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깨어진 맹세
백여 년 전, 천하 정도를 대표하는 문파들의 수장이 모두 낙수에 모였다.
전통적인 정파 구파일방과 아홉 개의 무림 세가.
그들은 천하에 평화 수호의 의지를 천명했다.
세외팔천으로부터 천하의 안위를 지키고, 나아가 천하 정도의 기상을 드높이겠노라는 맹세!
낙수의 맹세는 이후 19성좌를 통합하는 연합 문파의 창건으로 이어진다.
무림맹의 시작이었다.
이후 무림맹은 천하 각처에 지부를 두고 운영된다.
요녕성의 지부는 사백 년 전에 세워진 철검산장이다.
무정철검 왕익철.
그는 한 자루 철검으로 천하에 협명을 떨쳤다.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검의 명가, 철검산장을 세웠다.
청석로의 입구에 인공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하나 있다.
괘검지(掛劍池)!
검을 걸어두는 못이라는 뜻.
철검산장을 찾는 모든 이들은 이곳 괘검지에 들러 자신의 무기를 맡겨야 한다.
사실, 괘검의 장소는 무림맹의 지부 모든 곳에 하나씩 존재한다.
“무림맹은 분쟁을 막는 장소다. 누구도 무림맹의 땅에 병기를 들고 들어설 수 없다.”
제2대의 무림맹주 호불군이 해검의 포고를 발표한 이후에, 무림맹 각 지부에는 검을 놓아두고 가야 하는 괘검의 장소가 하나씩 만들어졌던 것이다.
철검산장의 괘검지도 그중의 한 곳이었다.
괘검지를 지키는 문지기는 호지(護池) 사자(使者)라 불린다.
호지사자는 모두 철검산장으로부터 파견 나온 무사들이다.
그들은 방문한 손님의 명호를 기록하고, 손님의 무기를 맡아두며, 나갈 때 실수 없이 되돌려 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사도명과 은교교가 철검산장의 괘검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후였다.
세상은 이미 어두웠지만, 괘검지 주변은 전혀 달랐다.
“호지사자는 철검산장의 얼굴이다. 언제나 활기찬 태도와 밝은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라.”
당대의 철검산장 장주인 철담협 왕유의 말을 좇아, 호지사자들은 괘검지 주변을 언제나 밝게 한다.
철검산장을 찾는 이들이 쉽게 길을 찾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사도명과 은교교가 괘검지의 옆에 위치한 접객당으로 들어가자, 가슴에 삼(三)자를 써 붙인 제3호 호지사자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조는 공손했으나, 눈은 장부만을 향하고 있었다.
“본인의 신분과 찾아오신 목적을 여기 적으십시오.”
은교교가 품에서 금빛의 순(巡)자가 선명한 신패(信牌)를 꺼내 호지사자에게 보여 주었다.
3호 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의 순찰이십니까?”
“급한 일이다. 지금 당장 장주님을 만나야 한다.”
3호 사자는 자신의 앞, 명부의 빈 곳을 검지로 톡톡 쳤다.
“상세한 신분과 목적을 적으시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미 급한 일이라고 말했는데도….”
“본단의 분이시라고 특별대우를 받고 싶습니까? 적으세요. 그래야 다음 절차로 넘어 갑니다.”
은교교가 급히 붓을 놀렸다.
<은령선자 은교교>
“일이 지체되어 발생할 대가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
은교교의 이름을 보고도 호지사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제 행동은 당연히 제가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호지사자가 은교교의 허리에 매달린 은빛의 방울을 살피면서 웃었다.
“선자님. 이제는 방문 목적도 알려 주실… 웃!”
한줄기 지풍이 일어났다.
피-융!
3호 호지사자의 옆머리가 잘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조금만 옆으로 지풍이 날아갔어도,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것에 구멍이 크게 뚫렸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제2호 호지사자와, 제1호 호지사자가 일제히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요?”
“검을 뽑으면!”
은교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모두의 머리에 진짜 구멍을 뚫어 주마.”
1호 사자와 2호 사자의 동작이 멈추는 것을 보면서, 은교교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너희야말로 무슨 짓이냐? 왕유 장주를 만나려면, 너희들을 죽여 놓는 게 빠르다는 뜻이냐?”
제3호 호지사자가 자신의 잘려나간 머리카락 부분을 만지작거리면서 웃었다.
“하핫. 그래도 절차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장주님을 뵈러 간다. 지금 당장! 내 말, 알아들었나?”
“하하. 알아들어야 하겠지요?”
은교교의 청상검은 나무로 된 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3호 호지사자는, 은교교가 검 없이도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렇지만 함께 오신 분도 적어도 신분은 밝혀 주셔야….”
사도명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한낱 나무꾼이오. 그저 산에서부터 길을 안내해 왔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들어가지 않고 산으로 돌아갈 거요.”
“알겠습니다. 그럼 순찰님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은교교가 3호 호지사자를 따라 청석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괘검지에 남은 사도명은 계속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벽에 걸린 청상검이 창으로부터 들어온 바람에 달랑거렸다.
가슴에 일(一)과 이(二)를 새긴, 다른 두 명의 호지사자들은 사도명의 좌우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칼을 뽑으려다가 은교교의 고함에 굳어버렸다.
그 상태가 부끄러웠는지,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계속 잡은 채 사도명을 보았다.
눈빛이 거칠었다.
사도명이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향할 때, 그들이 외쳤다.
“거기 멈춰라.”
1호 호지사자의 고함이었다.
“나 말이오?”
되묻는 사도명을 향해, 1호 사자와 2호 사자는 동시에 검을 뽑더니, 가슴을 겨누었다.
“너는 아직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나는 한낱 나무꾼에 불과하며 그냥 돌아간다고 밝혔잖소.”
“거짓말.”
1호 사자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턱은 사도명의 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무꾼의 신발이 너처럼 깨끗할 수는 없다.”
그의 말대로 사도명의 신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먼지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눈썰미가 좋구려.”
“네놈은 단순한 나무꾼이 아니라 강호인이다. 인정하느냐?”
“하지만 아주 좋지는 않구려.”
“무슨 헛소리냐?”
사도명은 계속 웃었다.
“나는 본래 그냥 가려고 했소. 그런데 굳이 붙잡으니 더 이상 그냥 갈 수가 없지 않소.”
“당연히 그냥은 갈 수 없지.”
2호 사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은교교는 감히 우리에게 무례를 범했다. 누군가는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지 않겠느냐?”
사도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지사자는 언제나 3명이 하나의 조를 이뤄서 일을 한다고 들었소.”
“갑자기 무슨 소리냐?”
“궁금해졌소. 왜 귀하들은 왕유의 지시를 듣지 않지?”
“무슨 헛소리냐? 우리는 보다시피 지금 세 명이지 않느냐?”
“세 명이 일을 하라는 건, 두 명이 일을 할 때, 한 명은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요.”
사도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세 명이 한꺼번에 일하고 있구려. 이건 왕유의 지시를 어기는 것이 아니오?”
“때로는 쉬지만, 때로는 다 같이 일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렇소? 한데 당신들은 내가 장주를 왕유라고 이름만 불러도 화를 내지 않는군.”
“!”
1호 사자와 2호 사자가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1호 사자가 다시 소리쳤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너의 신분부터 밝혀라.”
“사도명. 도명은 운명을 스스로 이끈다는 의미요. 당신들은 신분을 밝힐 필요 없소. 그냥….”
사도명이 1호 사자와 2호 사자 사이의 벽을 가리켰다.
사도명의 검지에서 한 줄기 기운이 쏟아져, 그가 가리키고 있는 벽을 무너뜨렸다.
콰르르-!
무너진 벽의 틈 사이로 수많은 시체들이 쏟아졌다.
“이 많은 시체들이 대체 누구인지, 그것만 말하면 좋겠군.”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절반쯤 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이 죽기 전 당했던 지독한 고통을 웅변하고 있었다.
**
청석로 주변은 아름다웠다.
3호 사자는 주변의 풍광을 완상이라도 하는 듯 느긋하게 걸었다.
은교교는 초조했다.
그녀의 품에는 상자가 있다.
천라옥벽이 든 상자를, 되도록 빨리 맹에 전달해야 하는 것이 은교교의 임무였다.
철검산장의 장주인 왕유는 자신의 집무실 있었다.
그는 청심차를 마시다가 은교교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은령선자.”
“장주님!”
왕유는 포권하는 은교교를 향해 웃었다.
“맹에서 본 이후, 대략 1년 만에 뵙는 셈인가?”
“!”
은교교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네, 아마도!”
왕유가 자신의 맞은편,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그래 어쩐 일로 이런 변두리까지 오신 게요?”
은교교는 3호 사자를 보았다.
그녀의 의중을 눈치챈 왕유가 3호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었다.
3호 호지사자가 밖으로 나간 후에야, 은교교는 상자를 꺼냈다.
“천라옥벽입니다.”
왕유는 물끄러미 나무 상자를 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아주 깊이 내쉬었다.
“소문은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소문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아아. 맹주와 태자가 함께 중독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왕유가 손을 뻗었다.
“알겠소. 내 최선을 다하여, 한시라도 빨리 맹의 본성에 천라옥벽을 전달토록 하겠소.”
하지만 왕유는 나무 상자를 가져가지 못했다.
은교교가 나무 상자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이해?”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어이해서 이리 하시나요?”
딸랑 딸랑 딸랑.
은교교 허리에 매달린 방울이 저 혼자 흔들렸다.
은으로 만들어진 방울은 일부가 변색되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왕유는 은교교의 몸이 의자에 닿지 않고, 약간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방울이 은으로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거요? 몰랐군.”
의자에 발라져 있는 독은, 몸이 닿으면 저절로 스며든다.
은교교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위기를 헤쳐 왔다.
한상객잔에서 독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은교교는 의자의 독을 간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대로 의자에 앉았더라면, 은교교는 중독이 되어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무림맹은 낙수의 맹세에 의해 세워졌어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소?”
“낙수의 맹세는 평화와 도의를 지키겠노라는 내용이고요.”
“나는 요녕성 지부장이오. 맹세의 내용은 누구보다도 잘 아오.”
은교교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휴우. 이 정도일 줄이야. 대체 무림맹은 어디까지 침습 당해 있는 상태인 건가?”
“…….”
왕유는 대꾸하지 못했다.
“천하 강호인들이 대협으로 떠받드는 철담협 왕유 님. 당신과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떤 이유로 낙수의 맹세를 깨뜨린 거죠?”
은교교는 왕유에게 물었는데, 답은 문밖으로부터 들려왔다.
“왕지상은 왕유의 아들입니다. 아직 일곱 살이며, 매우 귀엽죠. 아상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문이 열리고 제3호 호지사자가 되돌아왔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이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은교교는 3호 호지사자와 왕유를 번갈아 보았다.
3호 호지사자의 말이 옳다.
자식이 인질로 잡힌다면, 아버지는 뼈에 새긴 맹세라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3호 호지사자가 왕유를 보았다.
“귀하는 끝내 우리가 시킨 일에 실패하고 말았군.”
왕유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했소.”
“중요한 것은 결과다. 그리고 실패에는 벌이 따르지.”
제3호 사자가 품에서 헝겊에 싸인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왕유의 발 아래로 던졌다.
“왕유. 너는 1년 전에 은령선자와 만났던 일이 없다. 내가 그 정도를 모를 거라 생각했나?”
왕유는 대꾸하지 못하고 헝겊에 싸인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는 속에 든 물건을 보고 싶었으나, 손이 떨려 차마 헝겊을 열어젖힐 수가 없었다.
3호 호지사자의 말이 이어졌다.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말해 은교교에게 경계심을 품게 만들었지. 안에 든 것은,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든 대가다.”
왕유는 계속 손만 떨었다.
은교교가 대신 물건을 주어, 헝겊을 열었다.
헝겊 속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왕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 으아아아-”
속에 든 것은 사람의 귀였다.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않은 작은 귀가 칼로 깨끗하게 잘려 헝겊에 쌓여 있었다.
“왕유. 네가 천라옥벽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왕지상은 왼쪽 귀만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으아아!”
치캉!
왕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철검을 뽑았다.
그 검을 은교교에게 겨누며, 그가 고함을 질렀다.
“미안하오. 모두 들으셨을 테니 설명은 하지 않겠소. 상자를 내놓으시오. 아니면 나는 선자를 벨 수밖에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