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8화 (8/168)

008화. 도울 수 없는 일

“상자를 내놓으시오. 아니면 나는 선자를 벨 수밖에 없소.”

왕유의 눈빛이 흉흉했다.

핏발이 가득 서 있고,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은교교는 결국 상자를 왕유에게 건넬 수밖에 없었다.

“어제 나는 장백산에서 신주삼괴를 만났어요. 그들은 지금, 이미 모두 죽고 없어요.”

왕유가 나무 상자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제3호 호지사자에게 건네면서, 애원했다.

“더 이상은 아상에게 상처 주지 마시오. 나는… 나는 보다시피 시킨 일을 완전히 마쳤소.”

“신주삼괴를 움직인 놈은 저 녀석을 움직이는 놈과 같은 사람일 겁니다, 왕 장주님.”

은교교가 다시 말했다.

“같은 사람은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요.”

“그만! 지금은 선자의 얘기가 듣고 싶지 않소.”

왕유가 고함을 지르는 사이, 3호 사자는 상자를 확인했다.

천라옥벽이 상자 속에서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잘 했다. 하하하.”

3호 사자가 웃을 때, 은교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맹주와 무림태자를 중독시킨 범인은 주방장이었어요.”

은교교의 눈이 안타까움과 슬픔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순찰당과 집법각이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살해당한 후였죠.”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이 모든 일의 배후! 맹주님을 중독시키고 천라옥벽을 구하려는 나를 방해하는 자! 그는 뒤를 남기는 성미가 아니에요.”

“아아. 제발. 나는 정말로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소.”

“모르겠나요? 저자는 미리 아드님의 귀를 갖고 있었어요.”

“그만 말하라니까-!”

왕유가 결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고함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은교교는 제3호 호지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

“제3호 호지사자.”

“철검산장의 무사를 죽이고 빼앗은 가짜 이름 말고, 너의 진짜 이름, 진짜 정체.”

3호 사자가 빙그레 웃었다.

“…동심결 32호. 유흥경.”

“유흥경. 왕지상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

왕유의 눈빛이 떨렸다.

“아직, 살아 있는 것 맞지?”

유흥겸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

“아!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만 익숙하도록 교육을 받았지.”

“그 입 닫아!”

은교교의 오른손에서 다시 한 번 지풍이 쏟아졌다.

해검지 옆에서, 유흥경은 은교교의 일 초를 피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흥경의 두 발이 미끄러지듯이 움직였고, 은교교의 지풍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능력을 숨겼느냐?”

“하하하. 사부는 언제나 하나를 보여주되, 둘을 숨겨야 한다고 가르치셨어.”

옆에 있던 왕유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으아아!”

어느새 다시 빼든 철검이 무수한 그림자를 허공에 만들었다.

“네놈이 사람이냐? 으아아. 내 손으로 죽일 테다.”

철검산장의 철검십이식은 무림의 절초로 알려져 있다.

분노에 휩싸여 휘두르는 검에는, 폭발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유흥경의 몸을 감싸며 한 줄기 바람이 일어났다.

까가가가-강!

바람은 왕유의 철검을 몰아냈고, 폭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크윽!”

왕유는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연달아 일곱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에 비해 유흥경은 고작 한 걸음만을 뒤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유흥경은 어느새 검은색의 부채를 꺼내,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부채가 무엇인지 알아보고는, 은교교가 크게 놀랐다.

“흑마선(黑魔扇)?”

무림 칠마 중의 한 명인 풍마(風魔) 장척기.

흑마선은 그의 독문 병기였다.

장척기는 잔악한 성품으로,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그의 손 아래에 죽었다.

결국 당시의 무림태자가 직접 나서서 장척기를 참살했는데, 바로 지금의 맹주인 설청산인 것이다.

“맹주께서 실수를 했단 말이냐? 장척기가 죽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하하하. 사부님은 또 말씀하시곤 했지. 쓸모없는 걸 남겨 두면 안 돼. 쓸모없는 물건은, 쓸모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니까.”

왕유는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나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

“너희는 이미 우리 아상을… 이미… 으으으.”

왕유가 고개를 숙이고, 절망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유흥경은 왕지상을 인질로 잡아서 왕유를 협박했다.

왕유는 아들을 위해 낙수의 맹세까지 깨뜨렸다.

은교교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풍마 장척기. 그 마두라면 이렇게 잔악하게, 일을 처리하고도 남음이 있겠지.”

사람을 쉽게 죽였던 자는, 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망설임을 느끼지 않는다.

풍마 장척기가 아직 살아 있고, 그가 기른 제자가 유흥경이라면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동심결! 너희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뿌리까지 뽑아 주마.”

유흥경은 계속 웃었다.

“하하하. 그런 건 힘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그는 자신의 발이 만든 발자국을 가리켰다.

“왕유가 일곱에 나는 하나. 은령선자. 너의 무공은 왕유와 비교하면 어떻지?”

유흥경은 왕유의 위에 있었다.

은교교는 자신이 결코 왕유에 비해 고수라 할 수 없기에, 대꾸하지 못하고 신음만 삼켰다.

“우리는 말야, 철저하게 계산을 하고서 움직이거든.”

유흥경이 또다시 웃었다.

“계산을 마치고, 반드시 이득이 있는 경우에만 움직인다는 뜻이야. 너는 오늘 우리가 준비한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은령선자.”

은교교는 왕유를 바라보았다.

아래로 고개 숙인 왕유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남에게 준 고통은 천 배, 만 배로 돌려받아야 마땅하다.”

“하하하. 그러나 이미 철검산장은 우리가 점령했다.”

유흥경이 밖을 보며 외쳤다.

“너희도 들어와라.”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괘검지에 있던 1호 사자와 2호 사자였다.

“나의 두 사형제를 소개하마. 우리를 길러내고 사부는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지. 하하하.”

- 하지만 과연 앞으로도 자랑스러워 할 일이 있을까?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왔다.

낮고 묵직했으며, 유흥경의 웃음을 눌러 버리기에 충분했다.

목소리는 1호 사자와 2호 사자, 두 명의 사이에서 들려왔다.

유흥경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누구냐?”

1호와 2호가 유흥경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바닥에 무너졌다.

호흡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유흥경은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 물러섰다.

죽은 시체를 걷게 만들었던 사람이, 무너진 두 사람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도명이었다.

“나무꾼! 너냐? 네가 내 사제들을 죽였느냐?”

사도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팔에 아이 한 명을 안은 채로, 그는 왕유를 바라보았다.

왕유가 울부짖었다.

“아상-!”

달려온 왕유가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아!”

자신의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자, 은교교는 오히려 절망하여 눈을 감고 말았다.

사도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벽 안에는 시체가 많았소. 그 사이에서 아이를 찾았을 때, 아이는 이미….”

사도명은 아이의 주검을 본 순간,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1호 사자와 2호 사자를 죽였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다.

사람에게 혈육의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사도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왕유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허리를 굽혔다.

“으허헝! 으허허헝!”

견뎌내지 못하고 토하는 울음이 흡사 피를 흘리는 듯 아팠다.

사도명의 눈이 이글거렸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세상을 살아갈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으로 남을 위협하는 자들 말이야.”

은교교가 유흥경을 가리켰다.

“바로 이런 사람 말이죠?”

유흥경은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향하는 사도명의 눈빛 속에서 말 못 할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흥경은 동심결의 32호예요. 부탁합니다. 그는 결코 쉽게, 고통 없이 죽어선 안 돼요.”

은교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사도명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도명이 나서서 유흥경을 죽여주기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명은 왕유를 한 차례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나설 수는 없소.”

아이를 안고 흐느끼는 왕유의 울음은, 이제 그 소리가 낮아졌으나, 오히려 더욱 애통했다.

사도명이 길게 한숨 쉬었다.

“어떤 종류의 일은 결코 도울 수 없소. 도와서도 안 되고.”

“아!”

은교교는 사도명의 말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었다.

자식의 복수를 남에게 양보하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왕유가 아들 왕지상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눈물을 닦은 다음, 사도명을 보았다.

“제 아들을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인에게 부탁 두 가지를 드리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제가 유흥경과 싸우는 동안 제 아이를 지켜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두 번째의 부탁은 뭐요?”

“제가 죽는다면, 그때는 저자를 죽여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사도명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소.”

“고맙습니다. 저 녀석이 저승에 온다면, 저는 한 번 더 싸워 원한을 갚을 생각입니다.”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오. 아마도 저승에서는 만날 수 없을 거요.”

“그게 무슨…?”

“유흥경은 지옥에 갈 테지만, 장주는 좋은 곳에 가야지 않겠소. 아드님이 기다릴 테니.”

“아!”

“헛소리가 너무 길구나.”

유흥경이 오히려 먼저 고함을 지르면서, 왕유에게 달려들었다.

치이잇-!

그의 검은 부채에서 무수한 줄기의 바람이 일어났다.

모든 바람은 치명적인 살수였다.

왕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죽인다-!”

그는 철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유흥경을 공격했다.

방어가 숫제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복수심으로 가득해서, 심지어 자신의 죽음마저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까가강! 콰쾅!

폭음이 연달아 일어났다.

호통과 불똥이 정신없이 튀면서 사방으로 퍼졌다.

사도명은 왕지상의 시신 앞에 앉아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뭉클뭉클 솟은 강기가 시신을 보호했다.

은교교가 초조한 표정으로 사도명을 보았다.

“왕유 장주는 아까 흑마선의 일초를 당해내지 못했어요.”

“그랬었지.”

“도와줘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왕 장주가 위험해요.”

“그는 자식을 잃었소.”

사도명이 왕유를 가리켰다.

“지금 절망과 분노를 알알이 터뜨리지 못한다면, 왕유 장주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오.”

“아아!”

은교교는 비로소 지켜볼 뿐, 도울 수 없는 복수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섣불리 나서서 돕는다면, 왕유는 자신의 분노를 못 이기고 오히려 망가질지도 몰랐다.

은교교는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사도명이 은교교의 어깨를 잡아 부축했다.

“너무 걱정 마시오. 저 둘의 실력은, 사실 그다지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아까는 분명….”

“사람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제힘을 발휘 못 하지.”

은교교는 잠시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는 사도명이 말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조금 전, 왕 장주는 아들이 붙잡혀 있기 때문에,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던 것인가요?”

“그렇소. 지금은 거꾸로 유흥경이 그와 같은 처지에 빠졌지.”

은교교가 소리쳤다.

“유흥경은 설령 이겨도, 그 후에는 당신의 손에 죽겠군요.”

은교교의 목소리는 충분히 높아서, 싸우고 있는 유흥경의 귀에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더구나 유흥경의 두 명 사제가 이미 사도명의 손에 죽었다.

유흥경의 손과 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어지러워졌다.

은교교가 또다시 외쳤다.

“왕유 장주가 오로지 죽이기 위해 싸우고, 유흥경은 달아나기 위해서 싸운다면 이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군요.”

“차핫!”

왕유는 숫제 방어조차 도외시한 채,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유흥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세에 몰리는 자신의 처지를 느끼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 마! 계산은 철저했다. 동심결은 실패하지 않아!”

유흥경이 갑자기 철부채의 바닥 한 부분을 힘껏 쳤다.

퍼-엉!

흑마선이 폭음과 더불어 터졌다.

흑마선법의 마지막 초식인 폭운선이었다.

부채 속에 미리 넣어놓은 화약을 폭발시키는 수법.

쇠로 된 부챗살이 파편으로 변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러나 너희는 이미 계산 하나를 완전히 틀렸지 않느냐?”

사도명은 왼손을 휘둘러 날아오는 파편을 모두 막았다.

아울러 오른손 검지를 들며 한 곳을 가리켰다.

“내가 여기에 있을 거란 사실을, 너희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유흥경은 왕유를 공격하기 위해 부채를 터뜨린 것이 아니었다.

철부채가 폭발하는 즉시, 그는 오히려 뒤로 몸을 뺐다.

폭운선은 공격처럼 보이지만,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구명의 초식이었다.

“치잇. 다시 만날 때의 결과는 오늘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유흥경은 몸을 돌려, 전력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바로 다음 순간에, 유흥경은 자신의 앞쪽으로 날아드는 무서운 기세를 느껴야만 했다.

“누가 다음을 준다 했지?”

쐐액!

날카롭기 그지없는 기운.

유흥경의 앞으로 날아가 벽에 박히는 기운은, 분명히 검기였다.

츠-칵!

유흥경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 섰다.

서는 동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검기는 벽에 박히는 것이 아니라 유흥경의 머리를 관통했을 것이다.

“거, 검이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맨손에서 검기가?”

사도명은 검지를 앞으로 올린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달아나게 두지 않아. 너는 아직 왕유 장주와의 싸움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 않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