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창천사해 두 번째, 출(出)
“너는 아직 왕유 장주와의 싸움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 않나?”
유흥경은 핏기 잃은 얼굴로 왼쪽 벽을 보았다.
뚫려 있는 구멍은 작지만 아주 매끈했다.
“이, 일부러 옆으로? …망할!”
유흥경은 상황을 깨닫고는, 발작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철부채의 폭발을 뚫고 왕유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폭발의 여파에 온몸이 불타고, 부채살의 파편에 살과 뼈가 관통당하는 것을 각오하고서, 왕유는 오히려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끄, 끝내 나를 왕유의 손에 죽게 만들겠단 거냐?”
유흥경은 고함을 지르며 왕유가 쏘는 철검을 막았다.
까가가가강!
손잡이만 남은 부채로 철검을 막아내면서, 유흥경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다친 몸으로 왕유가 날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풍마 장척기의 제자란 말이다.”
큰소리로 외치면서도, 유흥경은 감히 반격하지 못했다.
뒤로 몸을 돌려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왕유의 철검을 막으며 물러나기만 했다.
사도명은 여전히 검지를 앞으로 뻗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만 하면, 사도명이 또다시 지풍으로 검기를 내쏠 것이라고 유흥경은 생각했다.
사도명이 은교교를 보았다.
“이건 창천사해의 두 번째인 출(出). 마음속에 존재하는 검의 의지를 구결을 따라 한 줄기로 엮어서 쏘는 수법이오.”
“마음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검이 없는데도 검기가 만들어진단 건가요? 신기해요.”
은교교의 물음에 사도명은 빙그레 웃었다.
“검기란 본래 검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 검에 없는 것을 마음이 일으킨다면, 검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사도명의 말에 은교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긴 은교교를 내버려두고, 사도명은 시선을 다시 왕유와 유흥경 쪽으로 돌렸다.
왕유는 정신없이 몰아붙였고, 유흥경은 정신없이 물러났다.
철검을 쥔 왕유의 손아귀에 피가 흘렀고, 손잡이만 남은 철부채를 잡은 유흥경의 손도 피가 터졌다.
“머, 멈추라고 해 주시오. 달아나지 않겠소. 제발 왕 장주에게 멈추라고 말을… 아!”
유흥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왕유를 뒤로 물러나라고 흔든, 자신의 오른손이 왕유의 어깨에 그대로 명중했기 때문이었다.
유흥경에게는 좋은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왕유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깨를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왕유는 마침내 자신의 철검을 유흥경의 복부 깊이, 찔러 넣었다.
“크으-!”
왕유의 철검이 유흥경의 배를 뚫고 등으로 나왔다.
왕유의 파상공세에 지칠 대로 지친 유흥경이 더 이상 피해내지 못한 것이다.
“내, 내가…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게….”
입술을 푸들푸들 떠는 유흥경을 보며, 왕유가 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앞뒤로 쏟아지는 자신의 피를 보면서, 유흥경은 덜덜 떨었다.
“시, 싫어. 살려 줘.”
그의 눈에서 생명의 기색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었다.
“미, 믿을 수 없다. …동심결주가 말했는데. 내가 이긴다고, 위, 위험은 없을 거라고.”
유흥경이 사도명을 보았다.
“모, 모두 너 때문이다. 너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다. 너는 누구냐? 도대체 누구냐?”
사도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교교가 걸어와 유흥경의 품에서 나무 상자를 찾아서 꺼냈다.
그리고 유흥경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대답해 주었다.
“사도명. 자신의 명운을 스스로 이끈다는 뜻.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이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면 될 것이다, 유흥경.”
유흥경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 그래 봤자야! 동심결은 반드시 무림맹을 차지한다.”
“그래. 그래봤자겠구나. 동심결이 무림맹을 차지해 봤자, 그때 유흥경, 너는 죽고 없을 테니.”
“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는 건 없다. 한번 가라앉아도 언젠가는 다시 떠오른다.”
은교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유흥경의 말 속에,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흥경이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그의 호흡이 사라졌고, 심장도 완전히 뛰기를 멈추었다.
“휴우.”
은교교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에 왕유를 보았다.
“지혈해야 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장주님.”
왕유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오. 유흥경을 살려두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지혈부터….”
왕유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잖소?”
왕유는 자신의 아들 옆으로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앉은 채로, 죽은 아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소. 아내는 아들을 내게 선물하고 그만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지.”
그는 눈물을 흘렸지만, 더 이상 소리 내어 흐느끼지는 않았다.
왈칵 솟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은교교였다.
은교교가 고개를 돌렸다.
사도명이 다가와 그런 은교교의 어깨를 다독였다.
왕유가 고개를 들어 사도명과 은교교를 보았다.
“고맙습니다, 두 분.”
왕유의 눈 속에서 빛이 갑자기 강해졌다.
생명이 죽음을 맞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른다는 회광반조!
사도명은 은교교의 등을 다독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나는 장주와 유흥경의 싸움에 끼어들 수 있었소. 장주의 목숨을 구해줄 수도 있었단 의미요.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소.”
왕유가 웃었다.
“그러하셨기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만약 도와주었다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겠죠.”
자식의 복수도 스스로 하지 못한 삶을 누가 즐길 수 있을까?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쓰셨소.”
“남겨진 일이 많습니다. 그 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도명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던 은교교가, 어느새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돌렸다.
“염려 마세요. 제가 모든 힘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왕유가 눈을 감았다.
사도명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왕유의 심장 박동이 천천히 멈추었고 호흡 또한 사라졌다.
폭운선의 폭발은 강력했다.
맨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왕유가 입은 상처는 매우 깊었고, 이미 거의 모든 피를 밖으로 흘린 후였다.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도명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 오래 흔들렸다.
“당신의 선택을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오.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는 오직 자신만이 택할 수 있소.”
사도명이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 옷으로, 맨살보다 피가 훨씬 더 많이 보이는 왕유의 몸을 덮어 주었다.
“세상의 일 중,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오히려 매우 적은 편이라오.”
“답답하고 슬프네요.”
은교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가를 매만졌다.
그녀는 열려 있는 창을 보았다.
“좋은 사람은 죽어서야 비로소 서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인연이, 저승에서도 다시 이어질까요?”
“모르오. 하지만 분명 그러기를 바라오.”
사도명은 자신의 부모와 사부를 생각했다.
슬픈 마음이 절로 일어났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이었다.
부모님과 사부가 저승에서 다시 만나다면, 그들은 서로를 보며 화를 낼까, 혹은 웃을까?
어쩌면 영원히 눈물만을 흘릴지도 모를 것이다.
“굳이 진실을 알 수 없다면, 나는 왕유 장주가 지금 가족을 다시 만났다고 믿고 싶소.”
은교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푸드드득!
한 마리의 매가 열려 있는 창문으로 날아왔다.
매는 창문틀에 앉더니, 은교교와 사도명을 똑바로 보았다.
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유흥경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요.”
은교교의 말에 사도명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말하는 거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했던 말.”
“사실 사라지는 건 없지. 시간과 더불어 모두가 달라질 뿐.”
“한번 가라앉은 건 반드시 다시 떠오른다고도 말했어요.”
“한 사람의 마음에 숨은 사연은, 오직 본인만이 알 뿐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소.”
사도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유흥경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그 사연을 알 사람이 본인 외에 더 있다면, 그건 이 모든 계략의 당사자겠지.”
동심결이 노리는 대상은 무림맹이며, 또한 현재의 무림맹주인 설청산이었다.
“설청산 맹주가 숨은 사연을 알 거라는 뜻인가요?”
“그 외에 누가 있겠소?”
“그렇다면 저는 숨겨진 사연을 알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빨리 무림맹으로 가야하겠네요.”
은교교는 나무 상자를 품에 갈무리한 후에,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갑자기 무슨 인사요?”
“헤어져야죠.”
“헤어진다고?”
“약속은 이곳 철검산장까지였잖아요? 당신은 약속을 지켰어요. 지금부터는 혼자 가겠습니다.”
은교교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다가, 놀라서 멈추었다.
어느새 앞으로 돌아온 사도명이 은교교의 앞을 막았기 때문이다.
“왜 앞을 막죠?”
사도명이 은교교를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못 당하겠군, 정말.”
“무슨 뜻이에요?”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당신은 이미 철검산장에 동심결의 입김이 스며들었음을 짐작하고 있었을 거요.”
은교교는 부인하지 않았다.
“맞아요. 천라옥벽의 일은 무림맹에 매우 중요함에도, 철검산장이 나서지 않았으니까요.”
“알면서도 나와 이곳까지 함께 온 이유는, 내게 현실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소?”
은교교는 이번에도 역시 부인하지 않았다.
“그것도 맞아요. 저는 당신이 알아주기를 바랐어요.”
은교교가 자신의 품속에 넣은 나무 상자를 밖에서 톡톡 쳤다.
“이 천라옥벽을 맹에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내가 위험에 빠져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사도명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뜻대로 나는 이제 모든 걸 알게 됐소. 그럼에도 당신은 왜 부탁하지 않는 거요?”
“무슨 부탁 말이죠?”
“앞으로 남은 길이 매우 흉험하니, 철검산장이 아니라 무림맹까지 함께 가달라는 부탁.”
“왜냐하면 나는 매우 예쁘고 뛰어나며, 특이한 여자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머리도 좋아요.”
“……!?”
“그래서 당신 또한 매우 뛰어나며 훌륭할 뿐 아니라, 나보다 훨씬 더 특이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지요.”
은교교가 빙그레 웃었다.
“얼마나 특이한지, 아무리 부탁하거나 협박을 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오직 한 가지의 경우! 스스로 원할 때에는 철저하게, 완벽하게 움직여 주는 사람일 거예요.”
“하아-!”
사도명은 다만 한숨을 내쉴 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바로 은교교가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내키지 않았었기에, 모든 무림인이 갈망하는 무림태자의 자리를 두고 떠났었다.
“만약 괘검지에서 내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어쩌려고 했소?”
“나는 많은 남자를 알아요. 하지만 그 중의 누구도 당신처럼 주변을 차분히 살피지는 못해요.”
은교교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남자는 절대 남에게 속아 넘어가는 법이 없죠.”
“칭찬인 거요? 아무튼 듣기에 매우 좋은 얘기구려.”
“저는 남자가 듣고 기뻐할 말을 잘하는 여자이기도 하니까.”
“끄응. 만약 당하지 않더라도, 그 후에 그냥 떠나버렸다면?”
“나는 이미 여러 번 억지를 부렸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지금까지 내게 화를 내지 않았죠.”
은교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믿음 가득한 눈빛과 달콤한 미소로 그녀가 말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믿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사도명은 결국 세 번째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지금 내가 화를 내야 마땅한 말을 하고 있소.”
“솔직히 말해서, 그래요. 하지만 화가 나지 않죠? 왜냐하면 당신은 날 도와주고 싶으니까요.”
사도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혼자 무림맹으로 가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이오?”
“당신이 날 잡아주기 바랐기 때문이지요. 여자는 거짓말을 잘 해요. 문 앞을 걸어 나갔는데도 당신이 날 잡지 않으면, 즉시 돌아와서 제발 도와달라고 빌었을 거예요.”
사도명은 멍한 눈빛으로 은교교를 보다가, 결국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고 말았다.
“하하하. 하하하하.”
“왜 화내지 않고 웃지요?”
“내가 특이한 남자라면, 마땅히 화를 낼 때 웃어야 더욱 특이해 보일 것이 아니겠소?”
은교교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양손을 모으더니, 사도명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왜 인사를 하오?”
“방금 저와 함께 무림맹까지 계속 가주시겠다 말했잖아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소. 하지만 그럴 뜻은 분명히 전달이 된 것 같아서 부인할 방법이 없군. 하하하.”
사도명은 계속 웃었다.
실로 얼마만이 이렇게 웃어보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은교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생각보다 고된 길일 겁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럴 거라 생각하오. 그래서 가는 거요.”
은교교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사도명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맹으로 가면 약속을 꼭 지킬게요. 맹세해요.”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혹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없소?”
“무엇이 이상하다는… 아!”
은교교가 눈을 빛냈다.
“지금 혹시 내공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고 있나요?”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까부터 내가 그렇게 했었소.”
“대체 무슨 이유로…?”
“지금까지 여러 번 폭음이 일고 싸움이 있었소. 헌데 왜 아무도 오지 않을까?”
“유흥경이 말하길, 철검산장은 모두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그런 유흥경이 죽었는데도,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소?”
은교교는 그제야 무엇인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귀를 기울여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그, 그러고 보니….”
은교교가 미간을 찡그리며 창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