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83화>
파파파팟.
나선을 그리는 혈선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한데 그것은 나한들의 강기와 충돌없이 바람처럼 지나쳐갔다.
마치 환영과도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파슷. 파슷.
혈선을 피하지 못한 나한들의 몸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토막이 나며 허물어져 버렸다.
일 수에 십여 명에 이르는 나한들이 주검이 된 것이었다.
“이런. 혈라마선수가 고작 이 정도에 그친 건가.”
무허가 혀를 차며 바닥에 나뒹구는 나한의 머리통을 툭 찼다.
방어 불능의 절초가 거둔 성과 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휴우, 그래도 이제야 한숨 돌리는군. 그놈들 참 어찌나 빨빨거리는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은 마치 산책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이제 본좌의 차례인가? 한 번 잘 받아 내 보거라.”
어깨로 올랐던 오른손이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내뻗어졌다.
검붉은 강기가 장심을 떠나자 나한들은 눈앞에 거대한 어둠이 닥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묵혈탈마장.”
꾸우우우웅.
나한들의 방어진에 들이받은 장공.
하나 구십여 명이 중첩해 펼친 화경에 기세가 점차 누그러졌다.
“본좌는 혼자이나 얼마든지 연환공세가 가능하지.”
이어지는 왼손의 장공은 벼락 같은 위력을 과시했다.
연이어 오른손의 장세가 부드러운 압박을 가하고.
왼손이 묵직하면서 빠른 패력을 또다시 때려넣었다.
콰과과광. 꽈광.
동일한 장공이나 수법을 달리하니 판이하게 다른 공세가 연이어 펼쳐졌다.
그 변화무쌍함에 나한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크윽, 다들 힘을 몰아주게!”
나한승 중 가장 실력이 높은 보경이 반장을 하며 기수식을 취했다.
모두가 동일한 절정의 실력을 발휘하는 첫 번째 공능을 뛰어넘는 다음 단계.
바로 백팔나한진의 두 번째 공능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부우우욱.
나한들의 공력이 물밀듯이 쏟아지자 승복의 상체가 찢어지며 터질 듯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핏발 선 보경의 눈에서는 힘의 압력을 버티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압!”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서기가 뻗어 나오며 수백 개의 강환으로 화해 무허에게 쇄도했다.
백팔나한진의 유일한 살초인 천수무량겁의 절초였다.
파파파파파팟.
무허는 눈앞에 천수관음의 손길이 강림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만큼 셀 수 없이 많은 금강환의 위용은 대단했다.
“과연 소림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로다. 상대에 부족함이 없구나.”
묵혈탈마장을 펼치기 위해 활짝 폈던 양손바닥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말아 쥐어졌다.
수많은 비기가 있지만 본디 무허의 장기는 권이었다.
승려임에도 그 무엇에도 거침없었던 그 성정에 걸맞게 말이다.
“구마혈살권.”
보경의 것처럼 좁쌀 크기의 강환이 아니다.
주먹만한 강환 아홉 개가 회오리치며 출수되었고, 그 인력에 천수무량겁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꽝. 꽝. 꽈광. 꽝. 꽝.
달리는 마차에 뛰어드는 메뚜기떼 같은 광경이었다.
천수무량겁은 구마혈살권의 공세를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순 없어 보였다.
“크아압! 대비금강!”
보경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소리쳤고, 두 눈에서 피눈물이 터져 흘렀다.
그러자 천수무량겁이 일점에 집중되며 구마혈살권의 앞을 막아섰다.
꽈아아아아앙.
엄청난 경파가 터져 나오고 그 힘에 산산조각난 나한들은 육편이 되어 휩쓸렸다.
천지가 뒤집어지듯 대연무장이 초토화되었고 그 진동에 대웅보전의 기와가 와르르 쏟아졌다.
무허 역시 가슴을 부여잡고 십여 보 물러난 상태였다.
주르르륵.
앙 다문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혈미륵신공을 대성한 이후 더 이상 피를 볼일이 없을 것으로 여겼는데 다시금 피를 흘리다니.
무허는 문득 백천악에게 당했던 굴욕이 떠오르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할짝.
입가의 피를 혀로 핥은 무허가 귀기 어린 혈광을 눈에서 발했다.
“백팔나한진은 오늘로 그 위명이 다했으니 지금부터 정화를 시작한다. 혈천지옥대, 모두 죽여라!”
추상 같은 명에 혈천지옥대가 붉은 궤적을 남기며 전면으로 쇄도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무승들이 달려들었지만 전력 차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비록 사법에 의한 원영신이나 그 위력은 가히 경천동지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였다.
“이놈들!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무산대사가 무상대능력을 출수하며 일성을 내질렀다.
백팔나한이 패하고 무승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절규하는 그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꽈과과광.
대력금강수의 일격이 혈천지옥대, 혈귀 하나의 가슴에 적중했다.
어찌나 위력이 강맹한지 강기에도 끄떡없던 신체에 수박만 한 구멍이 뻥 뚫릴 정도였다.
하나.
꾸물꾸물.
구멍이 메워지고 혈귀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괴성을 질렀다.
-키이이이익!
무산대사는 창백한 안색을 한 채 공력을 끌어올렸다.
“십계승은 지금 당장 전선을 이탈하라! 의천맹에 지금의 상황을 속히 알려야 한다!”
“방장 어른! 안 됩니다! 다른 제자들을 보내 주십시오! 저희들이 막겠습니다.”
공문이 혈귀 하나를 떨쳐 내고 무산대사에게 다가왔다.
“가거라. 다른 아이들의 실력으로는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야.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크흑.”
“속가문파들을 규합해 의천맹에 합류하거라. 그들을 도와 혈교를 저지해야 한다. 내 사형에 대한 일로 뼈아픈 실책을 하고 말았구나. 마교가 반으로 나뉜 것 때문에 너무 안이했던 것이야…… 아미타불, 이 죄를 어찌할꼬.”
“……하지만.”
“본파의 힘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다. 공문아, 너도 알지 않느냐. 너희들에게만 항상 무거운 짐을 지워 미안하구나…….”
공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산대사는 언제나 자신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다.
계율을 지키지 않은 제자를 처벌하는 계율원, 그 단죄를 실행하는 자들이 십계승이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같은 소림 제자에게 어려운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뜻에서 무산대사는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수십 번은 들었을 그 말이 지금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방장 어른. 끄윽!”
“가거라. 오래 버틸 수 없느니…….”
공문은 반장의 예를 올린 후 신형을 돌렸다.
“공수! 공도! 십계승을 모아라! 즉시 빠져나간다!”
공문의 지시에 십계승이 혈귀들을 뿌리치며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눈물을 훔치며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나 소림 제자들은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긴커녕 그들의 뒤를 막아서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소림 제자들은 들으라! 노납을 비롯한 모두는 이 자리에서 결사항전할 것이다!”
무산대사는 생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우리가 이들을 잡아 두어야 십계승이 후일을 도모할 것이고 아이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목숨 희생해 어린 제자들을 살리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니 무엇이 두렵겠느냐!”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는 무산대사의 등 뒤에 불존의 형상이 떠올랐다.
“아미타불, 방장 어른을 따르겠습니다!”
일제히 반장을 취한 소림 제자들의 눈에는 필사의 각오가 서려 있었다.
“보잘것없는 사람의 목숨. 벌레보다 못한 더럽고 구역질나는 오물일 뿐이지. 오냐, 버려라. 내 네놈들의 죄악을 직접 불살라주마.”
무허의 손에서 혈화가 피어올랐다.
이어 혈천지옥대의 혈귀들도 형상이 불꽃으로 변하며 일렁이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라져라.”
지옥의 겁화가 숭산 소림사의 경내에서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혈화만시.”
* * *
“쿨럭. 쿨럭.”
무산대사는 바닥에 쓰러져 연신 피를 토했다.
모두가 죽고 살아남은 것은 자신뿐인 듯 주변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어, 어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무산대사는 그제야 앞서 광혈존이 내뱉었던 초식명들을 떠올렸다.
비무도 아닐진대 출수하기 전 꼭 초식명을 내뱉은 것.
한데 연이어 떠오른 것은 그 명칭이 아닌 초식 그 자체였다.
말에 현혹되었던 것인지 그때 몰랐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혈라마선수…… 환허금혼수, 묵혈탈마장…… 서광개천장, 구마혈살권…… 구법연화권, 혈화만시…… 광명범천.’
형이 다르고 식이 달라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나 혈화만시를 몸으로 겪어 본 지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리연화공! 어찌…… 그대가 어찌 보리연화공을! 쿨럭.”
그저 초식을 흉내 낸 것만이 아닌 정수가 담겨 있었다.
물론 동일하진 않지만 분명 보리연화공의 심득이 담긴 마공이었다.
어찌 항마기공이라 불리는 무공을 마공과 조화를 이루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무산, 본좌가 아직 광혈존으로 보이느냐?”
“그게 무슨…….”
“탐랑성.”
“……!”
“모르진 않겠지.”
무허는 무산대사의 가슴에 발을 얹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쿨럭…… 누구냐?”
“본좌가 너의 사형이다. 아니, 사형이었지.”
“…….”
“쉬이 믿기지 않겠지. 흐흐흐.”
우지직.
“꺼흐으윽.”
약간의 힘으로도 가슴뼈에 금이 가며 무산대사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 사형이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무산. 인간으로써 남기는 마지막 말이니 말이다.”
무허는 자신이 얻게 된 반선주와 천마신교로 가게 된 일을 말해 주었다.
그의 속내까지 전부.
무산대사는 꺽꺽 거리며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황이 그러했으니까.
“반선주로 몸을 바꾸면서까지 이 사형이 마교로 간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
“설마 사부님의…… 유서를 본 것이오?”
“그래, 보았다. 방장실의 비고에 있더구나. 어찌 사부와 네놈은 평생 나를 속인 것이냐?”
무허에 대한 자금 지원을 끊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시니 소림에 청구되는 외상 대금이 줄을 이었고 열 받은 나머지 지원을 중단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방장실의 비고를 몰래 털려 했던 무허.
그곳에서 그는 죽은 사부의 유서를 보았고 그 안에서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무신불 법륜대사의 예언? 뭐? 탐랑성의 기운을 지닌 자가 언젠가 소림을 멸문지화로 이끌어? 그래서 사부님이 날 거두었고 보리연화공을 익히게 해!? 이런 시부럴!”
으지지직.
“끄허억!”
창백하게 변한 안색의 무산대사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호흡은 달싹거렸다.
“이런. 너무 흥분했나 보군.”
무허는 비릿하게 웃으며 발에서 힘을 뺐다.
무산대사는 반대로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쿨럭…… 그래서 증명하고 싶었소? 소림을 멸문으로 이끄는 자가 아니라 마교를 무너뜨려 진정한 불제자로 인정받고 싶기라도 했던 게요?”
“그래! 그렇게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빌어먹을! 뒤늦게 괴승으로 살아온 지난날이 후회되다니! 마교를 교화시키면 내가 그동안 저지른 죄를 씻고 소림의 제자로서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단 말이다!”
무산대사는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마를 척결하고 심신을 정화하는 보리연화공으로도…… 사형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소. 쿨럭. 나 역시 탐랑성의 본성을 모르지 않기에 이해하려 했고…… 사형이 천하사괴와 어울리며 취불이라 불리더라도 제지하지 않았소. 불음주계를 어기더라도 처벌치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고 말이오. 한데……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오? 사형은 사형 그 자체로 충분했소. 그랬기에 내 사형의 기행을 모두 용인했던 것이었소. 쿨럭. 쿨럭.”
“웃기지 마라! 나를 믿었다면 왜 사부님의 유서를 숨겼느냐! 왜!”
“이럴까 봐…… 이럴까 봐, 그랬소. 사형은 늘 자신의 본성을 의심하지 않았소이까. 그 때문에 사형이 밤마다 반야심경을 외우고 노력하는 것을 아는데 내 어찌 그 유서를 보여 줄 수 있었겠소. 헉. 헉.”
“그래, 그런 핑계로 늘 나를 감시하고 있었겠지. 내가 언제 미쳐서 소림을 피로 물들일지 걱정되었던 게지.”
“사형…… 헉. 헉. 아니오. 아니오.”
무허는 두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