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살려다오
“허, 허공섭물이라고요? 아아! 대체 거리가 얼마인데….”
은교교가 반사적으로 청상검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외쳤다. 차가운 검이 은교교에게는 오히려 따스하게 느꼈다.
사도명의 손바닥이 은교교의 등에 닿았다.
“마음을 선이 아니라 점에 두면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지. 집중하여, 흩어짐이 없게 하는 거요.”
은교교는 자신의 등에 닿은 사도명의 손바닥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 들어옴을 느꼈다.
“내가 전하는 힘에 당신의 힘을 더하시오. 힘이 흐르는 길을 나의 의지에 맡기고 관찰하시오.”
사도명이 주입해 주는 기운이 가리키는 방향은 몸의 내부가 아니었다.
빽빽하게 주변을 메우고 있는 다양한 날짐승도 결코 아니었다.
왼쪽의 벽 너머에 존재하는, 먼 거리의 한 점!
은교교는 사도명의 내공이 전하는 기운을 빌어, 그 점의 정체를 느낄 수가 있었다.
“금왕 탁호강. 맞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선이 아니라 점이오.]
사도명의 전음이 은교교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한 점을 노리되 선은 잊어야 하오. 일체의 낭비가 없는 집중.]
은교교는 청상검을 쥔 자신의 오른손이, 저절로 들림을 느꼈다.
‘선이 아닌 점! 점!’
왼쪽 벽 너머의 한 방향을 겨냥하는 그녀의 손은, 사도명의 의지이면서 동시에 그녀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다.
마음을 선의 끝, 한 점에 집중하자, 군더더기가 사라졌다.
위험을 눈치챈 새들이 은교교의 청상검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일제히 몰려들었다.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 공격을 막으려는 새들의 움직임은, 분명히 본능이 아닌 탁호강의 조종에 의한 것일 터였다.
“소용없어, 탁호강.”
사도명과 은교교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음성이 터졌다.
그리고 청상검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인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발사되었다.
쿠와-앙!
“은교교! 네가 감히!”
탁호강의 놀람에 가득 찬 음성이 멀리에서 들려올 때, 한기를 두른 청상검은 이미 은교교의 손을 떠나 허공을 달리는 중이었다.
콰-앙!
벽을 뚫는 폭음!
청상검은 새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더욱 빨리 날았다.
새들은 검이 지나간 후에야 그 궤적을 헛되게 메우기에 바빴다.
벽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에서 가느다란 실금들이 사방으로 슬금슬금 뻗었다.
쩌적! 쩌저적!
이윽고 군데군데 갈라진 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르르!
그 벽 너머, 까마득한 거리에 서 있는 한 사람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매우 멀어서 안력을 키워야 볼 수 있는 거리에 서 있는 사람!
탁호강은 부들부들 쉴 새 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모든 새들이 날갯짓을 멈췄다.
갖가지 새들의 갖가지 깃털들이 어둠 속에서 떨어져 내렸다.
지금까지 정신을 잃고 있던 황금빛 목털의 매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안 돼!”
매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사도명이 은교교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당신이 알고 있는, 금왕 탁호강이 맞소?”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눈부신 은발이었다.
마찬가지로 은색인 수염이 턱 아래에서 자라, 아래까지 늘어지고 있었다.
“맞아요.”
은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시다. 되찾아와야 하는 것이 있고, 해야 할 얘기도 몇 가지 있을 테니까.”
사도명이 먼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은교교도 그의 뒤를 따라서 서둘러 걸었다.
금왕 탁호강은 사도명과 은교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으드득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교교야. 네가 설마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구나.”
“휴우. 저 역시도 금왕 노선배가 동심결에 속할 줄은 몰랐어요.”
은교교가 탁호강의 앞에 섰다.
비록 배신자지만, 탁호강은 은교교에게 있어 사부의 오랜 친우기도 했다.
그녀는 탁호강이 청상검을 쥐고 몸을 떠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금왕의 가슴에는 은교교가 던진 청상검이 박혀 있었다.
얕아서 치명적이지는 않았으나, 그 사실은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은교교가 일초에 탁호강을 제압했다는 사실이었다.
탁호강은 까마귀가 건네는 나무 상자를 받으려다가, 청상검의 공격을 받았다.
탁호강은 응조공의 수법으로 청상검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청상검에 남아 있는 기세는 무섭도록 강력했다.
우우-우우웅!
청상검이 계속 울었다.
허공에서 자신을 잡아, 심장을 뚫지 못하도록 세운 탁호강의 두 손! 검은 그 손을 원망했다.
지금이라도 탁호강이 두 손을 내리면, 청상검은 남아 있는 자신의 여력을 이용해 당장이라도 탁호강의 가슴을 파고들 것이다.
“아직은 진정한 내 실력이 아니에요. 하지만 언젠가는 이 힘이 나의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탁호강은 청상검을 붙잡은 두 손을 가늘게 떨면서, 은교교의 뒤에 서 있는 사도명을 보았다.
“대체 뭐하는 놈이냐? 뭐하는 놈이기에 은교교를 순식간에 이런 고수로 만드느냐? 거, 거리가 멀지 않았더라면, 검이 내 가슴을 뚫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틀렸어.”
사도명은 어느새 탁호강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탁호강은 사도명이 자신의 앞까지 움직여온 신법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트, 틀렸다고?”
“한 점에 모인다면, 눈앞과 천 리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무, 무슨 소리냐? 어찌 눈앞과 천 리가 같을 수 있느냐?”
“흩어지지 않는다면 시작에 있는 것이 끝에도 있게 된다.”
사도명은 허리를 굽혀 금왕이 떨어뜨린 나무 상자를 주웠다.
“내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면, 탁호강. 당신에게는 더 이상 질문할 자격이 없는 셈.”
내용물을 확인한 후에, 사도명은 상자를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상자를 달라고 손을 내밀며 서 있던 은교교는, 사도명이 상자를 주지 않자 이마를 찌푸렸다.
“왜 주지 않나요?”
사도명은 아직도 검명을 토해내고 있는 청상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당신이 하도 자주 마음을 바꾸기에.”
“무슨 뜻이죠?”
“상자는 무림맹에 도착하면, 즉시 돌려주겠소.”
“아!”
은교교는 사도명의 뜻을 알아듣고 감동했다.
무조건 무림맹까지 동행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사도명은 청상검을 옆으로 비틀면서 뽑았다.
힘을 주어 검을 잡고 있던 탁호강이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입고 비명을 질렀다.
“끄으! 지금의 내 손가락은 쇠보다 더욱 단단한데.”
“철갑수의 공력은 단단하지만 질기지는 못하지.”
사도명이, 탁호강의 손바닥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실력이라면, 장담하는데 나와 싸울 생각은 잊고 처분만 기다리는 편이 옳다.”
“네, 네놈이 감히! 헉!”
탁호강을 고함을 지르다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사도명이 뒤로 뽑아냈던 청상검을 다시 돌려 탁호강의 턱을 곧바로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번에도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탁호강은 식은땀을 흘렸다.
사도명이 은교교에게 물었다.
“두 가지의 선택이 있소. 하나는 지금 죽이는 것. 둘은 그냥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
“그걸 왜 제게 물어요?”
“왕유 장주가 죽기 전에, 당신은 철검산장에 대한 모든 일의 결정권을 넘겨받았소.”
“아! 그 점은 그렇군요.”
은교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보이는 곳곳마다 철검산장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독인가요?”
탁호강이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독이다.”
“수왕 탁호천 역시 노선배처럼 동심결이란 뜻인가요?”
“흐흐흐. 내 뒤를 이어 여덟 번째 자리를 맡고 있지.”
탁호강은 날짐승을 부리는 재주를 타고났으며, 수왕 탁호천은 들짐승을 부리는 능력을 지녔다.
동물 중에는 독을 지닌 것이 많았고, 철검산장 무사들은 모두 그런 독에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 탁호천 님은 협객으로 존경할 수 있는 분이셨어요.”
“내 동생은 지금도, 또한 언제나 존경할 만한 녀석이다.”
은교교가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당신들은 철검산장 무사들을 죽였어요.”
“대체 누굴 죽였단 말이냐?”
탁호강은 미간을 찡그렸다.
“동심결은 무림맹을 갖고자 한다고 이미 말했다. 설마 우리가 문도가 모두 사라진 무림맹을 원할 거라 생각하느냐?”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독이지만 그저 잠이 든 것 정도요. 생명에 지장이 없소.”
은교교가 벽 너머를 가리켰다.
“하지만 왕유 장주의 부자는요? 호지사자들의 죽음은요?”
탁호강은 한숨을 쉬었다.
“풍마 장척기는 아직도 마두의 성품을 버리지 못했다.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 그렇지 않아도 이번의 일은, 모든 것이 끝난 후 엄중히 문책할 참이다.”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 후라고 했나요?”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지금의 일에, 나중은 나중의 일에 집중해야지.”
“그때에 문책을 할 사람은 호법이 아니라 제가 될 겁니다. 저는 동심결이라는 이름을 단 모두를 문책해 줄 생각이에요.”
“아서라.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천하의 상황은, 설령 천라대제가 되살아와도 되돌릴 수 없어.”
은교교가 다시 한 번 더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라대제가 아니오. 그러니까 당신은 안심해도 좋소.”
세상에는 스스로의 말에 특별한 힘을 부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언제나 믿을 수 있다.
은교교에게 있어 사도명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사도명의 말이 끝나자, 은교교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고 탁호강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네놈은 대체 누구기에, 감히 스스로를 천라대제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느냐?”
“사도명!”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너는 혹시… 혹시 그 죽었다는 검몽! 설마 그러하냐?”
“비무에서 우승했을 때, 먼발치에서 당신을 봤던 기억이 나오. 그때의 당신은 대협으로서의 풍모를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었는데.”
금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사도명을 보았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 외쳤다.
“죽었다는 네놈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네놈이 은교교를 돕는 일에서 대체 무슨 이득이 찾는 거냐?”
“이득을 찾지 않소. 나는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뭐?”
“어릴 때, 집 앞의 뜰에서 꽃을 보았소. 밤에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나는 걱정만 했을 뿐 방풍막을 만들어 주지 않았었소.”
사도명이 은교교를 힐끗 보고 난 후에 말을 이었다.
“다음 날 꽃은 바람에 모두 떨어지고 없었소. 새로운 꽃이 필 때까지, 나는 내내 후회했었소.”
탁호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타인을 걱정해 보지 않을 사람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요.”
“네놈은 동심결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지 못한다. 사소한 이유로 우리 동심결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모른다.”
“한 번 설명해 보시구려.”
“나를 죽이면 동료와 동생이 나선다. 다섯 명의 결주님들은, 내가 그 앞에 서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란 말이다.”
사도명은 은교교를 보았다.
“지금 들어보니 동심결은 매우 위험하며, 결주 또한 다섯 명이나 되오. 때문에 나는 금왕을 지금 죽이는 것이 타당하다 판단하오.”
은교교는 대꾸하지 않는데, 탁호강이 안색이 변해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적의 숫자가 많고 강하다면, 한 명이라도 미리 죽여 놓는 편이 적을 상대하기 수월하겠지.”
탁호강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이상 소리치지 못한 채로,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청상검을 바라보았다.
“우, 우리가 동심결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설명 들으면, 너, 너도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본래 남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오. 내가 동심결에 속하지 않는데, 동심결이 만들어진 이유를 굳이 들어 무엇하겠소?”
사도명이 청상검을 밀었다.
검의 끝이 탁호강의 목을 파고 들었다. 붉은 피가 흘렀다.
“사, 살려다오.”
탁호강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동심결에 대해 궁금한 점이 없느냐? 물어보면 무, 무엇이든 대답할 테니 제발 목숨은 살려다오.”
사도명은 다시 한 번 더 은교교를 보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경우가 많고 이름 높은 협객이 꺼풀을 벗겨보면 겁쟁이인 경우는 더더욱 많소. 당신은 혹시 이 자에게 물어볼 질문이 있소?”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묻고 싶은 질문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워서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은교교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당신은 그냥 금왕을 죽이세요. 당장 죽여서 무림맹 호법의 명예를 보호해 주세요.”
그 순간, 탁호강이 발작하듯이 고함을 질렀다.
“소, 소빙유도 나와 함께 동심결에 가입했다.”
은교교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라서 굳이 묻지 않았음에도, 탁호강이 대답부터 하고 만 것이다.
“아아!”
비틀거리는 은교교를 사도명이 부축했다.
탁호강이 그런 은교교를 보면서 웃었다.
“크흐흐. 그녀는 나의 앞 6이라는 숫자를 차지하고 있지. 오대결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야. 그러니까, 흐흐. 교교야. 네가 동심결과 싸우면 네 사부와도 싸워야 한다는… 크아악!”
사도명이 휘두르는 청상검의 빛이 탁호강의 오른손을 휘감았다.
잘려나간 탁호강의 오른쪽 팔목이 바닥에 떨어져서 펄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