 서릿발과 같은 검술을 배웠다.

청상검은 소빙유가 은교교에게 스무 번째 생일에 직접 선물로 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청상검마저 은교교의 손에 없다.

제자로 가르쳐, 은교교가 지닌 무공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소빙유!

은교교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본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양손에 검이라곤 없었는데도, 갑자기 은교교의 몸을 감싸며 차갑기 그지없는 검기가 폭발하듯 일어났던 것이다.

콰아아-!

“무, 무슨? 검이 없는데 검기를 쓴다고?”

검기는 무서운 속도와 놀라운 기세로 소빙유가 만들어 낸 혈화와 덩굴을 베기 시작했다.

츠카카카카카칵!

덩굴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자신을 베는 검기를 피해 뒤로 연이어 물러났다.

거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소용없어요, 사부.”

은교교가 그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소리쳤다.

“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이 아니라 점과 점으로 공격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로 집중하여 흩어짐이 없습니다.”

소빙유는 은교교의 검기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제자에게 마음으로 일으키는 검공에 대해 말했던 적이 없었다.

“사도명이냐? 대체 불과 며칠 만에 널 이렇게 바꿀 재주가 그놈에게 있단 말이냐?”

“제 질문부터 먼저 대답하세요. 저는 부맹주인 법허 대선사가 동심결의 결주인지를 물었어요.”

은교교는 소빙유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난데없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그 대답은 내가 하지.

“헉!”

은교교는 발작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했다.

침상에 누워 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

그가 벌떡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은교교를 향해 한 줄기의 권풍을 내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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