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제 일 해 - 와(渦)
어린 시절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흐리다.
하지만 사도명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순간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허공으로 튀는 피.
일그러지는 얼굴이 전하던 생생한 고통의 증언.
어린 아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고, 억지로 입을 막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흉수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복면이 두터웠고, 어린 사도명에게는 복면의 아래를 뚫어볼 안력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잊지 않는다.
칼을 잡은 흉수의 손목.
크고, 검은 점 하나가 그 손목에 박혀 있었다.
“아이만은, 제발 이 어린아이만은….”
어머니는 애원했었다.
자신을 죽이는 자에게 아들의 생명을 애원할 때, 어머니의 심정은 대체 어떠했을까?
다섯 살 때의 일이건만, 언제나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사도명은 기억력이 좋았다.
그리고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흉수는 물끄러미 사도명을 보다가, 칼등으로 그를 쳤다.
사도명은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양일생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아아. 어쩌다가.”
양일생은 사정후의 친구였다.
사도명의 아버지 사정후는 약관의 나이로 관직에 오른 천재였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행태에 염증을 느끼고 시골 마을로 내려왔다.
“하루하루가 피비린내다.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그렇게 외치고 사정후는 가진 권력을 모두 놓았다고 들었다.
시골로 돌아온 사정후를 가장 반겨준 사람이 양일생이었다.
사정후의 어린 시절 친구로, 학문에 뜻을 둔 사정후와는 달리 평생을 무예에 뜻을 두었다.
양일생은 창천문이라는 시골의 작은 문파를 이었고, 사정후가 돌아오자 아낌없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 집과 땅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소리 말게. 기쁜 건 나지. 사내로 태어나 진정한 친구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오직 즐거울 따름일세.”
양일생은 자신이 지어준 집 마당에서 사정후와 자주 술잔을 기울이면서 웃곤 했다.
“내가 아무리 자주 와도 구박만은 말아주게. 하하하.”
사정후 부부가 시골로 내려온 지 3년 만에, 아들이 태어났다.
양일생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 듯 기뻐하며 이름을 지어주었다.
“도명이 어떤가? 타인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명운을 스스로 개척하란 의미일세.”
사도명은 영민했다.
놀랍게도 돌이 되기 전에 스스로 말을 배웠다.
까만 눈동자를 또르르 굴릴 때면, 세상의 모든 지혜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참사가 벌어진 후 사도명을 구한 양일생은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벌어진 일인 양 오래 울었다.
“흉수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사도명은 손목의 점을 말했다.
“됐다. 그 점을 잊지 말아라. 군자의 복수는 십 년, 백 년이 걸려도 상관이 없다 했다. 부모의 원한은 불구대천이니, 너는 반드시 힘을 길러 원한을 갚아라.”
양일생은 사정후의 친구에서, 사도명의 사부로 변했다.
그날 이후, 사도명은 언제나 검과 함께 했고 강해지고자 노력했다.
창천문은 일기전승이었지만, 특별한 문파는 아니었다.
“무공이 높다거나 특이한 장점이 있는 건 아니란다. 그보단 차라리 제자를 구하기 힘겨워 단지 한 명만을 두었다고 보는 게 좋겠지.”
문파에서 전해지는 창천일호(蒼天一毫)의 심법을 사도명에게 알려주면서, 양일생은 마치 자신 없는 답안지를 내놓는 학동 같았다.
“하나의 심법과 하나의 검법. 이것이 창천문에 존재하는 무공의 전부다.”
털 한 오라기라는 심법의 이름이 특이했다.
이름이 기묘한 것은 검법도 마찬가지였다.
창천사해(蒼天四解)!
푸른 하늘에 네 개의 풀이를 내어 놓는다니!
창천사해의 구결을 본 사도명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법이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것도 있다.
하지만 창천사해의 네 가지 구결 속에는 뜻 모를, 춤추는 듯한 움직임뿐이었다.
공격도 없고 방어 또한 전무한 기묘한 검법.
“돌아가신 나의 사부는 멀리 가기 위해서 천천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창천문의 무공은, 결코 빨리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양일생은 사도명을 제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진지하게 물었었다.
“그래도 나의 제자가 되겠느냐? 창천문에 들겠느냐?”
사도명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높아지면 낮아지고, 낮아지면 높아진다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냐?”
“사부님과 그 윗대의 사부들께서 멀리 가기 위해 천천히 가셨다면, 그 느린 길에서 쌓이고 쌓인 공이 또한 많다 생각합니다.”
사도명이 창천일호심법이 말하는 털 오라기 하나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달은 것은, 그의 나이가 열네 살이 되던 때였다.
내공은 쉽게 쌓이지 않는다.
일 년 수련한다면 일 년 어치가 쌓이는 것이 내공이었다.
내공을 비정상적으로 쌓게 만드는 심법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보십시오, 사부님.”
열네 살이 되던 해, 사도명은 사부 양일생이 보는 앞에서 가부좌한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불과 십 년이 되지 않는 내공을 이용한 기적이었다.
“한 오라기 털의 의미를 겨우 깨달았습니다. 작은 내공이라도 한 올의 털에 모으면 크고 강해질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 모든 내공을 몸을 띄우는 것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공이 삼 갑자에 이르지 않으면 허공답보의 경공술을 시전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사도명은 불과 십 년의 내공으로 삼 갑자의 내공이 보여줄 만한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아! 재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기적이구나.”
“하여, 저는 창천일호라는 명칭을 고치고자 합니다. 모든 힘을 하나의 근원이 집중하는 것이니, ‘창천일원’이라 바꾸려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네 말은 문파에 전하는 기록과 일치한다. 창천일호는 한때 창천일원이라 불렸어.”
사도명은 빙그레 웃었다.
“왜 본파의 검법이 창천사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이젠 알 것도 같습니다.”
“설명을 해다오.”
“사해. 네 가지 풀이라는 의미는 본파의 검공이 단순한 검공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단순한 검공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이냐?”
“창천이란 변하지 않는 법도를 뜻합니다. 꾸준히 흘러가는 시간, 무구한 세월. 저는 창천사해란 바로 세월과 때론 맞서고 때론 순응하는 법도라 판단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사도명은 마침내 세월과 연관이 되는 네 가지의 법도를 깨닫는다.
**
“이게 무슨?”
망괴 악휘는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주화입마를 당한 후, 처음으로 보는 자신이 피였다.
놀랍게도 평생 잊고 살았던 고통마저 생생했다.
악휘는 은교교를 보았다.
“어, 어떻게?”
“내가 아냐.”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았다.
그는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우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젓가락에 붉은 피가 한 방울 보였다.
악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흔들리는 금낭화를 보았다.
꺾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났고, 독괴의 체독에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하게 반짝거렸다.
“너는… 내공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이 꽃에서… 활검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데.”
“귀하도 들었겠지만, 나는 꽃에 활검의 법을 쓰지 않았소.”
사도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망괴 악휘의 앞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생로병사의 순환은 모든 생명에게 공통적인 건.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활이란, 오히려 그 세월에 순응하지 않는 것.”
사도명이 악휘의 앞에 섰다.
“활이 아니라 휴, 였소.”
“휴, 휴라는 것은?”
“꽃은 이내 질 운명이었소. 나는 그 운명의 흐름을 잠시 정지시켜, 조금 더 오래 그 아름다움을 보고자 했지.”
망괴 악휘는 여전히 생생한 꽃과 자신의 갈라진 가슴의 피를 번갈아 보았다.
“그, 그럼 내게 사용한 수법은 대체…?”
“그것이야말로 활검. 주화입마로 생명력을 잃은 귀하의 육체에, 과거 사라졌던 것을 되살렸소.”
악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그렇군. 아아! 얼마 만에 느끼는 고통인가? 얼마 만에 느껴보는 심장의 고동인가?”
“귀하는 이제 그만 쓰러져야 하지 않겠소?”
악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쿠-웅!
쓰러진 악휘의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고맙다. 인간이 아닌 채로 살았는데 마지막은, 인간이 채로 죽게 되는구나. 좋구나, 생명은.”
악휘의 호흡이 끊겼다.
잠시 뛰었던 그의 심장이 다시 한 번 정지했다.
“크, 큰형님.”
저이계가 몸을 떨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죽어 있던 망괴 악휘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하게 죽었음을 깨달았다.
사도명이 몸을 굽혔다.
악휘의 몸속에서 천라옥벽을 꺼내 들며 한숨 쉬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로 사람은 세상을 산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은 결국 삶 자체를 망치고 말 테니….”
사도명은 천라옥벽을 은교교의 앞으로 내밀었다.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은교교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주, 주시려는…?”
“모르는 사이임에도 처음 보는 나를 구해주려고 계속 노력했소. 절망뿐임을 알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포기하지도 않았소.”
사도명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귀하는 이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
“이럴 거라면 왜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았나요?”
“세상의 일에 두 번 다시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사부 앞에서 맹세했었소. 그 맹세를 깨뜨리기 어려웠지만, 날 돕느라 누군가 희생당하는 걸 계속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소.”
“둘째 형님. 지금입니다. 틈을 노리세요.”
저이계의 고함이 들렸다.
아무런 냄새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악의(惡意)가 후끈하게 뒤에서 전해왔다.
“조심하세요.”
놀란 은교교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 사도명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몸을 돌렸고, 온몸에서 흑록색의 안개를 쏟아내고 있는 독괴 좌득생을 보았다.
안개 알갱이 한 방울 한 방울이 극독이었다.
독인이 체독을 이용해 뿜어낼 수 있는 최고의 공격술이라는 앙천독하!
“내 사문에는 사해(四解)라 불리는 네 가지의 파해법만이 검공으로 전하여 왔소.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그것이 높고도 높은 검의임을 깨달았지.”
사도명이 작고 가느다란 젓가락을 앞으로 밀었다.
“창천제일해, 와(渦).”
독괴 좌득생이 뿜은 독의 안개가 순식간에 젓가락을 녹였다.
하지만 사도명은 태연했다.
여전히 앞으로 오른손을 내민 채였고, 젓가락을 녹인 독안개가 자신의 팔을 덮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
은교교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눈앞에서 기묘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분명히 사도명을 덮친 독.
그 독이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어 독괴를 되덮치고 있었다.
마치 환상을 보는 듯한 광경.
“이, 이게 무슨… 크아악!”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독괴 좌득생이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문의 검공에는 공격도, 방어도 없었지. 나는 열여섯이 되고서야 겨우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소.”
사도명은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은교교를 보았다.
“모든 것을 되돌리는 도리. 이것이 제일해 와의 오의요.”
받은 것을 돌려주기에 방어가 필요 없다.
되돌린 것이 상대를 재공격하니 공격 또한 필요 없는 것이다.
“다, 당신 대체 누구죠? 나는 신주삼괴 중의 두 명을 단 일 초에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 못하겠어요.”
“아까도 말했듯 사도명, 지금부터 그대의 몸에 손을 대려 하오.”
“무, 무슨 소리예요?”
“독괴의 체독은 이미 그대의 몸 깊이 스며들었소. 와의 도리로 독을 몰아내려면….”
사도명의 손바닥이 은교교의 단전에 닿았다.
“아!”
“밀려오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오히려 밀어내고, 달아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오히려 묶어두는 도리. 그것이 와(渦). 지금부터 독을 몰아내겠소.”
은교교의 시선 속에서, 사도명의 눈은 반짝이며 빛났다.
그 빛 속에, 한 줄기의 욕망조차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은교교는 안심했다.
“도,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흐름을 느끼시오. 와의 도리는 흐름 속에 깃든 또 다른 흐름을 찾는 것. 깊이 느낀다면 무공의 증진에 큰 도움이 될 테니.”
“으으으!”
저이계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서, 흡사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다니며 세상을 농락했던 망괴와 독괴가 순식간에 죽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도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달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달리고 있는데도 몸이 계속 그 자리였다.
달리려고 힘을 썼는데, 그 힘이 방향을 바꾸어 오히려 자신을 그 자리에 머물도록 만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왼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는 사도명이 보였다.
“소, 손님께서 이리하시는 중입니까? 이것도, 헤헷 혹시 좀 전에 말씀하신 와의 도립니까?”
“너와 나는 곽노의 일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잖느냐?”
사도명이 오른손을 내렸다.
“아아! 고마워요.”
몸속의 독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느낀 은교교는 사도명에게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그녀는 사도명이 바닥에 놓아둔, 천라옥벽을 손으로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제가 가져도 되나요? 그쪽도 천라옥벽의 가치는 충분히 아실 터인데.”
“가지시오. 대가로 나는 저이계의 목을 갖겠소.”
“!”
“곽노는 좋은 사람이었소.”
사도명은 열린 주방문 사이로 보이는, 숨이 끊어진 곽노의 시체를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항상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 주었지. 모든 생명은 소중하오. 생명을 끊은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저이계가 달아나려는 시도를 멈추었다.
그는 제자리에 서더니 사도명을 향해 물었다.
“헤헷. 손님은 끝내 저를 죽이시려 하는 겁니까?”
사도명은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는 도대광을 보았다.
잘려나간 그의 두 손목은 이제 더 이상 펄떡거리지 않았다.
행동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다.
저이계는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 당할 줄 아느냐? 너는 결코 네 손으로 날 해치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