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최선의 의미
“솔직히 말해 줄까?”
사도명이 청상검에 묻은 피를 떨쳐낸 후, 검집에 넣었다.
“웃지만 않았더라면, 굳이 손목까지 자를 생각은 없었다.”
“그, 그 말은 나를 살려주겠다는 의미냐?”
탁호강이 손목이 잘려나간 고통도 잊은 채 사도명을 보았다.
“그 말은, 내게 살려주는 조건을 협상하고 싶단 의미로 들리는데.”
“사, 살려 준다면 나는 굳이 너의 정체를 동심결에 밝히지 않겠다. 약속할 테니 살려다오.”
“아니, 그 반대다.”
사도명은 검집에 넣은 채로, 청상검을 은교교에게 돌려주었다.
“반대라고?”
“마음껏 알려라. 사라졌던 검몽 사도명이 천라옥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그, 그런….”
“지금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나는 살려준다는 말을 취소할 생각이다.”
“으으. 바, 반드시 복수하겠다.”
탁호강은 으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면서, 몸을 날렸다.
피가 흐르는 오른 손목을 잡고, 전력으로 달리다가, 어디선가 나타난 수많은 새 떼들을 타고 날아갔다.
“타고난 능력은 저런 상태라도 쓸 수 있는 모양이군.”
사도명은 여전히 핏기가 없는 은교교를 보며 물었다.
“괜찮소?”
“솔직히 괜찮지 않아요. 괜찮을 리가 없지요.”
그녀는 지금 막 자신의 사부마저 무림맹의 배신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제가 동심맹의 특별순찰이 된 건 사부의 명을 받고서였어요. 사부께서 말씀하셨죠. 낙수의 맹세에 따라 무림맹에 충성해라.”
“…그랬었소?”
“전 이제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도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소.”
“사부의 명령을 받들자면, 모순되게도 사부와 싸워야 해요. 천라옥벽을 가져가면, 사부는 어떤 얼굴을 할까요?”
“그 일 말고, 이곳의 일. 날이 밝아오고 있으니 곧 철검산장 무사들이 깨어날 거요.”
사도명이 은교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이 왕유 장주로부터 부탁받은 일! 어찌할 거요?”
“아!”
왕유는 죽기 전에, 철검산장의 일을 은교교에게 부탁했었다.
동심결은 철검산장의 장주와 그 아들을 해쳤다.
철검산장의 일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그 동심결에 복수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군요. 저는 철검산장이 당한 일을 갚아주어야 해요.”
은교교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맹주님을 뵈어야만 해요.”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설청산밖에 없겠구려.”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장의 무사들이 깨어나기 전에 떠납시다. 아 참! 그 전에 한 가지 일을 해야겠소.”
“어떤 일요?”
사도명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펴서 들었다.
“닷새 정도면 어떻소? 적당할 것 같은데! 그날이 마침 보름이니, 보름까지 간다고 말합시다.”
**
철검산장은 무림맹의 지부다.
무림맹은 비상시에 날릴 수 있는 전서구 수십 마리를 길러, 각 지부에 나눠주고 있었다.
사도명과 은교교는 산장을 떠나기 전에 철검산장에 있는 전서구를 모두 날렸다.
전서구들이 발목에 매달고 있는 내용은 동일했다.
<천라옥벽을 갖고 보름에 도착합니다. 특별순찰 은령선자.>
“정말 닷새 안에 본성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은교교가 사도명에게 물었다.
“맹주는 그 날까지 중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실 수 있을까요?”
산속, 빈터에서 간단한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회복한 후였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묻는 것이 아니오.”
“묻는 것이 아니란 뜻은?”
“동심결에는 이미 칠마에 팔왕이 포함되어 있소. 무림맹의 내부에 얼마나 배신자가 더 있는지, 우리로선 알 수가 없지.”
사도명은 간단한 운기조식만으로 피곤을 모두 날리고 말했다.
“때문에 그 날까지 가능해서 기한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오. 일단 정한 후에 그것이 가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요.”
“아!”
은교교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설청산 맹주는 맹주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군요.”
“그걸 최선이라 부르지.”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최선의 결과란 개개인의 최선이 더해져서 만들어지오.”
“알겠어요. 그럼 닷새라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야만 하겠네요.”
“그것 또한 틀렸소.”
“틀렸다니요?”
“닷새가 아니라 나흘 안에 무림맹에 도착해야 하니까.”
사도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탁호강을 놓아줬으니 하늘의 매란 매는 모두 전서구를 잡으러 날 뛸 것 아니겠소.”
“아. 그럼 전서구는 혹시?”
“맞소.”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동심결이 우리가 닷새 후 보름날 무림맹에 도착하는 것으로 알게 만들려는 거요. 우리를 막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걸 동원하겠지.”
“처음부터 탁호강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건가요?”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호강의 능력을 듣고 생각을 해냈소. 탁호강이 있어야 매가 날고, 매가 날아야 전서구를 낚아채 갈 테니까.”
“하지만 탁호강을 살려두면, 당신도 알려지잖아요.”
은교교가 외쳤다.
“천라옥벽을 당신이 갖고 있다는 걸 알면, 동심결은 앞으로 내가 아니라 당신을 노리… 아!”
은교교는 비로소 사도명의 의중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이, 이걸 노리고 그런 건예요? 날 보호하려고, 일부러 당신을 노리게 만든 건가요?”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를 지키기보단, 나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 편하지.”
은교교가 다가와서 사도명의 손을 잡았다.
떨리는 눈빛으로 사도명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도대체 왜죠? 저는 그저 처음 보는 사람일 뿐인데,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나요?”
“그러게 말이오. 잘 해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잘 해주고는 싶군. 하지만 그 이유는 도통 모르겠군.”
모른다 말했지만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은교교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맹에 돌아가면 반드시,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어요.”
사도명은 빙그레 웃었다.
“어떤 종류의 약속 말이오?”
“알려드릴 수 없어요. 제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이니까.”
“나 또한 무림맹까지 당신을 데려다 주겠노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소.”
“나흘 안에 무림맹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해요. 당신은 이미 제게 신법의 가르침을 주셨어요. 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어요.”
은교교가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사도명의 손을, 놀라서 놓으면서 말했다.
“그, 그러니까 우리는 산을 벗어나 관도로 접어드는 즉시 더욱더 빠르게 달리도록 해요.”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산을 벗어나지 않을 거요.”
“무슨 뜻이지요?”
“산속,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갈 생각이오.”
사도명이 수풀로 우거진 한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곳 말이오.”
사도명이 가리킨 곳은 날이 밝았음에도 매우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오히려 어두워 보였다.
은교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곳이 어딘데요?”
은교교가 놓은 손을 다시 잡으면서 사도명이 웃었다.
“우리가 나흘 안에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장소.”
**
해가 솟아올랐다가 다시 서쪽으로 뉘엿해졌다.
산의 수풀을 헤치고,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운, 네 개의 다리가 나타났다.
산왕이라 불리는 호랑이.
놀랍게도 호랑이의 등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탁호강과 똑같이 닮은 사람.
하지만 단지 닮았을 뿐, 풍기는 분위기는 탁호강과 전혀 달랐다.
수왕 탁호천.
그의 허리는 꼿꼿했고, 호랑이를 타고 있으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크르르!”
호랑이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수염을 떨었다.
탁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이냐?”
탁호천이 보는 수풀은, 주변과 달리 유난히 무성해 더욱 깊고 어두워 보이는 곳이었다.
“크르르르!”
호링이가 다시 한번 울었다.
탁호천은 자신과 호랑이가 지나온 뒤를 돌아보았다.
“저곳이라는군요.”
그가 보는 방향에서, 탁호천과 닮은 사람 한 명이 걸어왔다.
간밤에 잘린 오른 손목을 붕대로 감싸고 있는, 탁호강이었다.
“그, 그런가, 아우? 나의 새들도 그곳으로 사도명과 은교교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네.”
탁호강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도명. 그 망할 놈과 은교교가 왜 한시라도 서둘러 무림맹으로 가지 않고 이 산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군.”
탁호강의 손에는 몇 장의 전서가 쥐어져 있었다.
전서구의 발에 묶였던 것을 풀어낸 것이었다.
“모든 전서의 내용이 똑같아. 보름에 도착. 그 약속을 지키려면 서둘러야 할 텐데 말이지.”
탁호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호랑이가 보았던 어두운 수풀을 보기만 했다.
탁호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네, 아우. 내가 살펴보지. 내가 살펴야지, 하핫.”
탁호강은 마른침을 한 차례 꿀꺽 삼킨 후에 유난히 어두운 수풀을 향해 걸어갔다.
“사도명은 나, 나를 죽일 수 있음에도 살려 뒀네.”
탁호강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입을 쉬지 않았다.
“내 뒤에 있는 아우님을 두려워한 것이 틀림없어. 하핫.”
탁호강은 조심스레 수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뒤에서 탁호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자세히 보니 탁호천은 호랑이 등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호랑이의 등보다 약간 높은 허공에 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탁만 없었다면, 나는 형님을 평생 보지 않고 살았을 겁니다.”
“하핫. 나, 나는 아우님을 무척 좋아하는데.”
탁호강은 억지로 웃었다.
“아우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팔왕에 속하여 무림맹의 호법이 되지 못했을 것이네.”
“그 편이 나았을 수 있죠.”
탁호천이 소리쳤다.
“그랬더라면, 내가 그녀를 잃지도 않았을 테고, 동심결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녀를 잃었던 일은-!”
탁호강이 지금까지의 조심스럽던 태도를 버리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우가 모르는 일이 세상에는 많네. 그녀에 대한 일은… 나,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저 또한 진실이 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안다면… 아!”
탁호강이 탄성을 뱉었다.
수풀 뒤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동굴이군요.”
탁호천이 다가와, 검에 뚫린 구멍을 보며 말했다.
탁호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동굴이 아냐. 저 아래에서 들리는 물소리. 이건 지하 수로와 연결된 동굴 같군.”
동굴의 입구는 매우 좁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여서, 탁호천과 탁호강은 한 명씩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점점 넓어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걸어갈 수 있는 넓이로 변했다.
그리고 탁호강의 예측대로, 지하수로가 나타났다.
“그 옛날, 검몽 사도명이 사라졌을 때 추적대가 그를 놓친 이유를 오늘에야 알겠습니다.”
탁호천이 신음했다.
“옷을 바꿔 입은 나무꾼. 지하수로. 세상의 모든 일에는 우연이 없고 단지 필연만이 있을 뿐임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군요.”
지하수로는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사도명과 은교교가 어떤 길로 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입구가 좁아 호랑이를 데려오지 못했으니 냄새를 맡는 방법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호아(虎兒)가 있었어도 물 냄새 때문에 아마! 아무튼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탁호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변에 깔아놓은 동심결의 포위망은 이미 소용이 없습니다. 녀석들은 포위망을 벗어났어요.”
탁호강이 품속에서 전서를 꺼내 다시 한 번 읽었다.
“닷새 후 보름. 무림맹 인근에 또다시 포위망을 만들어야겠군.”
“또다시… 입니까?”
“미안하네, 아우!”
“그만 말하세요. 남은 왼쪽 손목마저 내가 벨지 모릅니다.”
“저, 정말로 미안….”
“그만 말하란 말입니다-!”
지하수로를 타고 형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도명과 은교교는 이미 지하수로의 빠른 흐름을 타고 예측할 수 없는 장소까지 이동한 후였다.
**
지하수로를 벗어나, 넓디넓은 벌판으로 나온 은교교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저런 지하수로는 누가 만들었나요? 어떻게 발견한 거죠? 빠른 지하수로에 배까지 만들어 놓은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꽤나 옛날에 선견지명이 있는 영웅, 이라고 해 둡시다.”
사도명은 적당히 대답한 후 서남 방향을 가리켰다.
“무림맹은 저기요. 서둘러야 하오. 나흘은 긴 시간이 아니오.”
“하지만 지하수로 덕분에 먼 거리를 이득 봤잖아요.”
“언제나 뜻밖의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서둘러서 나쁠 건 없소. 너무 이른 건 언제나 너무 늦는 것보다 나으니까.”
사도명의 말이 옳았다.
빠르면 뜻밖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만, 늦으면 그러한 대처는 불가능하다.
“하긴, 그렇네요.”
사도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이미 매우 큰 문제까지 생겼소.”
“어떤 문제 말인가요?”
은교교가 묻자, 사도명이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앞쪽 먼 거리의 마을을 가리켰다.
“벌써 저녁때가 되었소.”
“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주지 않는다면, 내 뱃속은 곧바로 전쟁터가 될 것 같단 뜻이오.”
은교교는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곱게 눈을 흘겼다.
“큰일은 이미 났을걸요.”
“응?”
“계속 그런 식의 농담을 하고 있으니 하도 미워서, 비록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워도, 반드시 내 손으로 큰일을 벌일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