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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이혼대법-203화 (203/206)

<기적의 이혼대법 203화>

시뻘겋게 변한 시야가 익숙해지고 혈기로 들끓던 머릿속이 편안해져 갔다.

혈마신기에 저항하던 의지가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모든 감정을 긁어내고 오직 살의 하나로 가득 채우는 과정의 반복.

그 상황에서 적사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신체를 구속하는 것이었다.

한 가닥 남은 의지로 천축유가신공을 발휘.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고 골격을 비틀어 움직임을 제한해 버렸다.

자신의 인격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당연희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저항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

한데 그런 그의 눈앞에 피가 튀었다.

붉은 선혈이 당연희의 등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적신 것이었다.

뚝.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소리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을 뿐, 전신의 기파로 퍼져 나가는 그것은 일종의 육합전성이었다.

공기를 떨어 울리는 것을 넘어 그 진동에 바닥에 쌓인 눈이 비산하고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먹구름이 흩어졌다.

[오오오오오오오.]

사람이라고 영향을 받지 않을까.

그 기파에 십 리 안쪽에 위치한 모든 생명체가 부르르 떨었고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무허 역시 파리한 안색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손에 당연희의 피를 묻힌 채.

-천년지한.

그 모습과 함께 적사결의 뇌리에 떠오른 글귀였다.

그러자 머리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암흑천마공과 천령마기의 구결이 뒤죽박죽 섞이며 노도와 같은 파도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았던 ‘한’이라는 감정이 주는 마음의 격랑은 그토록 강렬했다.

이혼대법에 의해 과거 고아였던 기억을 되살린 적사결에게 소중한 존재를 다시 잃게 된 상황은 ‘한’을 품게 될 정도로 비통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지를 되찾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왜, 왜 그런 것이냐.’

눈앞에 피가 튄 후에야 상황을 인지했기에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무허가 그녀를 해한 것인지.

-원천우인.

그 물음과 함께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글귀가 재차 떠올랐다.

소중한 존재를 연이어 앗아간 하늘이 원망스러웠고 그것을 행한 무허를 탓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갈망이 불길이 되었고 복잡하게 뒤섞인 구결을 불태우자 하나의 구결이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천마재래.

구결의 완성과 함께 떠오른 다음 글귀.

전신에서 검은 불꽃의 형상을 띤 강기가 흘러나왔고 그대로 굳어지며 갑주의 형태를 만들었다.

마도의 종주 초대 천마가 입었다는 천마진혼갑. 암흑천마공의 방호기공인 묵혼마신체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갑주의 구현이었다.

이어 강기로 형성된 검은 뿔이 관자놀이 부근에 생겨났다.

천마신교의 교주를 일컫는, 이름뿐인 천마가 아니라 진정한 천마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평천귀마.

천마로 화하며 스스로를 마에 던졌던 평천.

마로 돌아간다는 글귀는 마에 속해 천마로서 살아갈 것이라는 다짐이기도 했으며, 평천이었던 자신을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적사결은 그 글귀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심신을 장악하고 있던 혈마신기를 제거했다.

그로 인해 단전이 깨졌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변질된 무공을 버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천마신공의 각성으로 억눌렸지만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잠시 후, 단전이 사라진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주변에서부터 대자연의 기운이 저절로 모이며 전신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버렸기에 얻은 새로운 깨달음이라 할 수 있었다.

‘설마…… 이것이 화경?’

전신이 자연계의 순수한 기운으로 채워지지만 또한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마치 비어 있는 항아리를 통째로 물속에 넣었다고 해야 할까.

이전까지의 단전이 물 한 그릇이라면 지금은 무한한 바다 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이는 천마신공을 익힌 흑사광조차 다다르지 못한 경지.

그는 적사결과 달리 자신도, 그리고 무공도. 무엇 하나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굉장하구나. 화경에 닿아 있는 무공이었다니.’

무공을 익히고 경지를 개척해 나가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무공 자체를 익힘으로써 경지가 개척되는 신세계라 해야 할까.

더구나 무공을 익히기 위해 구결을 해석하고 운기를 하고 초식의 숙련도를 높이는 일련의 체계조차 의미가 없었다.

그저 구결을 외워 놓으면 계기와 함께 발현되는 기상천외한 수련법.

지금 적사결의 머릿속에는 운공요결이나 초식에 대한 모든 것이 저절로 떠올라 있었다.

‘천마조사께서는 왜 천마신공을 나누신 것일까.’

암흑천마공과 천령마기를 놓고 보면 그것만으로도 절세 무학이라 할 수 있다.

하나 천마신공을 재현한 적사결의 관점에서 보면 고개가 저어질 정도로 하찮았다.

어떻게 보면 완전한 천마신공을 남기길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

‘아니다. 내가 조사님을 의심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계기라는 것이 말이 쉽지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어찌 쉽단 말인가.

운과 자질, 그리고 적합한 상황과 그에 따르는 심중의 변화까지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었다.

더구나 그전까지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을 버려야 하지 않은가.

적사결의 경우 그것이 무허에 의해 변질되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버렸지, 그렇지 않았다면 수십 년을 고련해 쌓은 무를 차마 버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의심의 이유가 많은 만큼 신공을 나눈 이유도 얼마든지 댈 수 있는 것이다.

스르륵.

마음이 정해지자 농밀했던 시간의 밀도가 옅어지며 눈동자가 쓰러진 당연희를 향했다.

가슴을 관통당해 심장이 파괴되고 척추가 끊어진 상태.

아직 혼백이 시신에 남아 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만약 반선주가 남아 있어 이혼대법으로 몸을 바꾼다면 천축유가신공으로 회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머리가 잘리지 않는 이상 의지로 발휘되는 재생의 공능이 있으니까.

하나 자신의 몸이 아닌 타인인 상태로는 불가능한 기예였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에 올랐더라도.

“……후우.”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가슴 절절한 한이 온몸에 새겨져 있다.

적사결은 슬픈 눈빛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대적을 바라보았다.

“저, 적 교주. 나는…….”

무허는 말을 잇지 못하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대화는 필요치 않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오직 생사결, 그것만이 남았을 뿐이니까.”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사과 따윈 필요 없다.

그런다고 지난 일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며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죽느냐 죽이느냐.

오직 그것만이 은원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교주의 말이 맞소. 나의 죄는 너무도 무거워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음이니. 한데 지금의 모습. 정말 혈마신기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오?”

무허는 생을 포기한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적사결이 피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듯.

‘빌어먹을 놈이 죽은 눈깔이나 하고서는.’

이대로는 쳐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아니, 가만 놔두어도 스스로 자진할 것만 같은 무허의 모습에 도리어 분노가 치밀었다.

파아앗.

검은 삼지안이 이마에 떠오르며 내공을 변화시켜갔다.

화경에 오르며 오행의 기운에 한했던 이전과 달리 원하는 속성으로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적사결이 변화시킨 기운은 혈마신기였다.

콰르르르르.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기분 나쁜 사이함을 풍기기 시작했다.

“흐흐, 왜 다 끝난 같으냐?”

“……으음.”

자신이 뿌린 씨앗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혈마신기에 반응하는 무허의 눈빛에 기광이 돌아오고 있었다.

“죽기 전에 알고 가거라. 내 네놈이 멍청하게 놓친 십계승은 물론이오, 소림의 속가 모두를 멸문시키고 그 뼈를 갈아 마실 것이니.”

강기로 형성된 두 개의 검은 뿔 탓일까.

끔찍한 살기를 풍기는 적사결은 그 자체로 지상에 강림한 악마로 보였다.

콰우우웅.

무허의 전신에서 전에 없던 황금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상서로운 기운은 그의 배후에 불존의 형상을 띄우는 중이었다.

서기를 발하는 눈빛은 단단한 결의와 각오가 서려 있었다.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이리라.

“오냐, 막아 보거라. 목숨이 다하는 그때까지!”

스팟.

부드러운 일보와 함께 적사결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경천동지할 충격파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갔다.

꽈광. 쾅. 꽈과과광.

패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적사결의 선공.

하나 무허의 반응은 노련했다.

유려한 장법으로 선공을 흘려내듯 받아 내자마자 강맹한 위력의 장법으로 되받아친 것.

오지에서 금빛의 용 다섯 마리가 쏟아졌다.

광룡파천권을 진룡폭혈장으로 승화시켰던 혈미륵신공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리연화공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사아악.

적사결이 손이 그어졌다.

그 한 수에 황룡 다섯 마리의 목이 떨어지고 공간이 잘렸다.

무허는 두 눈을 부릅뜨며 상체를 젖혔다.

촤아악.

스치는 경력과 뒤를 따라 흐르는 핏줄기.

진룡폭혈장이 파훼되고 호신강기까지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초식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단 한 번 휘두른 손짓으로.

퍼어엉.

진각과 함께 발밑이 터져 나갔다.

무허의 신형이 아홉 번의 잔영을 남기며 쇄도했다.

불문 초상승의 경신공인 연대구품.

이어 아홉 개의 잔영에서 아홉 개의 권강이 터져 나왔다.

천지를 부술 듯한 기세의 구법연화권.

여든 하나의 강환 모두가 실초인 지금의 수법은 이전의 무허가 다다르지 못한 경지였다.

죽음을 각오한 결의가 혈마로서 이룩했던 무위에 오르게 만든 것.

정신이 다다른 무위에 신체가 이끌려 합일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짧은 공방 중에.

쿠와앗.

적사결의 기세가 달라졌다.

삼지안으로 변화시킨 기운을 되돌린 것.

천마신공이 구백 년 전 천하를 발아래 두었던 맹위를 떨쳤다.

퍼퍼퍼퍼퍼퍼펑.

구법연화권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그저 적사결이 눈을 한 번 부릅뜬 것이 전부였다.

압도적인 기합만으로 공세를 와해시킨 것이다.

“크하압!”

무허는 포기하지 않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상의가 터져 나가며 전신이 찬연하게 금광을 뿌렸다.

동시에 단전 어림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연화좌대에 앉은 부처의 형상.

그 모습은 수양 중인 보리달마를 의미했다. 또한 보리연화공이라는 무공명이 붙여진 이유이기도 했다.

한데 그 옆으로 하나둘 새로운 부처의 형상이 떠올랐다.

지장보살, 문수보살, 천수관음,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부처가 늘어날수록 금광은 더 환하게 빛났다.

무허의 대오각성으로 보리연화공이 새로운 단계로 진일보한 것이었다.

푸화아악.

그 반대편에 선 존재.

적사결의 전신에서 암흑을 연상케 하는 기운이 하늘까지 닿을 듯 솟아올랐다.

정과 마, 생과 사를 대변하는 듯 대비되는 두 절대 고수의 모습은 서로에게 상극의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 대치중에 무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맙소, 적 교주. 그대 덕분에 마지막이나마 후련하게 갈 수 있을 듯하오.”

그는 적사결과의 생사결에서 그가 혈마신기를 이겨 낸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웃기는군. 본좌가 네놈을 후련하게 보내 줄 것 같으냐. 내 너를 억겁의 시간 속에 가두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적사결이 짓쳐 들었다.

내 뻗는 주먹.

맞닿는 의지.

무허의 안광이 빛났다.

콰쾅!

충격파와 함께 핏물을 삼키며 적사결이 무릎을 꿇었다.

무허의 오른손은 짓뭉개져 뼈가 드러나 있었다.

폭음이 나자마가 결과가 나온 것.

두 절대 고수의 싸움은 눈으로 인식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초신속의 공방은 멈추지 않았다.

꽈과과광.

또다시 적사결의 신형이 휘청이고.

무허의 몸에서 찢겨나간 살점과 피가 튀었다.

꽈르르릉.

무허의 왼팔이 어깨어림까지 통째로 소멸했다.

적사결은 그 모습을 광오하게 내려다보았다.

백중세가 아닌 한쪽이 압도적인 우세.

그럼에도 무허는 통쾌하게 웃었고 적사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무와 무가 부딪치며 발생하는 희열.

순수한 무의 제전은 치열한 모습과 달리 더없는 환희를 선사했다.

하나 먼저 무너진 것은 역시나 패색이 짙은 무허였다.

‘같이 갑시다, 적 교주.’

패배감과 함께 떠오른 생각.

바로 동귀어진이었다.

화아아악.

소림에 멸문지화를 선사했던 절초, 혈화만시.

아니, 광명범천이 생명을 불사른 무허의 전신에서 환한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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