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천라옥벽(天羅玉璧)
“내가, 그 질문에 대신 대답해도 될까?”
곱디고운 여자의 목소리임에도, 저이계는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어느 고인이 오신 거요?”
저이계는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이계는 목소리의 주인이 뿜어내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상대를 고수라 생각했고, 창문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물었다.
“오셨으면 정체를 드러내시지, 어이해 바깥에 홀로 계신단 말입니까?”
저이계가 창을 볼 때, 나무꾼 사도명은 조금 전 자신이 밀고 들어왔던 문을 보았다.
삐-걱!
그 문이 열렸다.
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 한 명이 열린 문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타는 듯 붉은 옷을 입었고, 허리에 파란색의 검갑을 찼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에 들렸던 목소리만큼이나 고왔다.
눈은 초롱했고, 이마는 맑았으며, 붉은 입술이 도톰했다.
붉은 옷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한 쌍의 방울이 특이했다.
은으로 된 두 개의 방울은 여인이 걸을 때 계속 서로 부딪치면서 짤랑거렸다.
저이계는 그 방울 덕분에 여인이 누군지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은령선자 은교교?”
“맞아. 달빛이 교교하다고 할 때의 그 교교가 바로 내가 쓰는 이름이지.”
은교교는 곧장 걸어와서 사도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딸랑 딸랑 딸랑.
은방울이 부딪치는 소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똑같이 고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었다.
밖에 있을 때는 왜 은방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을까?
“무림 삼미(三美) 중 하나인 은령선자에 대한 소문은 자주 들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이계가 웃었다.
“그런데 직접 뵈니 미모에 대한 소문 때문에 무공에 대한 평가가 가려졌던 거군요. 헤헤.”
“그것도 맞아. 나는 비단 아름다울 뿐만이 아니라 무공도 매우 뛰어나지.”
은교교가 빙그레 웃었다.
“심지어 신주 삼괴(三怪) 중, 식괴(食怪) 저이계의 목을 단숨에 벨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
“정말인가요?”
저이계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는 은교교의 허리에 걸린 청색 검갑을 가리켰다.
“헤헤. 은령선자의 청상검이 사람의 목을 베면 피조차 얼린다는데, 그것도 정말인가요?”
“시험해 보고 싶어?”
“헤헤. 저는 단지 들었던 소문을 말했을 뿐입지요.”
“나는 새로운 손님이야. 너는 왜 새 음식을 내어오지 않고 그렇게 웃기만 하지, 돼지?”
“손님이 대신 해주신다던 대답을 아직 하지 않으셨잖아요.”
은교교는 사도명을 한 차례 응시한 후, 그가 벗어놓은 나뭇짐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 사이에 꽂혀 있는 금낭화의 꽃잎은 공교롭게도 은교교가 입고 있는 옷과 색이 같았다.
“나는 금낭화를 좋아해요.”
“헤헷. 저도 좋아합니다.”
“너보고 한 말이 아냐, 돼지. 만약 너도 금낭화를 좋아한다면 나는 앞으로 두 번 다시 금낭화를 좋아하지 않을 참이야.”
“헤헷. 그러지 마십시오. 정히 그렇다면 저는 앞으로 금낭화를 좋아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개의 꽃이 피면 더러 상한 가지에 피어나는 꽃이 있어. 멀쩡한 가지에서 피었다가도 가지가 병들 수 있고.”
은교교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나뭇짐 사이의 금낭화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 꽃은 본래 멀쩡하게 폈는데 그 후 가지가 다쳤어.”
“그야, 꺾었으니까요.”
“그런 얘기가 아냐.”
은교교가 고개를 저었다.
“이 꽃의 가지가 썩기 시작했던 거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여 꽃이 시들고 있었는데, 다행히 한 사람이 그걸 꺾어 주었지. 꽃은 꺾인 다음에 되려 싱싱해졌어.”
은교교의 흰 손과 금낭화의 붉은 꽃잎은, 그녀 허리의 은빛 방울과 푸른 검과 어울려 무지개가 아롱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저이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사라졌다.
“말이 안 됩니다.”
“뭐가 안 되나, 돼지?”
저이계는 금낭화와 사도명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은교교를 보면서 물었다.
“죽어가던 꽃인데 가지를 잘라 되살렸다면, 그건 바로 활검의 도리가 아닙니까?”
“제대로 알고 있군.”
“지금 저더러, 이 나무꾼 손님이 활검(活劍)의 검도를 사용했다는 걸 믿으라고요?”
“믿으라 하지는 않았어.”
은교교는 나직해서 오히려 더 힘찬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다만 줄곧 주장해 왔을 뿐이야. 새로운 손님이 왔는데 너는 왜 아직 새 음식을 가져오지 않는 거지, 돼지?”
“헤헷.”
저이계가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얼굴이 큰 만큼 땀의 양도 많아서, 저이계의 두 손은 금세 흠뻑 젖고 말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사도명을 향해 왜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지를 추궁했었다.
그리고 이제 이유를 알았다.
모든 검은 본래 사검(死劍)의 도리를 추구한다.
하지만 더러 벰으로써 오히려 살려내는 활검의 검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했다.
활검은 사검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존재한다.
저이계는 차마 사도명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물었다.
“화, 활검의 검도를… 익히신 분이 맞습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돼지? 어서 음식을 가져오지 않고 대체 아직까지 뭘 하는 거지?”
은교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이계는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저이계가 사라지자, 사도명이 은교교를 보며 물었다.
“왜 거짓말을 했소?”
“여자는 거짓말을 잘해요. 나는 오늘 열 번의 거짓말을 했는데 그중 어떤 거짓말을 말하나요?”
사도명은 자신이 나뭇짐 사이에 꽂아 놓은 금낭화의, 찰랑거리는 꽃잎을 가리켰다.
“나는 이 꽃에 활검의 도리를 사용한 적이 없소.”
“그런가요?”
“이 금낭화는 내가 꺾기 전부터 매우 생생했소. 그쪽의 눈썰미라면 충분히 알았을 거요.”
은교교가 빙그레 웃었다.
“저이계는 흉악해요.”
“!”
“사람 죽이기를 즐길 뿐만이 아니라, 죽기 전에 고통을 주는 걸 더더욱 즐기죠.”
은교교는 도대광을 보았다.
잘린 양쪽 손목에서 피를 지나치게 흘린 도대광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흡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도대광은 형제의 죽음조차 외면하고 혼자 살고자 했어요. 하지만 결국은 저렇게 매우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죠.”
“어떤 것들은 쥐고자 하면 오히려 빠르게 빠져나가오. 불명예스러운 삶이 그중의 하나요.”
“나는 그쪽이 저이계로부터 저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었나 봐요. 이 정도면 답이 되나요?”
사도명은 그제야 은교교의 배려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객잔으로 들어와 사도명의 앞에 곧바로 앉았다.
그리고 활검의 도리를 운운하면서 사도명을 절대의 고수인 양 추켜세웠다.
모든 것이 사도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주방의 저이계가 듣는다면 결국 소용이 없지 않소?”
“제가 밖에 있을 때도 옷에는 방울이 있었어요. 이 안에서 제 방울 소리가 들리던가요?”
“아!”
무림인은 내공을 이용해 소리를 차단할 수 있다.
사도명은 은교교가 비단 아름답고 무공이 강할 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가 매우 치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사하오.”
사도명은 진심으로 말했다.
또다시 주방의 문이 열리고 저이계가 쟁반을 들고 나왔다.
그는 쟁반 위에 또다시 잔뜩 음식을 쌓아올려 가져왔다.
“많이, 마음껏 드십시오.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도명은 목을 길게 빼서 열려 있는 문틈으로 주방의 내부를 살폈다.
곽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사도명에게 사람 좋게 웃어주던 곽노는, 이제 더 이상 웃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사도명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그랬소?”
저이계는 이제서야 사도명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다.
그는 오늘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열흘 전, 산골 약초꾼의 마을인 황가촌에서 둥근 공 하나가 발견됩니다. 처음엔 그저 흙이 단단하게 뭉쳐진 것인 줄 알았지요.”
저이계는 은교교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조금씩 집어 자신이 먼저 먹었다.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쩝쩝, 그 공을 닦아보니 반짝거리는 옥벽이 나타나지 뭡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천라옥벽이었던 겁니다.”
사도명의 안색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저이계는 독이 없다는 걸 보여 준 후에 웃었다.
“헤헤. 도명 손님은 천라옥벽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오?”
“아신다면 당연히 크게 놀라 안색이 변했을 텐데요.”
“반드시 놀라야 하오?”
“천라옥벽은 삼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 천라대제가 남긴 것입니다. 옥벽의 기연을 얻으면 천라대제의 무공과 그가 남긴 재물도 찾을 수 있지요.”
“아.”
사도명은 시선을 저이계로부터 돌려 은교교를 보았다.
“그러나 이분도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데.”
“당연히 나는 놀라지 않아요. 이미 알고 있는 얘기니까.”
은교교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든 자질구레한 것들을 식탁 위에 펼쳤다.
작은 사금파리와 염소의 뿔 같은 것들이었다.
“황가촌에서 받은 것이에요.”
“황가촌?”
“황가촌 사람들은 약초꾼일 뿐 무림인은 아니어서, 자신들이 발견한 옥벽의 가치를 몰랐어요. 적당히 비싼 옥인 줄 알았죠.”
“아!”
“황가촌의 촌장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을 불러 그 옥벽을 좋은 가격에 팔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친구라는 자들이 바로 태행산의 네 명 도적, 태행사적이었어요.”
사도명은 다시 한 번 더 도대광을 보았다.
그의 호흡은 이제 거의 끊어져서, 실낱처럼 미약했다.
“태행사적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맏형 도대광은 천라옥벽에 욕심을 가졌고, 그 다음은 큰 불행이 벌어졌어요.”
은교교의 말에 사도명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이란 함부로 가져선 안 되고, 가져도 함부로 보여줘선 안 되지. 촌장은 보여줘선 안 될 사람에게 보물을 보여줬군요.”
“정확해요.”
은교교는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는 도대광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대광은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천라옥벽을 훔쳐갔어요. 어른들이 몰래 숨긴 몇몇 아이들만 겨우 살아남았죠.”
도대광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력이 다한 도대광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에 고였던 눈물만이 옆으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도대광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눈물을 닦을 손이 없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만 달싹거리던 도대광의 호흡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심장의 박동도 멈추었다.
사도명은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은교교가 식탁 위에 내려놓은, 주머니 속의 물건을 매만졌다.
“나는 무림맹의 요청을 받고 천라옥벽을 회수하기 위해 황가촌을 찾았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났죠. 그들은 내게 자신들의 이웃, 자신들의 부모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건 아이들이 제게 준 그 청부의 대금이에요.”
은교교는 아이들의 청부를 받고 태행사적을 추격했다.
그러다가 이곳 한상객잔에서 이미 죽은, 그리고 죽어가는 도대광을 만나게 된 것이다.
“헤헷.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잘 된 결과지 않습니까?”
저이계가 양 손바닥을 비비면서 웃었다.
“은령선자께서는 마침내 태행사적을 붙잡았습니다. 비록 죽은 목숨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죽을죄를 지은 녀석들이니 누구의 손에 죽어도 상관은 없잖습니까?”
“네 말이 옳다, 돼지. 누구의 손에 죽어도 상관이야 없지.”
“헤헷. 그럼 은령선자 님의 일은 마침내 끝이 난 거군요.”
“그 말은 틀렸다, 돼지.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어.”
은교교는 도대광을 비롯한 네 구의 시체를 가리키며 외쳤다.
“천라옥벽을 갖게 되면 천하 무림의 모든 사람이 추격해 올 것이다. 그건 설령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이죠. 헤헤.”
“너는 태행사적 따위에게 그렇게 큰일을 감당할 담력이 있었다고 보느냐?”
“그럴 리가요. 겨우 마을 하나를 없애면서 어린아이들을 여럿 살려 놓는 녀석들이 어떻게 그런 큰일을 감당하겠습니까?”
“하여 나는 태행사적의 뒤에 배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배후 말입니까?”
“가령, 스스로는 뛰어난 무공을 갖고 있다 자부하지만 세상에서는 그저 괴상한 세 명의 요괴로 취급받는 자들은 어떠냐?”
저이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그는 물끄러미 은교교를 보다가 뒷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세 명의 늙은 마두들이 네 산적에게 사주한다. 천라옥벽을 훔치게 만들고, 그 옥벽을 받은 후에 그들을 다시 죽여 입을 막는다. 이로써 천라옥벽은 자신들의 가져가면서도, 태행산 네 도적의 죽음으로 천라옥벽의 행방은 영원히 미궁 속에 묻힌다.”
은교교는 허리의 검을 쥐었다.
푸른색의 검, 청상검의 검기는 언제나 서릿발처럼 차갑다.
“두 번 묻지 않겠다.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곧바로 벤다. 천라옥벽을 어디로 빼돌렸느냐, 식괴?”
“헤헤. 선자께서는 예쁘시고 무공이 강할 뿐만이 아니라 머리 또한 매우 좋으시군요.”
저이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렇지만 왜 쓰러지지 않습니까? 쓰러져야 할 때가, 이미 한참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